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은 온다
전민
사람들은 나보고 꼼꼼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겉보기와 달리 털털하고 덜렁댈 때가 많다.
지난 해 규슈로 여행을 가서는 내 인생 최고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언제 이곳에 다시 와서 한데온천을
즐기랴 싶어 새벽에 일어나 혼자 발걸음을 한 게 화근이었다. 반은 졸린 눈으로 간밤 풍경을 떠올리며 한 번 더
노천욕 호사를 누리려다 망신살을 뻗치게 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헐렁한 차림새로 조리를 벗으려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야말로 멘붕,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남자 탈의실로 돌진할 게 뭐람.
내 안에 쵸콜릿 복근에 대한 환상이라도 있었던가. 아니면 무의식 속에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욕망의 불씨라도
남아 있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번히 눈을 뜨고 남자 전용 탈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화들짝 놀라 뛰쳐
나오려는 순간 눈에 잡힌 것은 쵸콜릿 복근이 아닌, 뱃살 두둑한 남정네의 황당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그는 전날
온종일 투어를 같이 했던 낯익은 얼굴이었으니.
실수에도 이력이 붙는가. 어처구니없이 나는 또 헛똑똑이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아들은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멸치 볶았던 프라이팬에 달걀프라이를 해주면 사냥개 같은 코로 바로 알아내고는 저만치 밀어놓는다. 그런 녀석에게
아침마다 오메가3를 주었다. 출근이 늦어 허둥지둥 구두를 신고 나갈라치면 부리나케 현관문까지 나가 물 컵과 캡슐을
내밀곤 했다.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라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뿔싸! 내가 먹으려고 사둔 달맞이꽃유를 꼬박꼬박 아들
에게 먹인 것이었다. 그것도 한 달 가까이를. 세상에나! 서른 살 팔팔한 청년에게 폐경기 여성이 먹는 호르몬 보충제를
먹이다니. 색깔과 모양이 비슷해서 그런 것이긴 했지만 인제 나도 다 되었구나 싶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여태껏
녀석에겐 어미의 푼수 짓을 말하지 않았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이 있으니 달맞이꽃유도 상어오일로 알고 먹으면
오메가3가 되겠거니.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씻어 내야하는 팩을 영양크림으로 알고 바르고 다니질 않나. 머리 위에 안경을 올리고
온데 사방으로 찾으러 다니질 않나. 말하는 중에 주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맥을 끊질 않나.
불쑥 튀어 나오는 기억이 있다. 언젠가 약속 시간에 늦을세라 부랴부랴 겉옷을 걸치며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다.
승강기 안에는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조금 미안한 어정쩡한 나이의 여인이 지하 3층 버튼을 눌러놓고 있었다. 나는 1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일층을 지나쳐 곧바로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분명히 나는 1층을 눌렀는데. 당황한 내가 어라! 하는 사이 아차 싶은지 어중간이 아낙이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딴 생각을 하다 내가 취소 버튼을 눌렀어요.” 미안한 기색도 없어보였다. 엄연히 사람이 옆에 서 있는데
어찌 그런 정신없는 행동을? 요즘 내가 딱 그 짝이다. 딴에는 비껴가려 했지만 도리 없이 사돈 남 말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나이 드는 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몸과 뇌의 기능이 예전만 못하니 축복일리야 없겠지만, 치기와 격정에서 멀어져
일희일비 하지 않으니 재앙이랄 수도 없겠다. 그러나 실속 없는 사람 줄줄이 꿰어 적은 명함 내밀듯 구구절절 말이 많아져
젊은 층이 질려서 달아나버릴 정도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오래 되었다고 무조건 골동품이 아니듯 많이 살았다 해서 누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은 온다. 내겐 멀게만 느껴졌던 예순이란 나이가 시간을 갈아타고 내 앞에 당도했다. 실수를 연발시켜
내 높은 콧대를 꺾으면서. 공자가 말했던 이순, 과연 내 귀가 순해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에는 견뎌내기 어려웠던 일들이
슬쩍 넘어가지긴 한다. 욕망에서 한층 자유로워졌고, 손에 쥔 것 없어도 느긋이 살 수 있어 좋다. 억울한 감이 없진 않다.
그러나 사슴을 말이라 우기는 자의 말(言)까지 순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아직 멀었나? 하지만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
분노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순이 될 수는 없다. 사슴은 사슴이고 말은 말이라 할 수 있을 때 진정 살아있다 할 것이므로.
이제 규범 너머로 한 발짝쯤 내딛는다 해도 아무도 눈 흘기진 않을 것이다. 눈 흘기기는커녕 눈치도 채지 못할 것이다. 담대한
자유의 감정. 길눈이 어두워서 조금 더 머뭇거리겠지만 가벼워서 참 아름다운 노을 녘이다.
첫댓글
맞습니다
그냥 시간을 정말 유슈와 같다는 말이 정답니다
아름다운 글 마중으로 하루가 벌써 오후로 갑니다
좋은 글에 쉬어 봅니다
청송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