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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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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산책삼아 걸으며 감상하는 백제의 유적들, 작성산-금성산-비암산(‘16.5.12)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75 16.05.23 03: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작성산(鵲城山, 331.9m)-금성산(金城山, 418m)-비암산(碑岩山, 387m)

 

산행일 : ‘16. 5. 12()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과 전동면, 연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송성교임도작성산헬기장송전탑금성산(금이산성)서낭당고개비암산비암사비암사 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산행입니다.’ 산행대장의 말마따나 9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산행거리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산들이 무려 4개나 된다. 하지만 그중의 하나도 귀에 익은 이름은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다만 글자만 같을 뿐 다른 곳에 위치한 산들인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이는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산들이란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제대로 된 바위 하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에다 높이라고 해봐야 고작 400m 내외에 불과하니 색다른 볼거리를 찾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산과 산, 그리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지 않아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평지와 같은 산행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거기다 약간의 오르내림까지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임도(林道)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장점은 백제시대의 유적들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일 게다. 백제대제(百濟大祭)의 전통이 있는 비암사는 물론 치열했던 삼국시대의 전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금이산성(金伊山城)이 바로 그것이다. 호젓하면서도 편안한 산행에다 조상의 얼까지 한꺼번에 느껴볼 수 있으니 가족들끼리 찾아보기에 딱 좋은 산일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송성교(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215-1)

논산-천안고속도로 남풍세 I.C에서 내려와 1번 국도를 타고 조치원 방면으로 달리다가 전의면 동교리에서 국도를 빠져나온다. 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미곡삼거리(전의면 동교리)에서 좌회전 627번 지방도를 따른다. 잠시 후 개미고개삼거리(전동면 송성리)에서 우회전하면 곧이어 오른편에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조천()을 가로지르는 송성교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오른편에 있는 하천 건너에 흥진레미콘 건물과 흉물스런 채석장 현장이 보이니 참조한다.






다리(송성교)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 도로를 따른다. 사설 수목원(樹木園)베어트리파크로 들어가는 길이다. 50m쯤 걷다가 왼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로 방향을 바꾼다. 차도가 부럽지 않을 만큼 정비가 잘 되어 있는 임도이다. 아니 바닥에 자동차 바퀴자국이 나있는 것으로 보아 심심찮게 차량이 지나다니는 모양이다.



10분쯤 걸었을까 아찔할 정도로 높은 수직의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들머리에서 보았던 흥진레미콘에서 운영하던 채석장인가 보다. 주변에 산림복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지금은 운영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흉물스럽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개발사업을 원하고 있고, 그 사업들의 필수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골재(骨材)이니 말이다.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어디선가는 골재를 채취해야만 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렇다곤 해도 저런 모습보다는 조금 더 자연친화적인 복구가 이루어졌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길가 가로수들이 눈길을 끈다. 그 흔한 벚꽃나무가 아니라 곱디고운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다. 빨강색 옷을 입고서 벌써부터 나보라며 자랑을 시작했는데, 가을이라도 될라치면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지 모르겠다.



7분쯤 더 걸으면 왼편 산자락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들머리에 이정표(작성산0.9Km, 금이성 3.0Km/ 임도(송성리)0.8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길게 놓인 통나무계단을 오르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최근에 올랐던 산들 중에서 가장 잘 닦인 등산로가 아닐까 싶다. 이런 풍경은 산행 내내 이어진다. 길은 반반하면서도 넓었고,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거기다 쉴만한 곳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으니 이건 산행이 아니라 숫제 산책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4분 후 능선(이정표 : 작성산0.8Km, 금이성 2.9Km/ 임도(송성리)0,9Km)에 올라선다. 이후부터는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능선길이다. 그렇다고 오르막길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오르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오르막길이 계속될 따름이다.




19분쯤 걸었을까 허리에 조금 못 미칠 정도의 높이로 돌을 쌓은 축대가 나타난다. 작성산 정상(이정표 : 금이성 2.1Km/ 임도(송성리) q.7Km)에 올라선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삼각점(판독 불능)만 설치되어 있을 뿐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대구의 산꾼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 또한 트이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이곳 작성산에서는 주의 깊게 살펴봐야할 게 하나 있다. 다름이 아니라 공터에 나뒹굴고 있는 돌들이다. 쓸모없어 보이는 돌들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손길에 의해 다듬어진 듯한 흔적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혹자는 이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변 산들에 비해 낮기 때문에 봉수대가 위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군사시설(軍事施設)이 있었다고 본다. 규모로 보아 보루(堡壘) 쯤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인근에 있는 이성산성과 금이산성의 가운데에서 두 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었을 게 틀림없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만들어 두었다. 주변에는 널브러지다시피 방치되고 있는 향로(香爐)도 보인다. 주변 경관을 해칠 정도로 낡은 것이 사용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인 모양이다. 어쩌면 이곳 작성산에서 제사(祭祀)라도 지냈었지 않나 싶다. 그것도 제법 큰 규모로 말이다.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아까보다도 더 넓어졌다. 잠시 후 안부(이정표 : 금성산 1.9Km/ 작성산 0.2Km)에 내려선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있다. 송성1리 방향에서 작성산으로 곧장 올라오는 길도 있는 모양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향한다. 곧이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헬기장에 올라선다. 작성산에서 10분 거리이다. 조금 전 삼거리에서 이곳 헬기장에 오르지 않고 곧장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헬기장에서 3분 정도 내려서면 임도(이정표 : 금이성 1.3Km/ 작성산 0.8Km)이다.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이정표가 3개나 세워진 삼거리를 만난다. 하나는 등산용(금이성/ 송성리임도/ 작성산, 이성산)이고, 다른 하는 임도 트레킹용(달전리6.17Km, 다방리 8.50Km/ 송성리1.74Km/ 송성리3.94Km, 신방리 4.79Km),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문화재답사자용(기념물 제5호 금이성 5.4Km/ 기념물 제4호 이성 4.5Km)으로 보면 되겠다.





오른편 금이성 방향으로 들어서서 1분쯤 걷다가 왼편 산자락(이정표 : 금이성1.0Km/ 작성산1.1Km)으로 올라선다. 이어서 통나무 계단을 따라 8~9분쯤 오르면 송전탑(送電塔 : 132)이 나온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임도처럼 넓어진다. 아니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임도임이 분명하다.



4분 후 다시 왼편 산자락(이정표 : 금이성0.4Km/ 임도/ 작성산1.7Km)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딱 걷기 좋은 산길을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양곡리 갈림길’(이정표 : 금이성0.1Km/ 양곡리1.8Km/ 작성산2.0Km)이 나온다.




잠시 후 저만큼에 돌무더기가 보인다. 금이산성(金伊山城 : 충남 지방기념물 79)이다. 성터로 보이는 돌무더기를 지나면 각진 돌들을 네모지게 쌓아올린 대()가 나타난다. 백제의 역대 왕과 대신, 그리고 부흥운동을 하다 죽은 이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백제대제(百濟大祭)를 지내던 제단(祭壇)이란다. 백제대제의 역사는 백제가 멸망한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계유년(673) 415일 백제 유민들이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삼존석상'(국보 제106) 8개의 석불비상을 조성해 비암사를 짓고 백제대왕과 대신 등의 영혼을 달래는 제()를 올린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연기군에서 1983년부터 같은 행사를 재현(再現)했는데, ‘석불비상(또는 四面群像 : 아래 비암사편 참조)에 쓰여 있는 명문에 나오는 415일에 개최하고 있다. 현재 백제대제는 이곳이 아닌 비암사에서 치러진다고 하니 참조한다.



산성의 주변은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풍경이다. 제단 옆의 정자(亭子)는 비닐로 치장을 두르고 있고, 두 개의 산성 설명판중 하나는 아예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다. 또한 문화재조사 공고문발굴현장 안전수칙등 등산객들에게는 필요 없는 시설물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문화재 복원 정비사업이 한창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단의 옆에는 정자 외에도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안내도 앞에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조망이 터진다. 양곡리(전의면) 방향의 수많은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어떤 산인지는 모르겠다. 산에 대한 내 앎이 그만큼 일천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발굴조사가 한창인 현장의 왼편 능선을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 금성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하지만 이곳이 금성산의 정상인 줄을 알아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곳에는 삼각점도 없다. 물론 정상표지석도 있을 리가 없다. 거기다 이곳은 뽈록하니 솟아올랐다는 느낌까지도 없다. 그저 능선 상에 있는 극히 평범한 하나의 지점일 따름이다. 만일 나무에 매달려있는 정상표지판까지 없었더라면 누구할 것 없이 이곳이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올라왔던 곳의 반대방향으로 내려선다. 길을 가로막는 잡목(雜木)들 때문에 약간은 거친 길이다. 잠시 후 성벽(城壁)을 만난다. 대부분 허물어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다.



내려선 곳 근처에서 성벽을 넘는다. 그리고 성벽 아래로 난 길을 따른다. 자연스레 성벽의 보존 상태가 파악된다.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지만 약간 덜 허물어진 곳도 보인다. 그런 곳에는 철책(鐵柵)이 둘러쳐져 있다. 유적을 보호하려는 눈물겨운 투쟁일 것이다. 참고로 금이산성은 철성또는 금성으로도 불리는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금현성’(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을 이용해 신라가 함락시킨 성이다)이 바로 이곳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성의 길이는 714m, 폭은 4.55m 정도이며, 현재 남아있는 부분의 높이는 3m 정도이다. ··북쪽에 문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문은 바닥이 일정 높이에서 시작되는 형식으로 다락문과 같이 만든 현문식이다. 성안에는 북쪽과 동남·서남쪽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터의 형태가 남아 있으며, 정상부에는 건물터의 흔적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으로 보아 이 책이 편찬될 때는 이미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을 쌓은 수법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으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으므로 철옹성으로 불리고 있다.(문화재청 우리지역문화재편 등에서 참조)



금이성과 아쉬운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이정표(비암사 4.3Km/ 작성산 2.2Km, 금이산성 순환로)가 가리키고 있는 비암사 방향으로 길을 나선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려야 될 만큼 걷기 좋은 산길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약간 가팔라진 내리막길을 따라 잠깐 내려서면 임도에 이르게 된다. 금성산에서 15분만이다.




! 또 임도네?’ 이런 말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임도가 많은 산행이다. 그것도 오솔길 같은 임도가 산허리를 계속해서 돌고 있다. ‘능선을 오르내리는 게 부담스러울 때는 그냥 임도를 따라 걸으면 된다.’던 산행대장의 말이 실감이 난다. 오늘 산행의 특징 중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부담 없이 걷기에 그만인 코스이다.



길가에 쳐진 펜스(fence)가 끝났다싶으면 임도는 둘(이정표 : 비암사3.3Km/ 달전리방향 임도/ 쌍류리방향 임도/ 금이산성1.1Km)로 나뉜다. 임도로 내려선지 5분만이다. 위치상으로 볼 때 이곳이 서낭당고개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등산로는 이곳에서 임도를 벗어나 비암사방향의 오솔길로 접어든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완만해서 걷기에 딱 좋다. 거기다 바닥에는 솔가리들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숫제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다.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이런 기분이 산을 하나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정규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는 수디산(383,8m)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을 놓쳐버린 것이다. 길이 편하다고 해서 너무 좋아할 일은 아닌가 보다.



가는 길에 이정표들이 가끔 보이지만 특별한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어느 정도 왔고, 또 얼마나 가야 비암사가 나올지를 알려주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지맥종주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오늘 걷고 있는 이 구간을 금북전월금성단맥이라 부른다, 안성의 칠장산에서 분기(分岐)한 금북정맥은 국사봉(천안시 광덕면과 세종시 전의면, 그리고 공주시 정안면의 접점인 삼면봉)에서 금북전월지맥을 분기시킨다. 이 지맥은 또 다른 삼면봉(세종시 전의면과 서면, 그리고 공주시 의당면)인 갈미봉(310m)에서 북동방향으로 산줄기 하나를 분기시키는데, 이를 금북전월금성단맥이라 부르는 것이다. 주요 산으로는 비암산과 수디산(383.3m), 금성산, 작성산, 이성산(230m)을 들 수 있는데, 이 산줄기는 신방리 조천변에서 그 숨을 다한다. 하여튼 오늘 산행이 금북전월금성단맥이 품고 있는 중요 산들 4개를 오르게 되는 코스이니 단맥의 거의 대부분을 답사하는 셈이 된다.



서낭당고개를 지난 지 30분 만에 비암산 삼거리를 만난다. 이정표는 없다. 오른편으로 난 길이 또렷하지만 비암산 정상으로 가고 싶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비암산 정상을 둘러보고 난 뒤에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정상에서도 비암사로 내려가는 길도 나있기 때문이다. 다만 길이 희미하고 거칠기 때문에 돌아 나와야 한다는 표현을 썼을 뿐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았다 싶은데 벌써 정상이다. 그런데 이곳이 정상이라는 아무런 표시가 없으니 문제다. 생김새 또한 정상과는 동떨어져 있다. 능선을 걷다보면 구릉(丘陵) 같이 약간 솟아오른 지점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비암산이 딱 그렇게 생겼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다 정상이란 표시까지 일절 없으니 십중팔구는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산악회 리본들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지점이 정상이려니 하면 될 것 같다. 참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산이 이름이다. 대외적으로 이곳은 비암산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 아래에 있는 비암사의 기록을 찾다보면 절의 이름 앞에 붙어있는 운주산(雲住山)’이라는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사찰의 진산(鎭山)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방법이니, 이로 미루어보아 비암산의 원래 이름은 운주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하산을 서두른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난 오솔길이다. 7~8분쯤 걸었을까 금줄()줄로 막아 놓은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덕분에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은 오봉산과 운주산, 봉림산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안부에 이르니 부도(浮屠/浮圖)를 닮은 게 보인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도를 세우기에 적당하지 않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곁에 벤치 몇 개를 놓아 둔 것을 보니 조경용으로 만들어 둔 모양이다.



길게 놓인 계단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누군가 길가에다 꽃밭을 조성해 놓았다. 예쁜 꽃들 속에 자그만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표정들이 하나 같이 앙증맞기 짝이 없다.




능선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비암사(碑巖寺)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또렷해진다. 그리고 드디어 그 전모(全貌)를 드러낸다. 산중에 있는 사찰 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다.



방문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810년 된 느티나무이다. 보호수(세종 4)로 지정된 높이 15m, 둘레 7.5m의 이 나무는 비암사로 오르는 계단 옆에 있다. 나무 앞 담벼락에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라는 글이 적혀있다. 기세에 눌린 탓인지 괜시리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조용히 느티나무를 살펴본다. 옛날 사찰 인근의 민초들은 이 느티나무를 보고 올해의 농사가 풍년이 들지 아니면 흉년이 들지를 점쳤다고 한다. 잎이 밑에서부터 위로 피어오르면 흉년이 들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피어내리면 풍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는 과연 어디서부터 잎이 피어났을까? 위에서부터 피어 내려 왔기를 바래본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인 비암사(碑巖寺)는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통일신라 초기인 673년에 백제의 유민인 혜명법사가 전씨 등의 도움을 받아 창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는 1960년 경내의 삼층석탑 위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 국보 제60)에 쓰여진 '계유명 혜명대사'라는 명문에 근거한 것인데, 이 석불비상에는 백제왕과 대신, 그리고 칠세 부모의 영혼을 빌어주기 위하여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어 시납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뒤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全域誌)’에 비암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그 무렵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절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근래에 들어서이다. 1960년에 극락전 앞뜰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정상부분에서 사면군상(四面群像)이 발견됨으로써 세간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이다. 이 유물들이 국보급(국보 1, 보물 2) 문화재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전과 극락보전(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 산신각, 범종각, 요사 등이 있다. 또한 영산회괘불탱화(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2)와 소조아미타여래좌상(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3) 등의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앞에 삼층 석탑이 하나 보인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9m의 이 탑은 외관(外觀)만 보아서는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니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다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봐야할 가치는 없을 거라는 얘기이다. 이 탑은 그 외관보다는 품고 있던 사연(四面群像 : 사면군상)이 더 중요하다. 오랜 세월동안 국보(國寶) 하나에 보물(寶物)을 두 점이나 남몰래 숨겨왔던 것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 국보 제106)과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 : 보물 제367), 미륵보살반가석상(彌勒菩薩半迦石像 : 보물 제368)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60년 이 석탑 꼭대기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행날머리는 비암사주차장

절을 다 둘러 봤으면 이젠 주차장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절을 벗어나면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공간을 만난다. 아니나 다를까 다비 숲 공원이란다. 화장실에 들러 간단하게 세수를 마친 후 길을 나선다. 그리고 도로 양쪽으로 터널을 이루듯 솟아있는 나뭇길은 따라 10분쯤 내려가면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3시간1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한하면 2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물론 여유롭게 걸은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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