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문의 제자들 아짠 문의 주변에는 스님과 사미승들, 그리고 재가불자들을 포함하여 아주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다르마에 전념했으며 아짠의 가르침의 특성인 엄격하고 단호한 가풍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 중에는 아짠으로 존경받는 선사(禪師)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지위, 직함, 활동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아짠 문의 가르침과 훈련에 따르는 나이 많은 스님들도 있었다.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은 아짠 문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체계적으로 잘 소화함으로써 내면이 충분히 향상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아짠 문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데 능수능란하였기 때문에 많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그 제자 중 한 사람인 아짠 카오는 보석과도 같은 선사이다. 그는 우돈 타니 읍에 있는 탐 클롱 사원에 머물고 있다. 그도 역시 수행 방식과 통찰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엄격하고 단호한 수행방식으로 모범을 보이며 언제나 은둔하기를 좋아하여 두타행에 관한 한 제 일인자로 간주된다. 그는 현재 여든 두 살이지만 정진(精進)에 있어서 느슨해지는 갈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불자들 중에는 그의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그가 엄격한 두타행을 멈추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 사람들에게 아짠 카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신을 지배하는 마음의 독재자를 갖지 않는 사람에게는 방일함이나 게으름이란 없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염려하여 두더지가 파 올린 흙 두둑으로 산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그런 어리석음을 재고해 볼 필요도 없이 좌절과 실패로 끝날 게 뻔한, 실제로 일어났든지 혹은 상상으로 지어낸 곤경 앞에서 미리 겁먹고 움츠러드는 성향으로 그들에겐 걱정과 게으름으로 더욱더 악화된 빈궁과 곤경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 독재자를 제거한 사람에게는 그런 병적인 과장됨은 없다. 그 마음은 순수한 다르마이며 항상 안정되고 고귀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짠 카오와 같은 사람들은 아짠 문의 제자들 중 단지 몇몇에 불과하다(『위빠싸나 열두 선사』에 나오는 아짠 차와 아짠 마하 부와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훌륭한 제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큰 기쁨과 가르침을 준다. 이외에도 그의 많은 제자들은 아짠이 두타행을 실천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닐 때 만나서 가르침을 주었던 스님과 재가불자들이다. 이렇게 아짠의 예시적인 꿈은 실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수행 방식에 흡족해 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만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 중에는 단순한 추측에 의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그가 말하는 건 무엇이든지 체험으로 그 내용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사리카 동굴에서 머물면서 품어왔던, 자신의 옛 제자와 새로운 제자들 모두를 가르치고 수련시키겠다는 소망을 실현시켜 나갔다.
두타행 계율 다음은 아짠 문이 제자들에게 따르도록 권장한 두타행 계율이다.
① 집집마다 차례로 걸식하기(pindapato) 이것은 단식하기로 정한 날들을 제외하고는 두타행 스님과 사미승들에게 피할 수없는 의무이다. 마을에서 마을로 돌면서 끊임없이 집중하여 자기통찰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는 동시에 마음챙김과 정진력의 수행이다. 이때 마음이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특히 마을에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 많다. 이와 비슷한 유혹은 스님의 눈, 귀, 코, 목구멍, 그리고 몸과 마음을 통해 몰래 침입한다. 때문에 마을에 들어가고 나올 때 항상 조심해야 하며, 모든 동작과 몸짓은 마음챙김으로 보호해야 한다. 사실 이것 역시 일종의 수행 정진이다.
②식사 후에 음식 안 받기 수행자들은 그 양이 많든 적든 바루에 담긴 음식을 남기거나 더 추가하지 않는다. 나중에 보시된 음식은 받지 않는다. 즉, 스님이 마을에 탁발을 다녀온 후에는 어떤 음식이라도 받지 말아야 한다. 그 음식을 받는 건 자기 욕망에 굴복하는 것이다. 바루에 담긴 음식 외의 것을 탐낸다면, 만족할 줄 모르는 식탐에 사로잡혀 마음을 소모시키는 악마나 허기진 아귀와 같다. 이 계율은 식탐을 억제하고 주어진 음식에 만족할 줄 알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③ 하루에 한 끼만 식사하기 먹는 것에 대한 짐을 가능한 한 많이 내려놓고 마음 수행에만 집중하는 두타행 스님에게 가장 적절한 계율이다. 이 수행을 통하여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는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맛있은 음식은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킬 뿐으로 오히려 고의 소멸을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해롭다. 때로는 과식한 후나 식후에 반드시 따라오는 식곤증을 피하기 위해 일종식할 때의 음식 섭취량마저 줄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음식 섭취량을 줄이는 건 일반적인 수행에도 도움이 되고, 두타행 스님들이 식탐을 제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④한 바루 안의 음식만 먹기 두타행 스님들은 항상 돌아다녀야 하고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으므로 짐이 간편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뿐인 바루 안에 여러 가지 음식이 섞여서 역겨워질 수도 있다. 이 때 그 역겨움과 음식을 취하는 목적을 마음으로 관찰함으로써 마음챙김과 지혜가 성장되기도 한다. 아짠에 따르면, 명상을 하고 두타행과 다른 계율을 지킴으로써 법력이 꾸준히 깊어지는 걸 종종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짠은 이러한 수행 규칙들을 엄격히, 그리고 한결같이, 지켜 나갔던 것이다. 바루 안에 비빔밥처럼 섞인 음식을 먹는다는 건 미각을 즐기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는 데 효과적이다. 공양을 하는 동안 관찰의 대상은 음식의 본질과 먹는 목적에 집중된다. 음식을 취하는 목적은 오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이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에 대한 집착이나 혐오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이 같은 관찰은 마음이 균형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⑤누더기 가사 걸치기 시각적인 쾌락을 항상 억제해 온 아짠에게 이 수행은 일상 계율 중의 하나였다. 그는 공동묘지와 같은 장소에서 버려진 천 조각들을 주워 모아 기워서 한 벌의 가사, 또는 다른 용도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때때로 공동묘지에서 시체 위에 놓여진 가사를 ‘끌어당기기’도 했다. 마을을 드나들며 탁발을 할 때 길가에 버려진 천 조각들을 종류에 관계없이 주워 모으는 게 그에게는 하나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들을 깨끗이 빨아서 자신의 가사를 만들거나 겉옷을 수선하는 데 사용했다. 후에 그를 열심히 따르는 사람들이 아짠의 이런 관행을 알게 되자, 그들은 아짠이 탁발하러 다니는 길이나 그가 사는 곳 주변에 있는 공동묘지에 일부러 가사를 놓아두기도 하였다 아짠은 종종,“내면의 평화를 얻고 싶은 스님들은 속세 인간들의 눈으로 볼 때 하잘 것 없는 누더기처럼 보여야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있으면 먹고 자고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데 곤란을 겪지 않을 거라고 했다. 진정한 출가사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게 아니라 아집을 버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그들은 자존심이나 허영으로 스스로를 들뜨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출가자에게 기대되는 도덕성,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숙함이다. 정진하려는 사람은 예의 주시해서 허영의 침입을 막아야 하고, 허영으로 다르마의 영역을 잠식당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타락하여 인간보다 짐승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 아집을 버리기 위하여 자신을 넝마조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집을 제거하는 정도에 따라 다르마의 깊이도 비례한다. 거대하고 넓은 땅덩이처럼, 아집이 없는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허영과 자기중심의 벽을 부수고 나면 어떤 경우에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누더기 가사를 입는 두타행은 아집을 끌어내리고 벗겨내는 한 방법이다.
⑥ 숲 속에서 지내기 속세를 떠나 평화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숲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매우 좋다는 걸 수행 초기부터 아짠은 깨달았다. 숲 속에서는 사방의 모든 게 주의력을 일깨우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좌선을 하든 경행을 하거나 누워 있든, 다르마의 명상 속에서 안팎으로 마음챙김과 지혜가 언제나 그치지 않고 존재하게 된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마음과 몸은 쉴 수 있고 나는 것처럼 가볍다. 마음의 속박이나 강박감도 없으며 해탈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진다. 야생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새가 날아가듯이 마음은 번뇌의 굴레에서 더욱 더 멀리 벗어나게 된다. 여전히 마음 깊숙한 곳에는 미세한 번뇌가 자리 잡고 있지만, 이러한 환경에서는 마음의 힘이 현저히 향상되어서 수많은 번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정진자들이 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주위환경의 영향 때문이다. 이 때 주위에 있는 짐승들에 대해서는 두려움보다는 연민을 갖게 된다. 짐승들도 생로병사의 고통을 인간들과 같이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는 달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칭찬 받을 일이고 벌 받을 일인지 인식할 수 없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하겠지만,‘짐승’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명칭일 뿐이다. 역으로 ‘짐승’들이 인간에게 어떤 명칭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붙였다면 아마도 ‘악마’ 내지는 ‘잔인한 괴물’이기 십상일 것이다.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또는 재미로 무자비하게 짐승들을 죽이는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표현도 일리가 있다. 자신을 ‘사람’이라고 명명하는 수많은 인간들이 타인들과 짐승들에게 살상과 폭력을 그토록 자주 휘두르고 짐승의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해악과 공포의 불씨를 키워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인간을 악마나 잔인한 괴물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인간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두타행 스님과 짐승들 사이에는 뭐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우정의 끈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서워하는 야생동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짠은 경행 중에 우연히 멧돼지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멧돼지는 놀라거나 도망가기는 커녕 아짠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무심하게 그 주변을 배회했다고 한다. 아마 그 멧돼지는 아짠이 결코 잔인한 괴물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듯싶다. 몇몇 선원에서는 개들을 볼 수 있다. 개들은 선원에 있으면 해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 것 같다. 그 곳에 있는 한두 명의 소년들이 장난삼아 그들을 괴롭힐지는 몰라도 적어도 스님들에 의해서는 절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을 비추어 볼 때, 다르마는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과의 모든 관계에서도 항상 자비와 평화를 유지시켜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짠은 숲 속에서 지내면 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과 내적인 마음의 향상에 대한 관찰을 끊임없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은 항상 해탈을 향해 있고 이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정진할 수 있다. 수계식(受戒式)에서 계사(戒師)가 새 비구에게 주는 훈시에 의하면, 마음은 고의 소멸을 위하여 간절히 정진하는 수행의 전쟁터이다. 아짠은 잠시 읍내 같은 다른 곳에서 머물러야 하는 기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을 숲 속에서 보냄으로써 이 계율을 엄격히 지켰다. 황야 또는 숲 속에서 지내면, 고립과 한적함 속에서 오히려 깨달음은 이어지고 자기만족의 기회는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 고의 소멸을 열망하는 자에게 숲 속에서의 수행은 모든 덕의 원천이 된다.
⑦ 나무 밑에서 지내기 숲 속에서 지내는 것처럼 나무 밑에서 지내는 것도 수행에 상당히 이롭다. 아짠은 한적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던 밤에 마음이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였다. 주변에 울타리도 없고 아무 보호도 받을 수 없는, 나무 아래에 있으면 마음챙김이 향상되는 이점이 있다. 마음챙김의 능력이 끊임없이 계발되면서 번뇌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마음챙김의 대상 [몸 ․ 감각 ․ 마음상태 ․ 현상(法)]은 번뇌로부터 수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좋은 주제가 된다. 위험을 통하여 얻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고정된 마음은 해탈을 향한 진리의 전쟁터에서 갑옷과 무기(마음챙김의 대상과 은신처)로 무장한 군사와 같다. 그러므로 수행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싶은 자는 나무 밑의 은신처를 구하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그 곳에서 다르마의 큰 향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⑧ 공동묘지에서 지내기(외부의 묘지와 내부의 묘지) 이 수행 역시 수행자가 부주의함이나 자기만족을 경계할 수 있는 하나의 훌륭한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순간 자신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애써 피하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때를 살다가 이제는 죽어서 여기저기 묘지에 매장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라! 화장터나 묘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저 시체들도 한때는 우리들과 똑같이 살아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도 이런 자연 현상에서 예외일 순 없다. 친구나 친지의 묘지를 찾아 볼 때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먼저 의무적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며, 그 다음엔 죽은 이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스님은 해탈을 향한 고귀한 투쟁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그는 윤회의 고리에 대해서 안팎으로 공부해야 한다. 밖으로는 시체들을 묻거나 화장하거나 야생동물들의 먹이로 던져버리는 장소에 주의를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안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자신의 몸을 날마다 관찰함으로써 깨우칠 수 있다. 이와 같은 명상을 지혜로써 적절히 이끈다면 고양(saṅvega), 또는 통찰(直觀)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스님이건 재가불자든 간절한 수행자라면 묘지를 자주 방문하여 죽음을 관찰의 주제로 삼아서 수명과 젊음, 건강, 사회적인 지위, 계급, 직함 등에 대한 집착을 확실히 줄일 수 있는 계기를 갖는 게 좋다. 그렇다고 허영심이나 자존심이 완전히 극복되는 건 물론 아니다. 단지 이전처럼 심술궂은 마음으로 남의 잘못을 찾아내어 지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잘못을 먼저 찾아 고치려고 노력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남의 잘못을 지적하곤 하는데, 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악을 쌓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불행히도 이런 성향은 물리치기는 가장 힘들고 전염되기는 가장 쉬운 유행병과도 같다. 공동묘지는 나이, 계급, 지위, 국적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가장 큰 규모의 장소이다. 붓다와 그의 성스러운 제자들이 택했던 방법 말고는 죽음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생로병사의 위대한 법칙에 대해 총체적으로 깊이 관찰하지 않고는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 생로병사의 진리를 잊고 살아가려 해도 그걸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 진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묘지에서 수행하는 건 이러한 진리에 직면하여 자극을 받아 자신을 단련시키는 방법이다. 세속적인 마음에는 이것이 부조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붓다와 그의 성스러운 제자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수행하는 불자들은 이 방법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때문에 붓다는 수명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기만족적인 긍지를 낮추고 너무 늦기 전에 죽음의 순간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이 두타행을 권하였다. 우리들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모든 보호 수단들이 쓸모없게 되고, 거대한 죽음이 순식간에 다가온다.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단지 그 유해를 태우는 것뿐이다. 계율의 준수, 자비, 명상, 공덕을 쌓는 어떠한 수행도 그 이후로는 새롭게 시작할 수도 더 이상 계속할 수도 없다. 우리들은 자신이 항상 묘지(시체)를 갖고 다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자신의 지식과 행동으로 인하여 이 위대한 진리를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거대한 도시에 사고 있다 하여도, 언제 어디에서 공동묘지에 실려 갈지는 알 수 없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이든, 항상 이 위대한 진리에 의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말걸’하는 후회와 바람을 지니고 다니게 된다. 내면의 묘지를 항상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의 업은 번뇌를 다스리는 힘이 있다. 무덤까지도 초월하는 업의 힘보다 강한 힘은 없다. 업의 힘을 잊어버린척하거나 붓다보다 자신이 우월한 척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자만과 위선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따라서 아짠은 항상 안팎으로 인생의 무상을 느끼기 위하여 묘지를 방문할 것을 권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묘지에 대해 갖고 있는 평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이 두타행 계율에 따르며 분투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⑨ 세 벌의 가사만 입기 아짠은 이 두타행을 비구 수계식(受戒式) 이후로 줄곧 지켰다. 그러나 노령이 되어서는 몸이 점차 약해지고 더 많은 온기와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에 가사를 좀 더 입는 융통성을 보였다. 그의 시대에 두타행 스님들은 우기 결제철을 제외하고는 황야에서 머무는 것보다 편력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도보로 여행하였다. 스님들은 각자의 소지품을 직접 들고 다녀야 했다. 아무도 스님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재가불자들로부터 필수품을 제외한 다른 것을 보시 받으면 짐의 무게와 크기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도움보다는 방해가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가볍게 여행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들에게 제공된 여분의 가사나 다른 물건들을 사양하곤 했다. 이러한 생활방식을 지닌 이들에게는 여분의 것들을 지니거나 가지고 다니는 게 확실히 짐스러웠다. 이러한 경향은 또한 무소유(無所有)와 청정을 앞세우는 출가자 특유의 수행 양식과도 일치한다. 입적할 때 필수품 이외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스님은 한층 더 깊은 존경을 받는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스님들은 청빈한 삶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다가 육체가 죽으면 행복한 상태에서 육체를 떠나며 마음은 모든 소유물과 분리된다. 덕을 갖춘 신과 인간들로부터 항상 존경받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청빈함 속에서의 죽음이다. 두타행은 이처럼 출가자의 삶을 빛나게 한다.
아짠은 이와 같은 두타행들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당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를 필적할 만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그는 자신의 스님 제자들에게 이 두타행을 항상 염두에 두어 근면하게 지켜야 한다고 철저하게 가르쳤다. 아짠은 그의 생애 마지막 날까지 이 계율들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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