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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영국 왕실과 유대인
영국 왕실은 유대인들과 길고 때로는 격동적인 역사를 함께 겪어왔습니다.
다음은 영국 왕실과 유대인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드라마 《더 크라운》과 유대인 간의 연관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일생을 그린 전기 드라마. 2016년 11월 4일 넷플릭스에서 방영을 시작한 총 6편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2023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총 10부작으로 마지막 시즌을 공개하였습니다.
영국의 유대인들은 한때 왕실의 ‘재산’이었습니다
영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66년 프랑스에서 영국을 침공한 윌리엄 1세, 즉 정복왕 윌리엄의 통치 시기에 등장합니다.
새로운 왕국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윌리엄 왕은 프랑스 유대인들을 본국에서 불러와 자신의 새로운 영토에 정착시켰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독교인들의 대금업 참여를 금지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결국 많은 유럽 왕실의 자금 조달을 맡게 되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봉건 제도 밖에서 ‘왕실의 보호 대상’—즉 왕실 소유의 재산—으로 살 수 있도록 허용받았습니다. 지역 폭도들이 유대인을 공격할 때면, 전국 각지의 왕실 성을 지키던 왕실 대표자들이 종종 문을 열어 유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곤 했습니다.
나중에 존 왕 치하에서 왕실은 모든 유대인의 상속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사업가가 사망할 때마다 그의 전 재산은 미망인과 자녀가 아닌 왕실 금고로 넘어갔습니다.
사자심왕 리처드의 대관식은 유대인 학살로 얼룩졌습니다.
1189년 리처드 1세(나중에 십자군 원정에서의 공로로 ‘사자심(Lionhearted)왕’으로 불리게 됨)가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런던으로 대규모 사절단이 모여들었습니다. 방문한 유대인들은 새 왕을 위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군중이 군주를 한 번이라도 보려고 밀려드는 와중에,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 모임 전체에 퍼졌습니다. (사실 그런 명령은 내려진 바 없었습니다.)
군중은 그들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을 향해 돌변하여, 왕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대관식에 참석했던 윌리엄 오브 뉴버그의 말에 따르면,
“소동이 일어났다. 무법적이고 격분한 군중은 왕이 왕의 권위를 빌려 이를 명령하고 지지한다고 생각하며… 궁전 문 앞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주먹으로 무자비하게 때렸으나, 곧 더욱 격분하여 막대기와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도망쳤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구타를 당해 사망했으며, 다른 이들은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 (리처드 허스크로프트의 『추방: 영국의 유대인 해결책』(Expulsion: England’s Jewish Solution)에서 인용. 템퍼스(Tempus): 2006)
이후 잉글랜드 전역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는데, 기독교 폭도들이 린, 노리치, 스탬포드, 링컨, 콜체스터, 테트포드, 오스프링,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요크 등의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공격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 잉글랜드 내 유대인 추방
잉글랜드에서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에드워드 1세는 왕실 소속 유대인들이 잉글랜드에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을 개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275년, 그는 유대인들 간의 대부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의 모든 유대인이 십계명을 상징하는 두 개의 돌판을 묘사한 노란색 표지를 겉옷에 달아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불만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고, 결국 에드워드 왕은 의회에서 잉글랜드의 봉건 영주들이 제시한 최후통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290년이 되자 영국 왕실은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에드워드 왕은 10만 파운드의 일회성 세금을 요구했습니다(이는 엄청난 액수로, 영국 중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세금이었다).
의회는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이에 동의했습니다. 바로 에드워드 왕이 유대인들의 국내 거주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이에 동의했고, 영국은 유대인의 거주나 방문을 금지한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떠나야 할 기한은 1290년 11월 1일로 정해졌습니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영국을 떠나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많은 경우, 비양심적인 선장들이 유대인 승객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돈과 재산을 가로챘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수백 년 동안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궁정의 비밀스러운 유대인
1558년부터 1603년까지 통치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최고의 의사를 자신의 주치의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는 런던의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에서 근무하며 자상하고 유능한 의사로서 널리 명성을 떨치던 포르투갈 출신의 과학자 로데리고 로페즈를 고용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페즈 박사는 여왕을 돌보며 그녀의 신뢰를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왕의 일부 고문들의 질투와 증오를 사게 되었습니다. 로페즈 박사의 옛 환자 중 한 명인 에식스 백작은 그가 여왕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시기했고, 이 외국 출신 의사를 파멸시키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혔습니다.
백작이 방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로페즈 박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척했지만, 실제로는 유대교를 신봉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로페즈는 한때 포르투갈의 요한 3세 왕의 주치의였으나, 사형 위협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했습니다. 로페즈 가문은 비밀리에 유대교 생활 방식을 유지했습니다. 로데리고 로페즈는 포르투갈에서 비밀리에 유대교를 믿는다는 혐의를 받고 1559년 영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로페즈 박사의 유대인 신분을 밝혀낸 에식스 백작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독살하려 모의했다는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이러한 근거 없는 주장을 거부하던 로페즈 박사에 대해, 결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자신의 주치의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로페즈 박사는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594년 조롱하는 군중 앞에서 공개 처형되었습니다.
로페즈 박사의 재판과 처형은 로버트 말로우의 반유대주의 희곡 《몰타의 유대인》에 영감을 주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도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찰스 1세를 암살한 인물은 유대인들을 다시 영국으로 불러들였다고 전해집니다
영국 땅에서 벌어진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1640년대에 찰스 1세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올리버 크롬웰을 지지하는 “의회파”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크롬웰은 국왕을 반역죄로 고발했고, 찰스 1세는 결국 1649년에 처형되었습니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공화국 연방의 “수호자(Lord Protector)”가 되었으며, 이후 10년 동안 영국은 군주 없이 공화국 체제로 통치되었습니다. 엄격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던 크롬웰은 잔혹한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에드워드 1세의 칙령을 뒤집고 유대인들이 다시 영국에 정착하도록 초청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소 더 복잡합니다. 네덜란드 유대인 지도자 메나세 벤 이스라엘은 1655년 크롬웰에게 유대인들의 영국 재입국을 허용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또한 몇 년 후, 런던의 비밀 유대인 공동체는 크롬웰에게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크롬웰은 유대인들의 영국 정착을 공개적으로 승인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점점 더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유대인 공동체들을 탄압하지는 않았습니다. 1650년대 후반이 되자, 네덜란드에서 이주해 온 몇몇 가족을 포함한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다시 영국을 고향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크롬웰은 1658년에 사망했고, 1660년 유럽 망명지에서 돌아온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영국은 다시 군주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한 최초의 군주는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 군주(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음)인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 위대한 유대인 자선가 모쉐 몬테피오레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전통을 깨고 유대인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한 최초의 영국 군주가 되었습니다.
일부 참모들이 유대인에게 그러한 영예를 주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여왕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을 가장 먼저 행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라고 말했습니다. (줄리아 베어드의 『빅토리아 여왕: 제국을 통치한 여인의 친밀한 전기』(Victoria The Queen: An Intimate Biography of the Woman Who Ruled an Empire)에서 인용. 랜덤하우스: 2016)
필립 왕자는 존경하는 유대인 선생님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더 크라운』 시즌 5에서 조나단 프라이스가 연기한 고 에든버러 공작은 1921년 그리스 왕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듬해 왕위에서 물러났고, 필립은 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12살 때 마침내 정착할 곳을 찾았고, 독일의 혁신적인 기숙학교인 ‘슐레 슐로스(Schule Schloss)’로 보내졌습니다. 교장은 쿠르트 한(Kurt Hahn)이라는 기이한 유대인 교육자로, 소년들에게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장려했으며 “너에게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치즘의 부상으로 한 교장은 끔찍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던 한은 체포되었으나, 국외로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로 이주하여, 슐레 슐로스와 비슷한 교육 이념을 가진 새로운 학교인 고든스타운을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는 곧 귀족과 왕족들이 다니는 인기 있는 기숙학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필립 왕자는 고든스타운에 다니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배운 교훈은 그의 남은 생애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중에 한 교장은 필립 왕자가 '에든버러 공작상(Duke of Edinburgh’s Award)' 프로그램을 설립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 프로그램은 한 교장이 중시하던 스포츠맨십과 사회 봉사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을 숨겨준 왕실 인물
필립 왕자가 스코틀랜드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의 부모는 이혼했습니다. 필립 왕자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는 아테네에 있는 가족 아파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네 딸 모두 고위 나치 당원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스 공주는 목숨을 걸고 나치에 저항했습니다. 그녀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친한 친구인 코헨 가족을 자신의 아파트 건물에 숨겨주었습니다. 한 번은 앨리스 공주가 게슈타포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코헨 가족을 밀고하지 않았고, 그들은 전쟁을 살아남았습니다.
1994년, 앨리스 공주는 예루살렘의 야드 바솀으로부터 ‘민족의 의인’으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한 의로운 비유대인들에게 수여되는 영예입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찰스 3세 국왕은 유대식 할례를 받았습니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도미닉 웨스트가 연기하는 찰스 3세 국왕이 1948년에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갓 태어난 아들의 할례를 맡길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런던에서 가장 저명한 유대인 모헬(의식적 할례 집행자)인 랍비 제이콥 스노우맨이었습니다.
영국 왕실 가족들은 1700년대 조지 1세 국왕이 귀족들이 유대인 할례사를 고용하는 전통을 영국에 들여온 이래로 자식들의 할례를 위해 유대인 모헬을 고용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 이르러, 다이애나 비는 언젠가 왕이 될, 아들 윌리엄 왕자가 이 전통을 이어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유대인 디자이너들이 다이애나 비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고 다이애나 비의 가장 상징적인 스타일 순간 중 일부는 그녀가 애용했던 유대인 의상 디자이너들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드라마 《더 크라운》의 엘리자베스 데비키는 고 다이애나 비의 눈부신 모습을 잘 재현해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유망한 유대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유대계 디자이너 엘리자베스 에마누엘은 다이애나가 1981년 결혼식에서 입었던 상징적인 드레스를 제작했습니다. 에마누엘은 또한 그해 말 다이애나가 첫 왕실 공식 행사에서 입었던 검은색 태피터 드레스도 디자인했습니다. 다이애나 공주는 나중에 당시 남편이자 현 찰스 3세 국왕이 왕실 행사에 애도의 색인 검은색을 입겠다는 그녀의 획기적인 결정에 경악했다고 회상했습니다.
다이애나 공주가 특히 선호했던 또 다른 영국계 유대인 디자이너 데이비드 사순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제가 처음 그녀를 위해 드레스를 만들었을 때, 그녀는 19살이었고 예쁘고 로맨틱한 드레스를 입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의 취향은 변했고, 그녀는 더욱 화려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다이애나 비의 유대인 변호사는 반유대주의에 직면했고, 이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다이애나 비의 결혼 생활이 무너지자, 그녀는 한때 런던의 한 헬스장에서 자신의 동의 없이 몰래 촬영된 사건에서 법적 도움을 주었던 유대인 변호사 앤서니 줄리어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줄리어스는 나중에 자신의 긴 법조 경력 중 반유대주의적 공격을 경험한 유일한 순간이 바로 다이애나 비를 변호했을 때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여러 신문과 잡지가 저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대부분 진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줄리어스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저는 ‘기성 체제’가 아닌 ‘외부인’이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이상한 편지들도 받기 시작했는데… 그중 일부는 반유대주의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는 줄리어스의 청렴성을 의심하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앤서니 ‘지니어스’ 줄리어스(의) 배경은 그의 상대방이 속한 상류층 세계와는 더할 나위 없이 거리가 멀다. 그는 유대인 지식인이자 노동당 지지자로, 공정한 경쟁에 대한 고려 때문에 자제심을 발휘할 가능성이 적다. 그를 가르쳤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교수는 ‘내가 왕실 일원이라면 매우 걱정될 것’이라며, ‘그는 왕실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아낼 것이다.’”
줄리어스는 자신에게 쏟아진 반유대적 정서에 큰 충격을 받아, 나중에 반유대주의에 관한 책 『디아스포라의 시련: 영국 반유대주의의 역사』(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2010)를 집필했는데, 위 인용문은 이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영국 왕실의 유대인 작곡가, 한스 짐머
덧붙여 엘리자베스 2세의 시점을 중심으로 영국과 영연방, 더 나아가서는 서방 세계의 현대사를 총 6개의 시즌으로 제작 된 드라마 <더 크라운> 각 에피소드 시작을 장식하는 감동적인 주제가는 저명한 독일 작곡가 한스 짐머가 작곡했습니다. <라이온 킹>, <글래디에이터>, <캐리비안의 해적>, <이집트의 왕자>, <다크 나이트> 등 100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작곡한 짐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부모로부터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언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며 자랐습니다.
1999년, 짐머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데이즈(The Last Days)>에 대한 작업에 대해 강연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홀로코스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유대인이라 제 조국과 꽤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꺼내자마자” 모든 기자와 사진기자들이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그는 회상했습니다.
“저는 심각한 불안 발작을 겪기 시작했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어요. 기자회견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랐죠.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제가 정말 끔찍한 짓을 했어요. 그들에게 말해버렸어요. 우리 가족의 정체를 모두에게 알리고 말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위험에 빠뜨린 것 같았습니다. 이건 우리가 절대 말해서는 안 될 깊고 어두운 비밀이었으니까요. 전화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고, 그러더니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어머니가 제게 그런 말을 해준 건 그때가 유일했습니다.
그 이후로, 짐머 가족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By Dr. Yvette Alt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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