【김란사 金蘭史(1872~1919)】"1919년 봄 파리강화회의 참석하려다 유행병으로 사망"
1872년 9월 1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무역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인천(仁川)으로 이주하였다. 1894년 인천에서 감리별감(監理別監)을 지낸 하상기(河相驥)의 후처(後妻)가 된 후 미국으로 유학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서 하란사(河蘭史)로 불렸다. 이화학당(梨花學堂) 시절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받은 뒤에 이를 음역(音譯)하여 ‘란사(蘭史)’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도 낸시라는 영어 이름으로 불렸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가 국민의 자각과 교육의 발달에 있음을 알고 신학문을 공부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서울의 이화학당(梨花學堂) 교사 룰루 프라이Lulu E. Frey를 찾아갔으나 기혼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여러 차례 청하여 겨우 입학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최초로 관비(官費) 여성 유학생이 되어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1년간 유학하고 돌아왔다. 이후 서울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서재필(徐載弼)이 남녀평등과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강연을 듣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897년 12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 D.C.의 디커너스 트레이닝 스쿨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한국 감리교 감독(監督)이자 스승인 웰치Herbert G. Welch의 주선으로, 1900년경 미국 오하이오Ohio주 내 감리교계의 웨슬리안 칼리지Wesleyan College에 입학하였다. 미국에 체재할 당시 그곳에서 박용만(朴容萬),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등 다수의 인사와 교류하였다. 1906년경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최초의 자비(自費) 유학생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에 있을 당시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노예해방에 영향을 받아 귀국 후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켜 자녀로 대우하기로 했다. 귀국과 동시에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여성교육자로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부터 이화학당의 학생자치 단체인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가르쳤다. 이문회는 비밀리에 태극기 그리는 법을 가르쳐 3·1운동 때는 학생들이 직접 그린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의 항일 활동도 전개했던 비밀결사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1911년에는 이화학당의 대학과 교수이자 기숙사 사감이 되었다.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Mary F. B. Scranton을 도와 성경학원(聖經學院)을 설치하여 영어와 성서를 가르치면서 여성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선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는데, 평소 한국인에 대한 포교는 한국인 스스로 담당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1907년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 자혜부인회(慈惠婦人會) 등에서 주최한 집회에서 연사로 등단하여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09년 4월 28일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자혜부인회·한일부인회(韓日婦人會)와 서울 시내 여학교들이 연합해 주최한 환영회에서 여성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박에스더·윤정원(尹貞媛)과 함께 기념장(記念章)을 받았다. 1909년 6월 8일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에서 개최된 여교연합장학회(女校聯合獎學會) 총회에서 총무로 추대되었다.
1910년 신흥우(申興雨)와 함께 미국에서 열린 감리교 집회에 여성 대표로는 최초로 참석하였다. 1916년 뉴욕 사라토가Saratoga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1년 동안 미국에 체재하면서 신학(神學)을 연구하고, 미주의 동포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연설을 하였다. 이렇게 미주 지역 순회강연을 하는 과정에서 안창호(安昌浩) 등의 협조로 모금을 통해 1918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였다. 현지 시카고에서 『신한민보(新韓民報)』 1916년 12월 21일자에 지원을 요청하는 글을 직접 투고하기도 했다. 1917년 9월 귀국할 때는 조선인 청년 수명과 함께 시카고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활동으로 인해 일제강점 직후부터 일본 경찰의 요시찰(要視察) 대상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제국주의와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인도주의가 부상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것을 계획하였다. 1919년 초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고해 의친왕의 밀칙(密勅)을 받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현지에서 유행병에 사망하였다.
1920년 1월 17일 중국 상하이(上海)의 강녕리(康寧里)에 있는 민단사무소(民團事務所)에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주최로 고(故) 하란사를 비롯해 고 이인순(李仁橓), 고 김경희(金敬喜) 등 3인의 애국 여사를 위한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애국부인회 회원 20여 명을 비롯해 안창호, 김립(金立) 등 다수가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