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결혼과 성 – 사랑의 성애적 차원
혼인의 관계는 단순히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생활을 공유하는 관계에 그치지 않습니다. 혼인 관계에서는 말의 나눔뿐만 아니라 몸의 나눔도 중요합니다. 결혼 생활에서 성생활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혼인의 사랑이 완성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사랑뿐만 아니라 몸의 사랑도 필요합니다. 혼인의 사랑은 육체와 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로,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가치로 상대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사랑의 기쁨’, 151항).
성에 대한 교회 이해의 변화
교회는 오랫동안 육체와 성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해 왔습니다. 정신과 육체, 영과 육의 이분법적 사고는 자연스레 육체와 성(또는 성욕)을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몸의 본능적 욕망과 결부된 성은 죄와 연결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초기 교회 일부에서 발생한, 금욕주의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동정에 대한 왜곡된 숭배는 육체와 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성은 자녀 출산을 위해 용인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성에 대한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근대 교회에 이르러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성은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150항)라고 교회가 천명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입니다. 특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부부의 성적 욕구는 경시의 대상이 아니라 부부 사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150항 참조).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몸의 신학에 관한 교리 교육에서 성적 차이가 있는 육체는 ‘풍요와 출산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인간은 선물이 됩니다.’”(151항).
성에 관한 교육과 식별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성적 사랑의 자발성”과 “열정과 성에 관한 교육”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적 사랑은 자발적이고 존엄한 것이지만 동시에 성적 욕망은 쾌락의 추구와 충동적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에 대한 교육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인내와 끈기로 육체의 본질적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성적 사랑의 자발성과 존엄성을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충동에 대한 현명한 식별이 요청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적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성의 사랑이 온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참된 교육, 본능과 충동에 대한 식별, 상대방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전제되고 요청된다는 의미입니다(151항).
사랑의 성애적 차원은 부부의 만남을 아름답게 해주는 선물입니다. 부부 사랑의 에로스적 측면은 죄와 악이 아니며 또한 부담과 짐도 아닙니다. “사랑의 성애적 차원은 다른 이의 존엄을 존중하는 사랑으로 승화된 열정입니다”(152항). 그래서 부부의 육체적 사랑 안에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수용하겠다는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폭력과 악용
성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능과 충동, 쾌락과 만족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현대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성은 타나토스(죽음)와 니르바나(열반, 희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성은 맹목적 충동과 탐닉을 통한 파괴와 폭력이라는 위험 요소를 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현실에서 “성은 종종 비인간화되고 건전하지 못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153항) 우리는 간과해서 안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성은 “자기주장과 개인적 욕망과 본능의 이기적 만족을 위한 기회와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고, “이용하고 버리는 사악한 정신에 지배당할 위험에 처해”있기도 합니다(153항). “다른 이의 육체를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고, 매력이 사라지면 거부해 버리는”(153항) 현상이 오늘날 만연합니다. 이 시대의 성은 늘 폭력과 악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혼인 관계에서조차 성은 때때로 상호 신뢰와 사랑의 표현으로 작동되지 않고 일방적 욕망 충족과 지배와 폭력과 굴종의 형식으로 작동되기도 합니다. “부부의 성적 결합의 행위가 ‘참으로 인간다운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 이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성의 본질에 맞갖게 됩니다”(154항). 부부 사이에도 성은 ‘상의’와 ‘동의’와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성은 탐욕으로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건강한 거리와 각자의 고유한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놓치면, 성은 일종의 탈출구로 이용되거나 부부 결합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됩니다(155항). 부부 사이의 성은 서로를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부부의 상호 소속이 일종의 지배 구조로 바뀌면 관계에서 친교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의 연결과 동일시함이 파괴되어 몸의 모든 의미가 박탈됩니다. 몸은 그저 탐닉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155항).
“모든 형태의 성적 굴종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합니다”(156항). 부부의 성은 상호 증여와 상호 존중과 섬김이라는 형식을 통해 완성됩니다. “이는 신의와 존경과 배려를 바탕으로 서로가 자유롭게 선택한 상호 소속을 의미합니다”(156항). 부부의 성 역시 지배와 복종, 폭력과 굴종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동등하고 평등한 방식으로 성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의 영역에서 있어서도 민주주의는 필요하다는 뜻입니다(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물론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라는 것이 성적 차이와 구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156항).
성과 사랑의 결합
성과 성애에 대한 왜곡, 성적 폭력과 지배, 성적 억압과 굴종은 거부해야 하지만, 이러한 거부가 육체와 성에 대한 경멸과 무시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157항). 부부 사랑의 성애적 측면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진실하고 기쁜 감사의 마음으로 애무 포옹, 입맞춤, 성적 결합을 통한 사랑의 육체적 표현의 수용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157항).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차원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개인적 바람과 욕구를 채우고 충족해야 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일이지만 동시에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육체적 사랑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이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서 늘 그 위험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하지만, 육체적 사랑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간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기만을 갈망하고 육체를 단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거부하려 한다면, 영혼과 육체 모두 그 존엄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157항).
혼인의 사랑은 몸과 마음의 사랑입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지만, 때때로 분리되기도 합니다. 마음은 익숙함과 친밀함을 원하고 몸은 새로움과 신선함을 원합니다. 몸과 마음의 괴리가 갈등과 분열을 낳습니다. 혼인의 사랑은 끊임없는 노력과 조율이 필요한 여정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1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