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부터 떠돌기를 좋아했다. 열네 살에 고향을 떠나 어디든 내가 머물며 사는 곳이 바로 고향이라 여기며 살았으나 가랑잎처럼 떠도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툭하면 배낭을 꾸리는 내게 누이는 저 놈의 역마살을 어이할거냐며 혀를 차곤 했지만 나는 여행지의 낯선 풍경이 참 좋았다.
혼자 무슨 여행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자주 홀로 여행을 했다.
여행이 둘이 가면 오붓해서 좋고 여럿이 가면 함께 어울려서 좋은 것이긴 해도 여행의 진짜 맛은 홀로일 때 제대로 느꼈다. 그때는 혼밥, 혼술, 혼행이란 단어도 없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청춘인지라 왕복 차비 빼면 비용이 늘 빠듯했기에 언제나 숙박비가 가장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야간열차다.
지금보다 세월이 느리게 가던 시절이라 그랬을까.
고속열차가 없던 그 시절 청량리나 용산역에서 자정 가까울 무렵 기차를 타면 새벽녘이나 이른 아침에 도착하던 여행지가 많았다.
야간열차가 숙박비를 아낄 수 있는 여행 방법이었는데 남는 게 시간이고 넘치는 게 체력이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너무 일찍 도착했을 때는 대합실 의자에 기대 두어 시간 노루잠을 자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아마도 스무 살 무렵일 것이다. 사귀던 여친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 둘 다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서로에게 끌림이 생겨 진도가 한참 나간 후였기에 둘만의 여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마장동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던 시절이었다. 상봉터미널이 생기기 전인데 버스로 가는 여행은 주로 이곳을 이용했다.
동마장 터미널이라 불렀다. 불광동과 신촌에도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지만 주로 가까운 곳을 운행했고 동마장에서 출발하는 노선은 먼 여행지가 많았다.
먼 곳을 가기 위해 그날 마장동에서 탄 버스는 도착하니 금방 밤이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는 역이나 터미널 주변에 숙박업소가 몰려 있었다.
여관도 있었지만 주로 여인숙이 많았다. 여친과 함께 갔으니 여관에 들면 좋았으려만 가난한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여친도 여인숙이 무슨 대수냐며 흔쾌히 동의했다.
숙박부를 쓰던 시절이었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잠 자는 것까지 신고를 해야만 했다.
요금을 지불하고 바로 앞에 놓인 숙박부에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를 적어야 한다. 내가 뻔질나게 여행을 갔던 터라 익숙한 일이다.
나는 숙박부에 본명을 쓰는 일이 드물었다. 꼭 속일려는 생각이라기보다 이런 것까지 써야만 하는 시대에 대한 얼치기 반항이었을 것이다.
여인숙 앞에는 수배자들 사진과 신상이 적힌 대자보가 항상 붙어 있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가명을 적었다.
그때 내가 주로 쓰던 예명이 장영찬이다. 당시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이 막 나와 장안의 종잇값을 올리던 때였는데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장총찬이었다.
장총찬을 그대로 쓰기는 뭐해서 장영찬으로 정한 것이다.
지금이야 여인숙이 박물관에 갇힌 싸구려 유물처럼 들리지만 예전에는 조바라는 종업원이 있던 가장 대중적인 숙박업소였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아 옆방의 야릇한 소음이 들리기도 했지만 이것도 사람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생활소음이라 여기며 너그럽게 넘어 가던 시절이었다.
어떤 여인숙은 유독 방음이 취약했는데 언젠가 혼자 여행을 갔을 때 경험한 일이다.
방과 방 사이 천장과 닿은 벽쪽에 구멍을 뚫어 긴 형광등 하나로 두 방을 절반씩 나눠 비쳐주는 구조였다.
옆방 소음이야 그렇다쳐도 스위치가 하나라서 문제였다. 내 방에만 스위치가 있었던지 불을 끄고 누웠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 미안하지만 스위치 쪼매만 올려 주이소."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해하는 내게 중년 남성이 절반만 보이는 천장의 형광등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쪽 방에는 스위치가 안 되네예. 반 시간 후에는 꺼도 됩니더."
뭐 이런 일이 있나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적응했다. 나보다 더 난감했을 순박한 중년 남성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숙박비를 돌려달라기도 뭐하고 숙박부까지 적은 마당에 다른 곳을 가겠다며 나서기도 그렇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숙박부를 쓰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다.
남루하지만 따뜻한,,
첫댓글 스무살시절에 여친과 함께 여행을 다니셨군요
저는 술취하거나 기차를 놓쳐서 역전앞 여인숙에 몇번 가서
잔적이 있고 20대초반에 여행가면 주로 텐트를 치고 잤었지요
그시절 아련한 추억입니다
맞습니다. 예전에 여인숙은 첫차를 타려는 사람이나 막차를 놓친 사람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요긴한 숙박업소였습니다.
요즘엔 찜질방이 그런 용도를 대신하고 있지요. 저도 장거리 산행을 할 때는 텐트를 가져간 적이 많았습니다.
그산님과 한 시절의 추억을 공감할 수 있어서 참 좋네요.ㅎ
많은 걸 일찍 체험한 경우인데..ㅎ
그랬죠..60-70년대는 무전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많았고..
간첩도 많이 내려왔고..그래 통금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임검이라해서 숙박업소 임검이나
심지어 극장에서도 임검석이 있었고..
전력난이다보니 두방을 연결해 형광등 하나로 사용하는 경우 많아
글에서처럼 에피소드도 많았던거 같습니다.
가만보니 유현덕님은 10년 선배들과 같은 조숙한 삶을 살았는데..
오늘 우리가 잊고 지내던 지난날의 풍속도 그림을 아주 잘 그려주셨습니다~~^^
ㅎ 제가 간첩은 본 적 없어도 무전여행을 다녀왔다는 선배는 있었더랬지요. 저는 무전여행은 못해 봤으나 짠물여행은 자주 했답니다.
숱한 날들 여행하며 가명 숙박계를 적었지만 임검에 걸린 적은 없었습니다.
언젠가 딱 한 번 강화읍 여인숙에선가 밤중에 경찰이 와서 숙박부는 보지 않고 주민증을 보자해서 보여준 적은 있네요.
제가 일찍 사회생활을 해서 몇 년 선배들과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끔 애 늙은이란 소릴 듣기도 했으나 지금도 철이 없기는 여전합니다.
잘 익은 곶감 빼먹듯 옛 추억을 하나씩 소환해서 나누는 것도 사는 맛이 아닐까 합니다.ㅎ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 포천군 일동면으로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시절,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주말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토요일 낮 버스를 타고 가서 내릴 땐 주로 청량리에서 내려서 전철로 종로로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갈 때는 마장동에서 막차를 탔지요.
상봉 터미널이 생기니 그 터미널은 참 낯설었어요.
여인숙의 방 두 개를 한 큐에 비추던 형광등, 숙박계, 우리네 젊을 적 풍경을 불러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달항아리님이 동마장 터미널의 추억을 온전히 담고 계신 분이네요. 지금은 마장동이 고기 다루는 푸줏간이 몰려있는 곳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터미널이 있던 때는 교통 중심지였지요.
예전에는 서울역에서 창량리까지 다니던 지하철을 타면 대단한 문명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청량리역 광장에 시계탑이 있던 시절 주말이면 엠티 떠나는 청춘들로 가득했지요. 어쨌거나 여행자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여인숙에서 파생하는 추억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감성 풍부한 달항님, 공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ㅎ
마치 바나나 껍질을 벗기다 먹어보지도 못하고 떨어뜨린 기분입니다.
댓글 모두 샌님들 같아서 저라도 혼자 빙그레 웃다 갑니다.
작자야 객관적 정경을 소개할 뿐이지만 독자로서 추임새를 넣어봤네요.ㅎ
역시 석촌 선배님은 댓글마저 기발한 위트가 넘쳐 읽을 맛이 납니다.
먹기도 전에 땅에 떨어진 바나나로 개미들 좋은 일만 시키게 생겼습니다.ㅎ
경험 풍부한 대선배님 앞에서 빈약한 추억거리로 주름 잡는 것은 아닌가 해서 다소 계면쩍기도 하구요.
암튼 선배님 추임새는 기막히게 좋습니다.ㅎ
옜날 소설읽으면
그 백열등 스윗치
때문에 쌈도 일어나고
그랬는데요~ㅎ
ㅎ 그런 소설도 있었나 보군요. 예전에 읽었던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에도 없던 내용이네요.
선배에게 제가 본 반쪽 형광등 얘길 한 적이 있는데 당신은 보지 못한 풍경이라고 그러더군요.
여름에님 열대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ㅎ
이문열씨 자서전 비슷한 산문집에
당시 돈 없는 숙박객들이 갹출해서 여인숙 방하나에 여럿이 자기도 했답니다
본인도 생활이 궁핍한 복학생이라 책 몇권든 보퉁이 들고 낮선 이와 한 방에 들었는데 밤새 잠을 못이뤘답니다 잠들면 전재산이던 책과 몇푼의 돈을 훔쳐갈까봐 과거 대학생 참고서 전문 서적은 급하면 맡기고 융통되는 현금이기도 했으니까요 보퉁이를 베개처럼 베고서 잠 못들던 의심의 갈등
읽는 내내 사람이 가난해지면 그 마음조차 옹졸해지고 나약해짐을 저자와 함께 공감했지요 옛날 일이지요
저도 예전에 이문열 선생의 삼국지를 비롯해 여러 소설을 읽었지만 여인숙 이야기는 읽어 보지 못한 내용입니다.
선생이 한때 법학을 공부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 시절 풍경이 아닌가 싶네요.
전공 서적이나 참고서를 사기 위해 청계천 헌책방을 다녔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풍경입니다.
저도 가난한 여행을 하며 참 구차한 경험들을 많이 했지만 신세타령을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워낙 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대야에 운선님과 추억을 공감할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ㅎ
@유현덕 제가 제대로 다 쓰지 못했지만 원문에 보면
그날 작품 속 화자는 모처럼 함께 자게될 동행과 소주 한잔 하면서 꽤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인생과 예술 고뇌 가난 젊음 등 그렇게 터놓고 나눈 대화는 간데없이 자신이 고작 책 몆권과 지페로 그를 의심하여 잠을 설친다는 현실앞에 견딜 수없는 인간적 비애를 느꼈다는 골자였지요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ㅎ
유현덕님의.
숙박계를 쓰던 시절의 글
잘 읽고 갑니다...
유난히 심한 올 여름폭염
건강 유의 하시길 바랍니다
지인 운영자님 못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워도 너무 더운 요즘 날씨 정말 대단한 위력이네요.
그래도 더운 여름에 곡식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생각하며 견디고 있습니다. 지인 선배님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카페에서,
제가 글 쓰는 방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진 풍속도 입니다만,
특히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공감은 가지만 직접
경험치 못한 것들도 많지요.
유현덕님의 글이 좋은 것은 어려운 곳에서도
주눅듦이 없이, 주위를 비방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당당합니다.
글, 매우 잘 읽었습니다.^^
사람 관계에서 말로 대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글로 소통하는 맛도 대단한 매력입니다. 글쓴이에 따라 결이 느껴지기도 하고 표정이 보이기도 합니다.
저 또한 다른 분들 글에서 제가 겪지 못한 것을 읽을 때면 공부가 되곤 하지요. 그것이 공감의 덕목이 아닌가 싶네요.
단아한 분꽃 같기도 한 콩꽃 선배님 댓글에서 저도 여러 가지를 배웁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