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명과 거룩]
출애굽기 3:5
소명 받은 사람들은 모든 곳에서 세상의 신을 벗고 거룩을 추구해야 함
하나님의 사역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과 속성에 일관되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선과 악의 분열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시고 모든 것에 있어 선한 자신의 성품에 일치되게 일하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언제나 거룩하며 언제나 거룩한 수단을 통해 일하십니다. 소명자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고, 그분의 긴박하고 애절한 사랑의 대상들의 필요를 위해 부름 받을 때, 소명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할 때, 그 일들이 거룩함 안에서 추구되길 원하십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참된 소명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교훈하였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본문을 보니 모세가 하나님의 현현 앞에 다가설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제어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에 거룩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며, 거룩에 직면하여 사는 방식은 신을 벗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할 때 그분께 관계된 모든 것이 거룩해 집니다. 소명자에게 필요한 정신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상입니다. Coram Deo! 우리는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소명을 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소명은 거룩으로 장식되어야 합니다. 재능이 많고 힘과 총명이 있으면, 어떤 일들에 있어 성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들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진정 그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일과 조화되지 않는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내면이 오염된 채 자아를 방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외식자로 규정하실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소명자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두려움과 사모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사역과 임무들이 거룩한 생활과 동기 속에서 수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활과 사역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나의 말들 속에 깃들여진 습관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행동들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하고 이러 저러한 마음을 먹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명자는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되고,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을 의식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성도요 인간 말입니다. 먼저 인간이 되지 못한다면 목사, 교수, 선교사, 장로, 집사 이러한 직함과 분주한 일들이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되기 전에 무엇을 하기 전에 성령의 지배를 받고 주님을 통해 통제받고 인도받는 성도가 되고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안에 참된 성도,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평상 시 별 볼 일 없던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별 볼 일 없는 장소에 임재하실 때 그 땅은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취하시면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장소와 시간에 함께 하실 때 그 장소와 시간은 거룩한 시공간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는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삶은 거룩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불결이 아닌 거룩에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명령하십니다. 소명자는 자신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지 않는 행동은 불경한 행위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은 ‘나알(l['n")’이라고 하여 밑바닥만 보호하는 샌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거룩한 장소나 상(喪) 중에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신은 고대 근동 환경에서 부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신은 언제나 먼지로 오염되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의미하는 장소와 시간에 히브리인들은 신을 벗었던 것입니다. 신은 더러움과 불결의 상징입니다. 또한 신을 벗는다는 것은 겸손과 겸허의 표현이었습니다. 노예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노예로 여기는 행위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한 것은 가시떨기 가운데 현현하신 장소가 하나님으로 인해 성화된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악 됨을 깨닫고 자신의 불결과 더러운 죄들을 하나님 앞에 벗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선 자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합니다. 소명자는 세상에 속한 재능이나 자신의 능력으로 일해선 안 되며, 오히려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 자신을 의지해 일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박된 모든 것을 끊어내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소명자는 그분을 위해, 그분의 뜻을 위해,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도 부름 받을 때, 성전에서 하나님의 옷자락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자신의 과업을 이루는 스랍을 보았습니다. 소명자에게 나타난 처음 반응은 하나님의 거룩을 깨닫고 그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명자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사는 생활을 시작하고 그것에 대하여 자라야 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우리가 소명으로 살아가려면, 죄악의 신을 벗고, 주께 용서를 구하며 삶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의지하던 옛 생활의 방식을 벗고 주님과 그의 능력을 의지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서 신던 죄악의 신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소명을 생각할 때, 그 본질적인 의미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름 받은 사실을 상기하며 생활합시다. 소명의 중심과 목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긴박하고 애절한 교회와 이웃들의 필요를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셋째, 부름 받은 자는 무엇이 되고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의 성품에 조화된 생활을 하는 자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지, 진정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주어진 순간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므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들이 성취되는 복이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출 3:6-12)
사람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을 만났을 때 인내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는 한 어떤 시련도 통과할 수 있으며, 희망이 없으면 삶의 열정도 없고, 삶의 목표도 없고, 기쁨도 잊어버립니다.
옥스퍼드 사전에 의하면 “희망”이란 “신뢰와 확신의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을 신앙과 연결되어 표현한다면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주시고 그 언약을 성취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희망은 신앙과 확신 가운데서 성장해가는 삶의 열매입니다. 인내와 갈등 가운데도 품은 기대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희망을 키우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언약을 받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환경이나 현실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의 소명”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여 왜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하나님의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하노라”(출3;7~8)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통한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극하자 애굽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아지고 혹여나 다른 나라가 침범하여 전쟁이 일어날 때 대적과 연합하여 자신을 대적하고,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날까 해서 무거운 빔을 지우고 노예의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출1;8~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서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단지 육체적인 어려움이나 고통으로 인한 부르짖음만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왕의 폭정, 감독자들의 폭행, 폭언, 학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기 위해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이제 자신들의 어려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멸망,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생명을 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신뢰하고 살았으나 삶의 환경, 자신의 처한 현실의 문제를 생각해볼 때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을 보면서 근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삶의 문제는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으나 해결한 방법이 없어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이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근심된 일을 아시고 이제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의 고통에서 구원하여 출애굽시킴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겠다.”(출3;8)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미 80년전에 모세를 애굽의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시켜 애굽에서의 종교, 문화, 정치, 사회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40세에 자신의 민족을 생각할 때에 자신의 힘을 통해서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살인죄를 짓고 그는 미디안의 광야로 피신하여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양을 치며 광야의 삶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출3;9)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면 자나칠 정도로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왕자와 공주로 키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약한 자로 키운다면 자신의 앞에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치면 불명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꿈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그리고 우리의 만나는 현실은 사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운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나약한 아이로 키울 것인가? 아니면 강한 아이로 키울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바른 선택을 하였다면 잘 훈련시켜서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를 의지하여 자신의 선택을 못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이 땅에서 존귀한 자로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6절에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실 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보여주시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뵈옵기를 두려워했습니다.(출3;6) 모세가 하나님을 뵈옵기를 두려워 한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두려웠던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은혜를 깨달은 다음에는 버룻없이 굴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과 뜻을 다해서 효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늦어져서 효도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나면 그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의 죄로 인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될 때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고, 나를 구속해 주신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높이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인지, 아니면 형식적인 예배자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모습이 진실하지 못할 때 자신의 당당함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불평과 미움만이 자리하고 있어서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으로 예배하는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시고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7절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감독자들로 말미암아 고통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근심을 알았다”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할 때 100%공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처한 현실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럴 것이다” 하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를 때 꼭 가르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잘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갖고 상대방을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성도들의 문제를 100%공감하지 못합니다. 단지 보여 지는 현상을 보고서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고,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실상은 사람들에게 말하면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속에 할 말이 많은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내 사정을 속속히 고백하는 성도가 됩시다.
지금 평안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힘든 부분이 있다면 주위의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불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이 싹트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자신에게 왔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안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 일수록 감사하며 살면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근심된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심된 삶에서 구원하여 축복의 삶으로 바꿔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이 힘들고 내가 만난 현실이 어려울 때 일수록, 삶이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보고 계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이나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문제가 있을 때 나의 결정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습니다. 내 지식이나 경험이나 인맥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혹여나 자신의 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8절“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겠다.”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현실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을 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온 땅에 전파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한 계획을 갖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나의 선행으로 성취되지 못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선행을 하면 나를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사람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선행이 나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법과 질서를 잘 지킴으로 양심에 꺼리는 일이 없다고 해서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가 행하는 모습을 보면 무엇이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은 잘못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부모는 그러한 모습까지도 때로는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왜입니까? 부모는 사랑의 콩깍지가 그 눈에 씌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버릇없다고 말합니다. 예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 부모가 누구냐고 말하면서 부모까지 욕을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판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여 말함으로 그 상황과 상관이 없는 문제까지 연계시켜 말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삶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나를 사랑의 자녀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삶을 살 때 축복해 주셔서 하나님은 나를 더욱 귀하게 보시고 나의 삶을 통해서 예수의 향기를 드러내게 하십니다.
오늘 내 삶을 통해서 예수의 향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주인공이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사명을 모세에게 맡기셨습니다.
10절“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말합니다.
11절“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족속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12절“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희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내셔서 일하실 때 내 능력이나 권세나 내가 가진 어떤 조건을 보고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좀 더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귀한 사명을 맡기는 이유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을 하는 내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증거하고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약함을 고백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임마누엘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나의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을 통해서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갑시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