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말씀의 초대
사무엘이 사울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사람임을 깨닫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세관인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이 그분과 함께 자리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비난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부르러 당신께서 오셨다고 분명하게 밝히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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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기 위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존경으로 그분과 함께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의인으로 여긴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며 함께하시는 것에 강한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단언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식탁에 함께할 수 있는 복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의 몫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자비를 절실하게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은총을 넘치게 주신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주님을 찾으려 하는 모든 시대의 어떤 처지의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 좋은 모범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불멸의 명저 『고백록』에서 그는 투명한 열정으로 독자들을 “일상은 고양, 위로, 관조가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의 체험이며, 그것은 낙담과 절망의 경계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진실과 대면시킵니다. 또한 이러한 죄인의 아파하는 마음에서 어떻게 은총의 광채가 빛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마음이 구원의 시작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제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갈림길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도 역시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 초대하고 싶다면, 먼저 오만함을 버리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가운데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매 학년 담임선생님께서는 저의 장래희망을 물어보았지요. 그때마다 제가 말했던 장래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신부님? 아니었습니다. 저의 장래희망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일찍 결혼을 해서 많은 자녀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교리 선생님이 “너 나중에 신학교에 가라.”고 하셨을 때에는, “선생님! 신부님 되면 결혼 못하잖아요. 저는 꼭 결혼해야 해요.”하면서 저의 진로를 명확하게 말하곤 했었습니다.
그때의 말과 다짐들을 지금 현재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되지도 못했고,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선생님이 되어 일찍 결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었지요. 오히려 결혼하지 못하는 신부님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 불가능하고 생각했던 일이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했었던 장담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연인들끼리 연애를 하면서 이런 말들을 한다고 하지요.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야.” 그런데 어떻습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을까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사랑도 부딪히면서 조금씩 변화지요. 결국 서로 타협하고 수정하면서 또 다른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관련된 장담 역시 완벽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장담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인간입니다. 이러한 부족함으로 인해서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겉으로 짓는 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짓는 죄도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 모든 죄 하나하나를 따져 물으시고 벌을 주신다면 우리들은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 인간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 때문에 당신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시면서, 당신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큰 죄인이라고 불리었던 세관장 레위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시면서 하신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명확해집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앞서 부족함이 너무 많아서 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부르러 오신 것일까요? 자기가 생각했던 사람들만이 아닌,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인간 모두를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내 자신이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내 자신을 더욱 더 깊이 낮출 수 있는 겸손함을 청하도록 합시다.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떄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다(김어준).
그렇게 바쁘면 황제를 그만두세요.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길을 가는데 어떤 여인이 앞을 막아서며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말하면서 해결해주길 청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자기가 지금 너무 바쁘다고 말하면서 자기 갈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하네요.
“그렇게 바쁘다면 황제를 그만두세요.”
황제의 자리는 백성의 아픔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지요. 단순히 자신의 편이만을 생각하고 백성의 아픔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쁘다는 말을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하루하루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바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상황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말로 해야 할 것을 하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바치면서 보여주셨던 사랑이지요. 우리 역시 이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항상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눔보다는 소유를, 희생보다는 욕심을, 일치보다는 분리를, 사랑보다는 미움을 더 앞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앞세우지 않고 살아가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시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김대열신부-
의인은 누구이고 죄인은 누구인가? 그 가름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분명하게 그 기준을 말씀 드리련다.
세상의 척도로 잰 죄의 무게나 크기가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인과 죄인의 구별은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에 따라 나누어지는 의인과 죄인이다.
당신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한 보잘것없는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삶이 남긴 얼룩이 진해질수록, 시간의 아쉬움을 절감할수록 늙음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수록 당신 앞에 저는 더욱 더 깊은 죄인이 되어만 갑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죄만이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이다. ---- 당신에 대한 평판보다는 당신의 성격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여라. 당신의 성격이 진짜 당신의 모습이고, 반면 당신에 대한 평가는 그저 타인이 생각하는 당신이기 때문이다. (죤 우든) Be more concerned with your character than your reputation. Because your character is what you really are,
while your reputation is merely what others think you are. - John Wooden -
< 얼음 땡! >
-전삼용신부-
김창옥 교수의 강연을 운전하면서 들었는데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창옥 교수가 아침마당에서 강의를 하고 난 후 어떤 자매님이 전화를 걸어 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오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소리는 편해 보이지 않고 긴장되고 딱딱하고 조리 있지만 방어적인 편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심리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그 자매가 자신의 직업은 ‘심리치료사’라고 하여서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심리치료를 해 주지만 진정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할 수 있을지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멀리서 차를 몰고 올라와서 김 교수의 강연을 듣다가 어느 날은 자신 안에 있는 비밀, 누구에게도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없었던 비밀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30여 년 전 자기가 12살, 자신의 남동생은 9살 때,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잠자다 말고 꿈인지 생시인지 귀신이 쫓아와서 집 밖으로 뛰쳐나와 한강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부모님이 쫓아와서 구해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던 것입니다. 이에 부모님은 악귀가 있다고 생각하여 큰돈을 들여 굿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물놀이를 갔다가 남동생이 익사사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이 그 자매의 탓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빛이 ‘네가 죽었어야 하는데, 동생이 대신 죽었네.’라고 하는 듯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믿게 된 것입니다. 동생에 대한 미안함, 세상에 대한 미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 등으로 점점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다. 어른이었지만 그 마음 안에는 아직 자라고 있지 못한 12살짜리 아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자매는 계속 울지 않으려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 울음을 참고 있는데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 선생님 안에 있는 12살짜리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한 번 꼭 안아주십시오.”
사실 심리치료사인 그녀도 그렇게 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기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젠 수영장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물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 이젠 극복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있으면 그것이 내 온 몸을 얼음처럼 굳게 만들어서 긴장하게 만들고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치유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김창옥 교수는 팔에 화상이 있어서 여름에도 긴 팔만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신만 딱딱하게 굳어서 그것을 받아 줄 아주 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누구와도 맞지 못하게 그렇게 경직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 사람을 살짝 건드려주면 그 사람은 이내 물처럼 풀려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김 교수는 이것을 우리가 예전에 했던 ‘얼음 땡!’놀이와 비유했습니다.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얼음이 되어버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풀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땡!’ 해주어야 합니다. 얼음이 되어버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손을 대 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되어주신 ‘의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까지 손을 대 주시고, 죄인들의 집에까지 들어가 주십니다. 그렇게 그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셔서 자유롭게 마음과 몸의 병에서 해방시켜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의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참으로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의사인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는 해병대 출신입니다. 김 교수가 대학 학창시절 어느 날 지하철에서 동성애자에게 추행을 당했습니다.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엉덩이를 만지더라는 것입니다. 비록 나중엔 쫓아버리기는 했지만, 처음엔 오히려 자신이 창피해서 한동안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서 하도 분해서 그놈을 잡아 손을 잘라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고 샤워를 세 번씩이나 했지만 그 수치스러운 느낌과 분노는 가시지가 않더랍니다.
어느 날 대학 수업시간에 요즘 사회가 여성의 성추행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에 대한 토론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 학생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학교 오는데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여학생들을 보았어요. 그런 자신감으로 왜 성추행을 당했다고 이야기하지 못합니까?”
김 교수는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정말 부끄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더 이상 이 강의에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수치스러워서 이 교실에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눈을 마주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하철에서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어찌 보면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비역에다 나이도 많이 먹고 게다가 남자인 내가 이런 이야기도 하기 부끄러운데, 여자가 성추행 당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 아까 발표한 남학생, 성추행 당해보지 않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김창옥 학생은 그 자리에 있었던 여학생들과 여교수님에게 영웅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거기 있던 사람 중의 몇은 치유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치유자입니까? 바로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함께 아파해 주시고 우리 고통을 함께 나누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이해해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가장 완전한 의사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그런 따듯한 마음으로 누구의 얼어있는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왜 그러느냐고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세 시간에 한 번씩 필요한 사랑
-양승국신부-
육체적, 정서적, 심리적으로 아주 심약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잘 먹지도 못해 발육도 더뎠습니다. 부모의 불화로 인해 늘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해 늘 외톨이로 지냈습니다.
보다 못한 이웃들이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상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가정의학과 의사선생님은 아이에게 정말 적절한 처방을 내렸는데, 그 처방 내용은 이랬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세 시간마다 한 번씩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모진 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죽을 고생을 다하고 있는 우리들, 여기 저기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처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우리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랑을 먹어야 살아가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3시간에 한 번씩 아니 30분에 한 번씩 그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그 누가 우리를 세 시간에 한번씩, 30분마다 한번씩, 다시 말해서 밥 먹듯이 지속적으로 사랑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 분명합니다.
결국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분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우리 인간의 사랑 사이에 가장 확연한 차이점은 지속성, 항구성, 충실성입니다. 사랑의 쓴맛을 체험한 청춘남녀들이 외칩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 그러나 인간적 사랑 유한합니다.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근본적으로 결핍된 존재인 인간끼리의 사랑이기에 그렇습니다.
그에 비해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관대한 것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충실한 것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공평하며 또 얼마나 영원한 것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들은 건강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잘 나가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의인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씀 그대로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구원 사업의 중심지로 삼으셨던 카파르나움은 국경 부근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마스쿠스에서 지중해나 에집트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카파르나움에는 통행세나 관세를 거두는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식민지 국가 사람들에게 세금징수권을 팔았습니다. 이 권리를 산 사람은 세금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윤도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세금 청부제도는 당시 크게 악용되었습니다. 세금 총청부인인 자기 밑에 직원을 두었고 세금 징수의 재하청을 두었습니다. 결국 이놈이 떼먹고, 또 저놈이 떼먹고...세관원들의 잔고는 쑥쑥 늘어났고 죽어나는 것은 가난한 서민들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하급 세리가 아니라 총청부인에게 얼마의 대가를 치루고 얻어낸 하청업자였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유롭게 직장을 떠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세관원에 대한 이미지는 정말이지 최악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세관원들이 지나가면 대놓고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 부정 탄 자, 살인자로 취급받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관원들을 향해 도둑놈, 인간 중에 가장 천한 인간이라고도 했습니다. “세리가 가까이 오면 집이 공포에 떤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관원 레위를 당신 사도로 선택하십니다. 레위가 준비한 잔치자리에 태연하게 좌정하십니다. 잔뜩 모인 세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십니다. 세리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받았던 충격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투덜댑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서...
-오상선신부-
정신지체 저능아를 가진 자매가 하나 있다. 근데 남편은 그 저능아 아들을 본체만체하며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다. 10여년간 홀로 아들 둘을 키워오면서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겠다며 "보이지 않은 길을 찾아가야 하니 필요할 때마다 힘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간단하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길이 보이지 않지만 눈이 녹으면 길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내하십시오."
이스라엘에 왕정이 도입되는 초기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사무엘서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가문 출신인 사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이스라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로서는 상상조차할 수 없는 세리 레위(혹 마태오)를 제자로 선택하신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느님의 선택, 즉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데 그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사울과 레위의 입장에서 오늘 상황을 묵상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사울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려는 지파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12지파 중에서 가장 힘없는 벤야민 지파에서 왕이 추대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벤야민 지파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었다. 비록 출중한 인물과 힘을 갖춘 힘센 용사였지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애당초 길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다가 찾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실패 체험이었다. 되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종이 암나귀들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을 더 해보자고 한다.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성읍에 선견자가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암나귀들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사울은 참으로 종을 잘 둔 셈이다. 그보다도 종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실행에 옮긴 것이 사울이 성공한 이유이다. 대부분 종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말진대, 사울은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자"며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하여 하느님의 사람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암나귀도 찾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다.
레위는 어떠한가? 레위는 세리였다. 말하자면 로마인들의 압잡이가 되어 동료 유다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매국노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이 일을 하면서도 늘 죄인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이 없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처자식을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다. 자신은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냥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신다.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세리가 길을 찾은 것은 그 말씀에 <예>하며 따랐기 때문이다.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혹은 그 누구를 통해서든 말씀을 건네실 때, <예>하고 그 길을 쫓아가면 된다. 그 말씀은 길을 열어주신다. 상상치도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신다. 기적이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내릴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가 막막하게 길이 보이지 않았던 때를 한번 돌이켜보면, 그 터널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터널을 뚫고 지금 여기 있다. 인내한 결과이다. 그때 분명 하느님께서는 직접 혹은 다른 누구를 통해서 그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든 못하든간에 분명 그분이 길을 열어주셨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은가?
그대, 오늘도 길이 보이지 않는가? 그럼 인내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힘써라. 언제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기에 깨어 들으려 노력하라. 그럼 소복한 눈이 쌓였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길이 햋볕이 나면서 조금씩 녹으면서 그 길이 드러나게 되듯이, 그 길이 보이게 되리라.
그 따사로운 햋볕이 그대에겐 필요하다. 그 빛이 되어 주실 분은 과연 누구신가? 과연 누구를 통해서 빛을 던져 주실 것인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우리는 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항상 건강하고, 가족이 우애와 사랑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며,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도 않고, 항상 건강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도 없다.
때때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과 고통을 겪어야 하고, 배신과 상실의 괴로움에 머리를 싸매고 가슴앓이를 할 때도 종종 있다. 그런데 때때로 극심한 고통과 시련에 시달릴 때, 결코 좌절하거나 삶을 포기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로마 8,25)이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신앙이란 참고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참고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우리에게 항상 즐겁고 기쁜 일들만 일어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알고 느끼기 어렵다.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피조물이란 자리를 잊어버리고, 하 느님을 잃어버리기 쉽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고 만나기 쉽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키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지였다. 어느 날 그가 기르던 암나귀들이 없어져서 아들 사울에게 나귀를 찾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사울은 종 한 사람을 데리고 에브라임, 살리사, 사알림, 베냐민 지역, 그리고 수브 지방에 까지, 산과 들로 여러 지역을 찾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다.
키스가 부자라고는 하지만 암나귀들을 잃어버린 것은 그 시대에 있어서는 재산의 커다란 손실이며, 불안한 조짐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아직도 주변의 블레셋(필리스티아)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나귀를 찾아 여러 곳을 헤맨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기도 하다.
성서에는 간단히 묘사되었지만, 사울은 집에서 걱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러 날 동안 나귀를 찾아 헤맸다. 먹을 음식, 마실 물이 없어 고생할 때도 있었고, 날이 저물어도 밤을 지새울만한 마땅한 장소도 없었으며, 자칫 적을 만나 죽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불안하고 초조했으며,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그들은 예언자 사무엘을 만났다. 그는 사무엘로부터 축성되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상황 속에서 사울을 뽑으신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왜 나만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기보다, 바로 그 때가 하느님을 만나고,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겠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신앙인, 그래서 어려움을 통해서도 자신의 신앙을 더욱 키워나가고, 하느님을 느끼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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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