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농리 성지
경기도 이천 시내에서 동쪽으로 난 복하다리를 건너 우회전하여 죽산쪽으로 10km 정도를 가다 보면
우측으로 한 성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어농리 성지'(이천시 모가면)로, 1795년에 순교한 밀사 윤유일과 그의 동료들을 비롯하여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등
모두 10명의 순교자들을 모셔 놓은 곳이다.
이 중에서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야고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신이 없는 의묘이다.
윤유일은 양근 대감마을 권철신의 제자로 교회가 창설된 지 3-4년이 지난 뒤에야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
었다.
이 무렵 교회 지도층에서는 밀사를 선발하여 북경에 보낼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마침 성격이 온순
하며 입이 무거운 30세의 윤유일이 밀사로 추천되었다.
그는 아직 신입 교우였지만 신심만큼은 동료들을 탄복시킬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그러므로 험한 북경 길을, 그것도 천한 상인 신분으로 왕래해야 하는데도 순순히 밀사의 임무를 받아들
였다.
이후 그는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였다.
특히 두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는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서 훗날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였
을 때 필요한 성작과 제의 등을 받아 왔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는 포도나무 묘목을 윤유일에게 주면서 재배 방법과 포도를 수확한 뒤 포도주를 담그
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이어 1793년 말에는 동료 밀사 지황(池璜, 사바)이 북경을 다녀오게 되었고, 1794년 말에는 윤유일, 지
황,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등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영입하였다.
그 결과 1795년 4월 5일에는 주 신부의 집전으로 조선 땅에서 최초로 부활절 미사가 봉헌될 수 있었다.
이 부활절 미사 때 사용된 포도주는 5년 전에 윤유일이 가져와 가꾼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땅에서 최초로 가꾸어진 포도나무였고, 최초로 빚어진 포도주였다.
북경의 포도나무가 조선에서 신앙의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이미 윤유일과 동료들을 순교의 길로 인도해 가고 있었다.
부활절이 지난 어느 날 모든 사실이 조정에 밀고된 후 주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
지만, 밀사 윤유일, 최인길, 지황은 끝내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에서는 이내 그들에게 갖가지 형벌을 가하며 주 신부의 종적을 알아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밀사들은 결코 용기와 신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참 천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
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만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천상의 기쁨이 넘친 얼굴로 순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로 윤유일의 나이는 36세, 최인길은 31세, 지황은 29세였다.
순교 후 세 밀사들의 시신은 광희문(일명 시구문)을 지나 왕십리를 거치면 닿게 되는 살곶이다리(현 한
양대학교 동쪽) 부근의 강물에 던져졌다.
이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현재 어농리의 무덤은 의묘로 조성되었다.
윤유일의 순교가 즉시 양근의 본가에 회오리를 몰고 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은 결국 유명한 순교
집안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01년의 박해가 일어나면서 부친 윤장과 숙부 윤현이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았고, 숙부 윤관수(안드레
아)는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 사촌 노이 윤점혜(아가다)와 윤운혜(마르타), 운혜의 남편 정광수(바
르나바)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한편 4월 19일에는 교우들이 그토록 숨기려 애썼던 유일한 목자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한 뒤 새남
터에서 순교하였고, 5월 23일에는 강완숙 회장마저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조선 교우들은 주 신부의 순교시에 일어났던 기적을 서로 전하면서 기억했고, 훗날 이를 북경 주교
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본래 청명하였던 하늘이 홀연히 어두운 구름에 가득 덮이고, 광풍이 일어 새남터 모래 벌판에 돌이 날리
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
이 멀리 하늘 끝에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군사와 백성들은 이 날의 광경을 보고는 모두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징조'라고 생각했습니
다. (1811년 조선 교우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신미년의 서한'에서)
윤유오의 후손들은 이후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진리는 끈질긴 법이다. 그 집안의 신앙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고, 후손들은 1987년부터 윤유오의
무덤이 있는 어농리 선산을 성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윤유일이 영입한 주문모 신부,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인 윤점혜, 여회장 강완숙의 의묘도 함께 조
성하여 현양해 오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수원교구에서 추진하는 '윤유일과 주문모 신부 등 초기 순교자들 8분의 시복 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일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4호(1999년 5월), pp.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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