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數)의 개념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진화해 왔습니다. 수렵활동을 하던 초기 인류에게 있어서 수는 주변 사물의 관찰 속에서 ‘하나’, ‘둘’ 또는 ‘많다’라는 개념만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유목 생활 중심의 부족 사회로 발전하면서 자신이 소유한 가축들의 수를 세기 위해 더 큰 수가 필요하게 되었죠. 그리고 농경사회가 출현하고 사유 재산이 늘어나면서 좀 더 크고 많은 것을 나타내는 수들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명의 출현과 활발한 교류는 상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단순히 개수나 양을 측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수 뿐 아니라 계산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수의 표현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구들에 의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수가 탄생하게 된 것이죠. 1960년 벨기에의 지질학자 겸 탐험가인 장 드 하인젤린 드 브로쿠르(Jean de Heinzelin de Braucourt, 1920~1998)는 오늘날의 콩고 민주 공화국 지역에서 표식이 새겨진 원숭이 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줄 표시가 여러 개 그어진 이상고(Ishango) 뼈는 처음에는 석기 시대 아프리카 인들이 쓰던 단순힌 기록 막대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표식들은 단순히 물건을 세는 것을 넘어서는 수학적 능력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사진출처 ? EBS MATH>
이 뼈는 나일강 상류 근방 이상고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은 화산 분출로 매몰되기 전에는 구석기 전기 인류가 거대한 인구를 이루어 살던 서식지였습니다.
눈금 4개 다음에는 2배인 눈금 8개가 새겨져 있고, 눈금 10개 다음에는 절반인 눈금 5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어쩌면 단순하지만 곱셈이나 나눗셈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층 더 놀라운 것은 오로지 홀수(9, 11, 13, 17, 19, 21)만 적힌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10과 20 사이의 소수들이 적힌 것도 있는데, 각 열의 수들을 합치면 12의 배수인 60이나 48이 됩니다.
<사진출처 ? EBS MATH>
이 눈금을 새긴 당시의 사람은 소수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미국의 고고학자 알렉산더 마샥은 이상고 뼈가 달의 위상을 기록한 6개월간의 태음력을 표기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유물은 수학이 시간 기록을 위해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 뼈가 여성의 월경주기를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습니다. 헝가리 고고학자 라슬로 베르테스는 마샥의 주장에 영감을 받아, 보드로그케레스투르(Bodrogkeresztur) 물체로 알려진 또 다른 고대 유물을 태음력 그리고 아마도 자궁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가리비 껍데기 모양의 석회암 조각으로 만들어진 보드로그케레스투르 물체는 2만 7000년 정도 된 이상고 뼈보다 훨씬 오래전의 것으로, 지름이 56mm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테두리에 새긴 눈금들의 크기가 너무 작아 달력으로 사용하기에는 비실용적이라 여겨 베르테스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상고 뼈 이전의 기록 막대들도 드물지 않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위스의 레봄보(Lebombo) 뼈는 3만 7000년 된 원숭이 종아리뼈로29개의 표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57개의 표식이 새겨진 3만 2000년 된 늑대 정강이뼈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상고 뼈가 그처럼 단순히 기록을 남기기 위한 도구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록들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상징 수학(Symbolic Mathematics)을 향해 내디딘 인류의 첫 걸음을 표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이상고 뼈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고, 비슷한 뼈들이 더 발견되기까지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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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법은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인류가 언제부터 기호와 상징으로서의 수를 사용하여 왔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셈법의 기원이 역사 이전의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은 틀림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셈법은 1937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베스트니츠 마을에서 발견된 약 2만~3만 5천년 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늑대 뼈에 새겨진 55개의 금(선)'이다.
이 뼈에 새겨진 금 중에서 30개가 5개씩 묶여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미 일정한 진법이 쓰인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체코에서 발견된 늑대뼈로 된 셈막대
그 이외에도 흥미를 끄는 유물은 우간다와 콩고 사이의 에드워즈 호숫가에서 1962년 하인젤린(Jean de Heinzelin)에 의해 발견된 '이샹고의 뼈'가 그것이다. 학자들 간 이견이 있긴 하지만 대략 기원전 2만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뼈는 단순한 셈 막대 이상의 '무엇'이었던 것 같다. 현미경으로 관찰해 본 결과, 달의 주기 변화와 관련된 듯한 표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샹고 뼈(Ishango Bone)사진: Alexander Marschak, 1971
석기 시대 사람들에게는 보름달이 뜨는 시기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여기에는 종교적인 이유와 생활상의 실용적인 이유가 함께 내포돼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수에 대한 기록은 남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발굴된 '비비의 종아리뼈'이다.
4만년 전의 줄새김 뼈인 ‘르봄보뼈’
이 뼈에는 기원전 3만 5천년경에 누군가 그어놓은 선명한 금이 29개남아 있다.
이 금(선)은 오늘날까지도 나미비아에서 시간 흐름을 기록하는데 사용하는 '날짜 막대(calendar stick)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도 '율리시즈에 의해 장님이 된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는 자신의 양을 관리하기 위하여 동굴 입구에서 양들이 나갈 때마다 작은 돌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조약돌을 하나씩 내려놓았다'는 이야기에서 셈법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폴리페모스는 이렇게 하여 장님이 되어서도 양들을 잘 관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방법은 추상적 수사(數司)의 발견 이전에 '일대일 대응'이라는 셈의 기본을 이용한 좋은 예이다.
이런 셈법들이 기록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2만~3만 5천년 전이라면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이 무렵은 수렵 및 채취 경제를 중심으로 한 원시 공동체 사회이다. 당시 셈을 한다는 것은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절실한 것이었다. 채취한 동물과 음식물을 배분한다거나 가축이나 짐승 떼의 크기를 알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쓰인 도구들이 위에서 본 뼈에 새긴 셈 막대나 조약돌 등이다. 이것이 원시 공동 사회에서 셈하기를 시작한 동기였을 것으로 추정된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셈법의 일대일 대응에 의한 방법이 양의 마리수를 관리하거나 기타의 셈을 하는 데는 적절하였지만, 오늘날의 10진법의 수의 개념으로 정착 하는 데는 더욱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다.
여러 사물들 속에 수라는 추상적 공통성을 찾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즉, '말 2 마리', '사과 두개', '쌀 두 가마니', '두개의 별', '두 번의 전쟁'과 같이 여러 물건 또는 사건들 사이에 공통되는 수학적 속성이 '2'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유하는 동물'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추상화의 능력인 것이다.
이를 두고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치열하게 살다간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평화 운동가인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인류가 닭 두 마리와 이틀의 2를 같은 것으로 아는데 수 천년이 걸렸다"는 말로 표현했다.
일반인들은 1, 2, 3, 4… 따의의 수(양의 정수 또는 자연수라 이름한다)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며, 음수나 무리수, 허수는 상상의 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수학적 체계 안에서만 존재하도록 약속된 고도의 추상적 기호일 뿐이다. 이런 일정한 체계 속의 기호들이 신비롭게도 우리의 삶과 기술과 과학의 영역에 널리 이용되고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0'이라는 숫자는, 1, 2, 3, 4, 5… 와 같이 양의 정수(다른 말로 자연수)로 볼 때 위의 사물과 일대일 대응이라는 측면으로는 단순히 없다(無)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수의 영역을 확장하여 -1, -2, -3, -4, -5… 와 같은 음의 정수(음수)에서의 '0'은 양수와 음수의 경계점이 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섭씨온도(Celsius scale) '0'도는 화씨온도(Fahrenheit scale)를 32도라고 할 때, '0'은 온도의 상대적 비교를 위해 설정된 값이다.
여기에서 '0'이라는 값은 고정된 방식으로 해석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수라는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추상적 기호일 뿐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양의 정수의 수학적 연산 체계 내에서 곱한다는 것은 그 곱의 수만큼 더한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로 컴퓨터에서 곱셈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 6*5=(6+6+6+6+6)=30 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음의 정수와 음의 정수와의 곱은 양의 정수가 된다.
예컨대 (-)6*(-)5=(+)30가 된다. 이런 경우 양의 수를 '소유하고 있는 재산' 음의 정수를 '빚 혹은 빌린 것'으로 대응하면 빚에 빚을 곱하면 재산이 된다는 허무한 역설이 되는 것이다.
위의 식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빚과 빚을 곱하면 재산이 된다는 현실적 논리가 성립한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합법적으로 돈 떼어먹는 방법과 빌린 돈을 갚지 마라'를 쓴 저자가 자신의 책 내용대로 남의 돈을 떼어먹다 검찰에 붙잡혔다.
이 책의 저자는 아마 돈을 많이 빌리면 그것이 자신의 재산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음수와 음수의 곱이 양수라는 규칙은 현실의 문제와는 무관한 수학적 약속 또는 규칙으로 만 존재하는 것이다.
수에 대한 인류의 연구는 '수는 어떤 체계내의 규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수의 몇 가지 특성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수는 어떤 사물 혹은 자연의 특별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 수라는 기호는 현실의 여러 셈의 영역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 이 수라는 기호는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 등의 연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로 수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를 통한 관념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수는 그 연산이라는 조작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과 경험세계를 설명하고 변화시키기도 과학과 문명을 창조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상부구조인 문화 제도 등은 하부구조로서의 사회적 생산성에 의해 제약된다고 한다.
나아가 그 생산성은 그 사회의 기술 발전에 의해 촉발되고 그 기술의 이면에는 수학적 응용의 영역으로서 과학발전이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선을 보내 인간의 정복사의 역사를 다시 쓰기도 하고 핵 폭탄을 먼저 개발하여 세계 지배화 전략을 공고화하기도 하고 인터넷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사회의 의사결정 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의 전통적 지배구조를 깨부수고 변혁시킬 역량으로서의 대안언론이 새로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수천년 전 작은 돌 하나에 물건 하나씩 대응시켜서 개수를 셈하는 방법>이란 슈사 지역에서 출토된 칼쿨리 (calculi) : 칼쿨리는 가축의 수를 세기 위해 썼던 돌멩이다. 칼쿨리를 담은 항아리 겉에는 안의 돌의 개수와 같은 구멍이 있다.
수와 숫자의 구별
· 수를 문자(숫자)로 표시 - 일대일 대응을 벗어남· 문제 ) 2529에서 가장 작은 수와 가장 작은 숫자· 가장 작은 수(9)와 숫자 (크기가 모두 같다)· 수 : 많고 적음을 비교하거나 잴 수 있는 크기의 정도인 양, 범위, 순서를 나타내는 것· 20은 수, 2 숫자 , 0은 숫자, 9와 2에서 2가 큰 숫자· 숫자 : 수를 표시하기 위한 기호 또는 문자
<고대 이집트의 숫자>, <고대 문명의 수 표기 체계>
2. 아메스 파피루스
<린드(영국수집가) 파피루스 또는 아메스(작성자 서기관) 파피루스>
· BC 1650년 경 이집트 람세스 2세 무덤 출처· 파피루스 길이 5.5m 폭 0.33m, 파피루스 (paper 어원) 갈대·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항상 천으로 덮어 빛으로부터 보호· 내용 : 분수를 나열한 표와 도형 넓이, 피라미드 부피 구하는 법 등 87문항 수학문제 → 견습생 교육을 위한 기출문제집 필사
사람은 모두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으므로 초기에 2, 3진법을 사용하다가 10진법으로 점차 바뀌었다 손가락을 사용해서 수를 표기했다는 이론은 로마 숫자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Ⅴ는 한 손을 완전히 다 편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고, Ⅹ는 두 손을 펴서 서로 위 아래로 마주 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로마는 이와 같이 5진법을 사용하였고, 메소포타미아는 60진법을 사용하였다.
원시인들은 신체의 적절한 부분을 짚어나감으로써, 몸의 군론을 전개하였다.
뉴기니 파퓨아족은 이러한 방법으로 수를 나타내었다.
숫자가 없던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손가락을 펴 보이거나 양의 다리만큼(4)이라는 말로 간단한 수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다가 신체의 각 부분을 수 대신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뉴기니아 파푸스 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방법으로 수를 세었다고 합니다. 군론으로 수를 셈한 겁니다.
그러니까 9라는 수를 나타낼 때에는 오른쪽 귀를 가리키면 되었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사람의 몸을 이용하는 데서 한 걸을 나아가 노끈의 매듭이나 돌멩이, 진흙 등의 물건을 이용하여 더욱 큰 수를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답니다.
오래 전, 남아메리카의 잉카 족은 끈으로 다양하게 매듭을 지어 여러 가지 수를 표혔하였습니다.
기원전 3500년 경, 페르시아 만 근처의 수메르 인과 엘람 인들은 각각의 수를 나타내는 '칼쿨리'라는 여러 가지 모양의 돌을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수의 크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최초의 숫자는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라로니아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진흙으로 만든 판자 위에 쐐기 모양의 문자를 새겨서 보통 '쐐기 문자' 또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그 후, 고대 문명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제각기 다음과 같은 숫자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기원전 3500년경 페르시아 만 근처의 수메르 인과 엘람 인들의 각각의 수를 나타내는 '칼쿨리'라는 여러 가지 모양의 돌을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수의 크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최초의 숫자는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진흙으로 만든 판자 위에 쐐기 모양의 문자를 새겨서 보통 '쐐기 문자' 또는 '설형 문자'라고 부릅니다. 그 후, 고대 문명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제각기 다음과 같은 숫자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군론과 바코드의 비밀
슈퍼마켓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나 서점의 책을 들여다보면 다음 그림과 같은 표식을 쉽게 보게 된다.
가늘고 굵은 검은 막대와 흰 막대들의 그래프가 있고 그 밑에 숫자들이 쓰여져 있다. 이것을 바코드라 부른다.
이 바코드의 발명은 일의 편리성은 물론 삶의 한 단계 UPGRADE 시킨 결과로 볼 수 있다.
막대의 굵기에 따라 문자나 숫자를 나타내는 특정한 배열이 마치 상품의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한다.
바코드의 판독 원리는 바코드의 검은 막대와 흰 막대의 반사율 차이를 스캐너가 전기 신호로 바꾼다.
전기 신호의 폭을 디지털 1과 0으로 나타내어 그 조합에 해당되는 숫자를 구별한다.
바코드에 나타난 수자는 보통 13자리 (30개의 줄무늬)로 되어 있다. 이것은 표준형이다.
8가지 숫자 (22개의 줄무늬)로 단 단축형도 있다. 앞의 숫자 3자리는 국가 번호, 그 다음 4자리는 제조업체 번호, 다음 5자리는 각 회사의 상품 번호, 마지막 한자리는 입력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는 검사 숫자를 나타낸다.
우리나라는 지난 88년 국제 상품 코드 관리 기관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880을 국가 번호로 취득하였다.
바코드에는 상품 코드 번호만 들어있지 가격, 크기, 무게 등의 정보가 들어 있지는 않다.
그러면 계산대에서 찍히는 가격은 어떻게 된 걸까? 붉은 색의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는 스캐너로 바코드를 읽으면 상품의 가격이 즉시 입력되도록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코드를 이용하면 팔린 물건의 종류와 수량들을 컴퓨터로 바르고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 키보드로 숫자를 입력하면서 걸리는 시간도 줄이고 오타도 방지할 수 있다.
2만년전 한반도에서 닮은비의 무리수의 사용 흔적
현대문명이 서양인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관계로...
아쉽게도... 수학사에 관해서도 서양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숫자의 발생이 언제인가하는 문제에서도
서양인들의 관점으로만 기술되어 있습니다.
처음 숫자가 사용된 흔적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과 펀잡 북부 지역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이상고에서 발견된 뼈는 기원전 2만년경의 것으로 보이는데, 수학 내용으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이 뼈에는 수를 표현한 일련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아프리카의 이상고에서 발견된 뼈는 기원전 2만년경의 것으로 보이는데, 수학 내용으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이 뼈에는 수를 표현한 일련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는 3세기경 인도의 힌두 수학자가 만들어냈다고 믿고 있다
지금의 이란 지역에 살던 유목민족 사카는 1세기부터 표에 있는 사카 숫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200년경부터는 인도의 마하라스트라의 동굴에서 발견된 것과 같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에 점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10세기부터는 지금의 숫자와 비슷한 것이 사용되었다.
고바르 숫자2) 는 인도의 수학자들에게서 배운 아랍의 수학자들에 의해 스페인으로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닮은비 상수의 시조
그런데 우리선조들은 이미 2만년전부터
숫자차원을 넘어서 닮은비의 무리수√(2를 상수로 하는 우주관의 개념을 가지고 우주자연을 계산한 것입니다.
아래의 돌멩이는 충정도의 하진리에서 2014년인가에 다량의 구석기 석기유물과함께 발굴된 것입니다.
하진리 천문역학의 모형인 돌멩이 인셈입니다.
수양개 6지구 유적(2014년 발굴면적: 830㎡)에서 모두 3개의 후기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석기는 몸돌(좀돌날몸돌, 돌날몸돌 포함), 격지(돌날, 좀돌날 포함), 조각, 망치 등 석기 제작 관련 유물이 주를 이루며,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슴베찌르개, 긁개, 밀개, 홈날, 뚜르개, 새기개 등의 연모를 포함하여 모두 15,000여 점에 이른다. 문화층마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가진 망치돌이 출토되었고, 짝이 맞는 몸돌과 격지, 조각들이 발견되어 이곳에서 석기 제작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좀돌날: 몸돌에서 떼어낸 격지 가운데 길이와 너비가 2:1 이상이고, 등 면에 양쪽 가장자리와 나란하게 능선이 남아 있는 것을 돌날이라고 하는데, 좀돌날은 최대 너비 12mm 이하인 것을 말하며, 주로 결합도구로 활용되었다.
특히, 가장 아래층인 3문화층에서 길쭉한 규질사암 자갈돌(길이 20.6cm, 너비 8.1cm, 두께 4.2cm)에 0.4cm 간격으로 22개의 눈금을 새긴 돌제품 1점이 출토되었다.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이러한 유물이 지금까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어디에서도 확인된 바 없어 후기 구석기 연구에 도움을 줄 획기적인 유물로 판단하였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중간층인 2문화층의 숯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약 18,000년 전후(17,550±80bp, 18,490±80bp)이며, 분포 범위는 현재 조사구역 바깥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분포 범위: 약 2,500㎡).
아래의 돌멩이가 문명의 증거로 내놓고 있는데...
"만9000년前 한반도의 하진리에서 닮은비의 상수가...
하진리에서 출토된 ‘줄새김 자갈돌’.
신용하교수님은
"만9000년前 한반도 눈금돌… 10진법으로 발전해 동방에 퍼졌다"
라고 하시는데 위 돌멩이는 10진법정도의 수준이 아니라고 봅니다.
10진법의 차원문제가 아니라...
좀 과하게 들리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지고한 수학과 철학과 과학으로 겸비되어 수학의 신이라고나 할까?
천부의 이치를 알리는 돌멩이라고나 할까요?
위 ‘줄새김돌’이 ‘길이의 척도’임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된다.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수치를 계산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정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설계를 했다는 것인데...
이른바 닮은비상수를 아실 겁니다.
닮은비 상수는 이후에도 수 학의 비율측정에서 중요한 위상을 가집니다.
아무튼 다음수치는 아주 객관적인 수치라는 의미이지요
첫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21개 줄의 ‘눈금’ ‘사이 길이’가 평균 0.4141㎝로 균일하다.
둘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자갈돌 전체 길이는 20.6㎝ 인데, 중앙에 새겨진 눈금칸 20개의 총 길이는 8.2816㎝에 불과하고, 좌우(또는 상하)에 10㎝ 이상의 긴 여백이 남아 있다.
이것은 눈금을 30개 이상 새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20개 눈금칸만을 새긴 것으로서, ‘20개 눈금칸’을 1단위로 한 8.2816㎝의 자 ‘척(尺)’(즉 1尺)을 사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숫자를 헤아리는 능력은 동물들도 가지고 있다. 침팬지는 매일 똑같이 다섯 개의 바나나를 차례로 주다가 어느 날 3개를 주고 멈추면 나머지 2개의 바나나가 나올 때까지 소리를 지른다. 지능이 뛰어난 돌고래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동물들의 숫자 학습 능력은 5개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무한에 가까운 숫자를 발견하고 이를 활용할 줄 아는 존재이다. 인류는 언제부터 숫자를 찾는 모험에 나섰을까?
스와질랜드와 남아프리카연방 사이에 위치한 르봄보(Lebombo)산에서 약 4만 4천 2백년 전~4만 3천년 전의 원숭이 종아리뼈에 29개의 줄을 새긴 ‘르봄보 뼈’(Lebombo Bone)가 오스트레일리아 고고학자 보몽(Peter Beaumont)에 의해 1970년대에 발견되었다. 학계에서 이 눈금돌을 길이의 척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4만년 전의 줄새김 뼈인 ‘르봄보뼈’
숫자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는 아프리카의 콩고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1960년, 나일강 상류지역에 속하는 이샹고를 답사하던 한 벨기에인이 날카로운 칼날 자국이 새겨진 뼈 조각을 발견하여 본국으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약 6천 년 전의 유물로 추정했으나 나중에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으로 연대를 확인한 결과 2만년이나 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샹고 뼈(Ishango-Bone)-사진: 아프리카 자연사박물관
이샹고 뼈에는 사람이 새긴 것이 분명한 수십 개의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비비원숭이의 종아리뼈로 추정되는 이샹고 뼈 조각은 한쪽 끝에서 날카로운 수정조각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뼈 조각에 무늬를 새길 때 수정칼날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에 이 뼈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몸에 차고 다니던 부적이나 단순한 장식물로 여겨졌지만, 칼자국의 개수조합은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사실을 말해 준다.
세 개의 면에 새겨진 칼자국을 헤아려 보면 앞면과 뒷면에 각각 60개가 표시돼 있고 가운데 면에는 48개가 있다.
가령 앞면의 숫자조합은 (19+17+13+11=60)이고, 뒷면의 조합은 (9+19+21+11=60)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숫자의 조합을 ‘기억하고 보관할 필요가 있는 숫자’즉 계수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구석기 시대의 한 원시인은 어떤 규모의 수량을 기록하기 위해 뼈에 칼자국을 새겼을 것이다.
그 어떤 수량이란 사냥과 채집의 양일 수도 있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 숫자일 수도 있다.
아직 정착과 농경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임을 감안할 때 그 숫자가 천문관측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암갈색의 뼈조각을 통해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최소한 60까지의 숫자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가 수를 사용했었다는 증거는 1960년 벨기에의 장 드 브라우코르가 콩고의 이샹고(Ishango) 지역에서 발견한 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겨진 숫자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원숭이의 뼈로 추정되는 이 뼈는 기원전 2만년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뼈에는 각기 길이가 다른 선 여러개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포획한 동물의 수, 또는 날짜를 세기 위한 달력의 표시 등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각기 다른 주장들이 있지만, 그 선들이 무엇인가를 ‘세기’위한 수의 표시였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는 약 2만년전부터 수의 개념을 갖고 살기 시작했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고생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것이 약 600-200만년전,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약 20만년전인 것으로 추정되니 적어도 인간은 사람의 형상을 어느 정도 갖춘 이후로도 약 18만여년동안은 수를 셈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었던 미개한 동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후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셈의 체계를 발달시킵니다.
하지만, 이때의 셈이라는 것은 물물교환의 수단, 세금징수의 용도 등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 즉 음수와 같은 개념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빚을 지는 것을 마이너스, 즉 음수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빚을 얼마나 지었는가라는 표현만 필요할 뿐, 빚의 양은 양수로 충분히 표현이 되기 때문에 음수의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앞서 설명드린대로 자릿수를 나타내기 위한 필요성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고대의 그리스나 로마 등의 숫자들은 십의 자리, 백의 자리 등을 표현하는 수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는 일의 자리, #는 십의 자리, 그리고 &는 백의 자리를 나타내는 수라면 432라는 수는 &&&###@@라고 표기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지금도 사용되는 로마숫자 I, II, III, VI 등이 표현되었고, X가 십을 뜻하는 숫자로 23의 경우 XXIII으로 표현을 하면 되니 지금과 같은 자릿수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37년에 체코슬로바키아 모리비아 지방 베스트니츠 마을에서 발견된 어린 늑대의 약 3만 년 전의 7cm 크기의 정강이뼈에 새겨진 55개의 눈금은 5개씩 무리지어 배열되어 있어서 구석기인들이 약 3만 년 전에 셈법(counting)의 개념을 정립했었음을 알려 주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숫자라고 한다.
당시에 일, 이, 삼..., 등의 수 이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뼈에 새겨진 금 중에서 30개는 5개씩 묶여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미 오진법이 쓰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수의 발견은 이보다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2만~3만 5천 년 전이라면 이른바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그 무렵은 농업이 시작되지 않았었던 수렵 시대인데 이러한 원시 공동 사회에서 수를 셈한다는 것이 어디에 소용 되었을 것인지 추측하면서 자연스럽게 단순한 수량의 계산을위 한 사칙연산을 염두해둔다.
즉 자연수의 덧셈 뺄셈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는 한층 더높은 고동수학의 숫자라는 것임이 드러나게된 것이다.
명백한 사실이 대한민국의 충청도의 하진리에서 발견되었다.
하진리에서 구석기인들의 유물 중에서 닮은비의 상수의 수치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었다.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남한강 유역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눈금(점선 안)이 새겨진 돌. 일정한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져 있는 이 돌은 다른 돌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길이는 20.6cm로 아래쪽 10cm 길이의 자보다 배 이상 길다.
약 1만8000년 전에 제작된 여러 석기를 발굴하던 중 마치 자처럼 일정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진 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구석기인이 포획 동물 수를 뼈에 새겨 넣는 등 수(數) 개념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기존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하지만 구석기인들이 수를 이용해 크기, 넓이를 계산하는 측정 도구를 사용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었다.
눈금이 새겨진 돌을 보고 놀란 이유다.
하진리 ‘줄새김 자갈돌’의 눈금 계측 (출처: Institute of Korean Prehistory)
문화재청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11년부터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단양 수중보 건설지역에서 진행된 후기 구석기 유적(수양개 6지구) 발굴조사를 통해 눈금을 새긴 돌제품 등 총 1만50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함께 발굴된 밀개. 동물 가죽을 밀어 기름을 제거할 때 사용됐다. 문화재청 제공
연구원에 따르면 이 유적지(830m²)에서는 총 3개의 후기 구석기 문화층이 발견됐다. 문화층이란 집터, 석기 제작터 등 인류 행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출토된 석기는 몸돌, 격지, 조각, 망치 등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다.
이 일대에서 석기 제작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눈금이 새겨진 돌은 가장 아래층인 3문화층에서 발견됐다.
길이 20.6cm, 너비 8.1cm, 두께 4.2cm의 길쭉한 규질사암 자갈돌에 0.4cm 간격으로 눈금 22개가 새겨져 있다.
손으로 들고 다른 돌의 길이를 잴 수 있는 크기로 망치 등을 제작할 때 쓰였을 수도 있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자연수라면 그러한 다발이 나올리가 없다.
이는 천문학에 사용되는 군론에 해당하는 숫자라는 점이다.
천문학의 수학은 자연수의 구구단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계산능력은 상당한 수학적인 지혜가 필요하고 정치적으로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회적인 위치를 가진다.
즉 제사장이라는 신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된다.
환단문명ㅇㅇ에서는 환웅이나 단군의 제사장들정도의 신분계일 것이다.
이들이 이미 천부경에서 제시하는 우주만물의 운행을 수로 계산한 것이라는 점을 증거하는 것이고 이미 그당시에 피라미드의 기하학적인 수학이론인 원방각이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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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고 뼈(Ishango-Bone)의 숫자
아프리카 나일강 상수원의 하나인 에드워드 호숫가의 이샹고(Ishango)에서 1960년에 벨기에의 브뤼셀 대학교수 지질학자 하인젤린(Jean de Heinzelin de Braucourt, 1920~1998)에 의하여 발견된 약 1만 9,500년 전의 짐승뼈인 ‘이샹고 뼈’(Ishango Bone)에 새겨진 세 행(<그림 6>의 a, b, c행)에 새겨진 눈금을 두고세계 학계가 아프리카의 말기 구석기인의 숫자개념 형성과 후일 이집트 문명의 ‘10진법’(decimal system)의 형성의 기원까지 논하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림 4> 이샹고 뼈(Ishango Bone)사진: Alexander Marschak, 1971
사실 초고대의 시절에 뼈에 새겨진 눈끔의 의미에 대하여 올바른 그리고 정확한 해석을 못하고 이쓴 실정이다.
어느학자는 29의 수가 월경주기나 달의 주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사실 그 당시에도 인류는 초호화판의 건축을 한 것입니다.
인류는 이미 초고대시절에서도 단단한 돌을 떡주무르듯이 하면서 호사한 건축을 짓고 건물을 만든 것인데 무슨 방법으로 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 단위들이 일종의 상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군환체의 수학개념이라는 것이고 이미 군환체수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수학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멩이에다가 우주의 별자리움직임을 새기면서 천문학을 하였는데...
이게 다 군환체론입니다.
환역이라고도 합니다.
환역의 기본수는 29입니다.
55의 수는 어떻게 하여 나온 것인가?
55의 수는 아주 중요한 상수입니다.
환 혹은 구슬체입니다.
1937년에 체코슬로바키아 모리비아 지방 베스트니츠 마을에서 발견된 어린 늑대의 약 3만 년 전의 7cm 크기의 정강이뼈에 새겨진 55개의 눈금은 5개씩 무리지어 배열되어 있어서 구석기인들이 약 3만 년 전에 셈법(counting)의 개념을 정립했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들이 이미 천부경에서 제시하는 우주만물의 운행을 수로 계산한 것이라는 점을 증거하는 것이고 이미 그당시에 피라미드의 기하학적인 수학이론인 원방각이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의미가됩니다.
수만년전부터 사용된 것이 바로 기화수토의 개념이고 이개념은 바로 4원소설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개념은 낙후된 개념으로 치부되는데 그게 아니라 수샇갓의 기본이되는 닮은비 황금비 자연상수 원주율 입니다.
물리학적으로는 4차원론이되고 허수의 관점에서는 허수의 4차원입니다.
인류 최고의 천문학 모형( 윷판)
1990년대 중반 일본 아사히신문은, 평양의 한 고인돌 덮개돌 위에서 북두칠성이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내놨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조차도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외면으로 대하였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모든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등은 고인돌 위에 북두칠성을 비롯한 성혈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상식에 맞추어 눈으로 본 것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생긴 해프닝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단순한 돌덩어리로 치부해버린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고인돌의 북두칠성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하나는 천문학으로 상징화되는 수학과 과학의 탄생이며, 둘째는 종교와 신앙, 그리고 세상을 보는 세계관으로서 철학의 탄생이다.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 <충북청원군 돌판> <경북열일군 돌판>
과학적으로 보면 북두칠성은 그 자체로는 수학과 전혀 상관없는 별들처럼 보이며, 우리 눈에 7개의 별들이 눈에 쉽게 띄었고, 이정표 구실을 하면서 그 모양이 각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별들을 돌에 새겼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 북두칠성을 관찰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북두칠성은 1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지만, 그 뜨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눈에 보이는 시간이 다르다는 말이다 . 그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수 계산을 하는 것이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선사시대의 여러 인류문명들은 피라미드, 스톤헨지 같은 천문학적 유물들을 남겼으며, 바빌론, 그리스, 중국, 인도, 이란, 마야문명 같은 동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밤하늘에 관한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역사적으로 천문학은 농사나 자연환경보호, 측성학, 역법, 천체 항법 등 인간생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각박해지고 약육강식의 사회가 조성되면서, 고대의 천문학은 점차 과학성을 상실하고, 점성술이나 주술적인 자기중심적인 이념지향의 이데올로기로 변질이 되게 되었다.
결국, 인류의 시원시기에 매우 정교한 천문학의 발달에 대하여 눈을 감고, 점성술로 변질 된 고대의 천문학을 확대 해석하여 인류의 천문학의 발달은 16세기의 망원경의 발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잘못 규정하고 있다.
현대에와서야 40여 년 동안 고대 마야문명의 유적에 대한 탐사결과 이들의 천문학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마야력에 대해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동의하는 것은, 그들이 남긴 유산이 현대 과학으로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정교한 것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우주의 주기와 시간을 계산하는 탁월한 계산능력이다. 이들의 역법은 우주의 주기와 시간에 대한 계수법이 현대 과학으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정밀하다.
2012년과 마야력을 소개하고 있는 도서 ‘월드쇼크 2012’ 의 저자 중 한 사람인 그렉 브레이든은 마야력이 우주시간을 추적할 수 있는 역사상 가장 정교한 측정방법수단이라고 하였다.
마이클 D. 코 등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마야력은 무려 25세기 이상, 단 하루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구시간과 우주시간을 카운트하고 있다며 그 정확성에 경이로움을 표했다.
고대 마야인이 계산해 낸 금성의 1년은 584일로서 현대 과학이 관측한 583.092일과 비교했을 때 오차는 매일 12초, 한 달에 6분 정도이다.
현대 과학은 1년이 365.2422일인 것을 알아냈지만, 마야인은 1년이 365.2420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만큼 마야인의 역법은 오늘의 첨단 과학을 능가하고 있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마야인들이 2012년 12월 21일 지구가 은하계와 동화한다는 것을 예측했다는 것은, 태양의 황도를 미리 읽고 2만 5800년 주기의 세차운동까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평생 고대 마야 문명을 연구한 호세 아구레스 박사는, 그의 저서 ‘마야인의 원동력, 기술 저편의 길’ 에서 마야역법에는 ‘은하계절’의 운행규율이 있다고 했다.
즉, 우리 태양계는 5125년의 대주기를 지나가고 있다. 이 주기의 기간은 기원전 3113년부터 기원후 2012년까지이다. 이 대주기 동안 지구는, 태양계와 함께 은하의 중심에서 나오는 은하빔을 가로질러 이동하게 되는데, 이 은하 빔의 길이가 기간으로 5125년이다.
이 태양계의 모든 별이 은하 빔을 지나가는 대주기 이후 지구에는 대변혁이 일어나는데, 마야인들은 이를 ‘은하계와의 동조’ 또는 ‘은하계의 동화’라고 명명했다.
마야역법에 따르면 대주기를 13단계로 나누고, 그 각 단계를 다시 20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지구는 그 마지막 20년간의 주기인 1992년에서 2012년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며, 이른바 ‘은하계의 동화’에 진입하는 최후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예고한 바로, 2012년 12월 21일 태양이 은하계의 황도와 적도가 형성한 교차점과 완전히 합치되면, 태양은 곧바로 은하계의 틈 사이에 놓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은하계가 지구에 내려앉아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과 같아진다. 이날 태양과 은하계의 중심은 정확하게 일직선을 이루게 된다.
과학자들은 은하가 일직선이 되면, 아마 몇 년 동안은 태양의 흑점이 지구의 자기장에 악영향을 미쳐 지구의 자기장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태양이 은하계의 중심과 일직선이 되는 현상은, 지구 자전축이 황도면의 축에 대해 2만 5800년을 주기로 회전하는 세차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단 몇 차례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2012년에 태양과 은하계가 일직선이 된다는 사실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이 우주의 운행 원리를 수학적으로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마야력은 약 2만 6천 년 전의 과거와 먼 미래의 태양 궤도까지 정확하게 판독해 만들어진 정교한 달력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구를 비추고 있는 태양의 탄생과 소멸을 천체와 태양의 궤도를 판독하는 나침반인 동시에 지구의 운명을 결정짓는 지도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러한 우주천제의 운행을 관측할 수가 있는 수단들이 있었을 것이다. 수학과 과학이란, 주관적인 신앙이나 믿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이치에 의거하여 정밀한 수의 원리와 셈법에 의하여 그 해법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수단으로 우주의 운행을 관측하고 측정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우주의 먼 거리에서 움직이는 별들의 행적을 세말하게 측정하는 관찰 할 수 있는 망원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 최초의 망원경은, 16세기경 이탈리아의 갈릴레오가 네덜란드의 발달한 렌즈 제작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이로부터 천문학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고 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야력의 발견으로 그 정설은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 된다. 사실 그 정설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고대의 망원경이 발견되었다. 즉 망원경에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부품인 렌즈를 인류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사용했다는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B.C. 2,000 년에 만들어진 렌즈들이 지중해의 크레타 섬과 소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비잔틴이나 동유럽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진 1,000년 된 타원체 형태의 렌즈들도 고트랜드 섬의 해적기지에서 발견되었다.
로마시대 작가인 플리니와 세네카는 조각사들이 렌즈를 사용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즉 오래 전부터 인류는 렌즈를 제작해서 불을 피우고, 물체를 확대해서 보고, 혹은 안경을 만들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흔적들이 여러 유적과 유물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편 우리민족은 이미 오랜 전부터 하늘에 대한 과학적인 관찰을 하였고, 여기서 놀라운 수준의 수학과 과학성과를 겸비한 천문학이 발달한 것이다.
고인돌의 성혈이야말로 천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고인돌 덮개돌 위에는 북두칠성만 그려진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른 별들도 그려져 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처럼 천문도를 그리려 한 흔적으로 보인다.
다른 별들을 그려 넣어 하늘 세계를 덮개돌 위에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는 북두칠성만 그렸던 초기의 고인돌과는 달리, 하늘세계를 모두 표현하려 한 것처럼 보다 발전한 의식 상태를 반영한 고인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만큼 별들에 대한 관측 기술이 발전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한반도의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의 성혈은 그만큼 많은 별들을 우리 민족이 알게 되었고, 또 그만큼 많은 별자리가 생겨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별자리를 제대로 연구하고 분석하면, 우리 민족의 별자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인돌 위에서 북두칠성이 발견되는 순간 더 확실해졌으며, 천문학의 수준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또 고인돌 덮개돌이 제단으로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은 단순히 죽은 이에 대한 제례뿐만이 아니라, 천문학의 역법과 더불어 세상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나 인생과 그리고 세계관의 구조를 알아보는데 객관적인 물증이며 중요한 근거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조선에는 고상한 집단적인 자아성찰의 철학이 있었고, 고인돌은 그 활동의 증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고인돌 덮개돌 위의 북두칠성은 우리 민족의 종교와 과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적인 상징으로서의 문양과 관계가 매우 깊다.
우리민족은 일찍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이를 경제적인 기초로 문화를 발달시키고 나라를 만들었다. 사실 농업이란 목축과 달리 약탈경제와는 연관성이 매우 적다.
수많은 농기구와 가축을 농업에 이용하는 기술까지 축적된 나라이기도 하다. 농업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나 문명은 노예경제와 약탈경제, 육류를 주요한 음식으로 하는 그러한 문화와는 구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천문학의 발달은 곧 농사의 발달과 비례관계로 이어진다. 고조선의 천문학이 발달했다는 것은 곧 농사도 그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파종하는 등 사시사철의 변화와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이 절기를 제대로 알아내려면 하늘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계가 없던 고대시절에는 해,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역(歷)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를 철학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역(易)’인 것이다.
4계절의 변화와 매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농사에는 필수였으므로 하늘을 관찰해 제대로 된 역을 만들고,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제왕의 책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제왕만이 대행할 수 있고, 자연재해는 제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세계관은 결국 하늘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늘의 정보는 하늘을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서 이상 징후에 대한 결과를 도출하는 담당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문명사에서 천문학의 발달 여부가 중요시되는 것이며, 기원전 1200년경에 하늘을 관찰했음을 보여주는 바빌로니아의 토지 경계비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성인으로 추앙 받는 이른바 ‘3황5제’가 있는데 이들의 업적은 모두 하늘과 땅에 관한 일이다. 요임금은 ‘희화씨’라는 천문 관측 관원과 기관을 설치했고, 순임금은 ‘선기옥형(혼천의)’이라는 천문기구를 창안해 천문역법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임금은 잦은 홍수로 황폐해진 중원지역의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천하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중국의 전설적인 세 성군 요, 순, 우는 천문 역법과 치수를 완성함으로써 제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1800년이나 빠른 천문도가 우리나라의 고인돌에서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세계 고대 천문학 분야에서는 개, 뱀, 전갈 등의 그림이 그려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빌로니아 토지 경계비를 별자리의 원형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고대 천문학의 발상지로 인정하는 이유이다. 또 메소포타미아가 다른 지역보다 앞서 문명을 꽃 피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그곳에서 발견된 체계적인 천문도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대동강 유역 고인돌에서 발견된 천문도는 기원전 3000년경의 것으로, 기원전 1200년경에 만들어진 바빌로니아의 천문도보다 무려 18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돌별자리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다음 아래의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외새산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 무덤이다. 이 고인돌은 문자 비슷한 곡선과 점들이 새겨져 있어, 글자를 전하는 돌이라는 뜻에서 ‘전자석’이라고 불린다.
< 룡덕리 고인돌과 실측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11개의 별자리에 속하는 별들이 새겨져 있으며, 별들의 운동을 감안한 연대는 기원전 2900년경이다.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 겉면에는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조사 결과 그 구멍들이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밤에 별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하늘의 모든 별들이 한 별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심이 되는 별이 북극성이다. 또한 북극성 주변의 별들은 다른 별자리들과 달리 연중 계속 볼 수 있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여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랐는데, 세차운동을 감안하여 연대를 측정해보니 고인돌의 별자리는 기원전 약2800의 하늘을 보여주었다.
또 같은 무덤에서 발굴된 질그릇 조각의 연대를 측정해보니, 4926년(±741)으로 나타나 고인돌 별자리의 연대 측정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초고대 시절부터 천문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총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있는 200여 기의 고인돌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는 북극 주변의 별자리와 지평선, 적도 부근의 28수를 비롯하여 모두 40개가 된다.
이 별자리들은 북위 39도인 평양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을 모두 새긴 것이다. 또 이 별자리에는 특이하게 은하수와 플레이아데스성단들도 새겨져 있는데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에 육안으로 보이는 별자리를 이렇듯 많이 새긴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다.
고인돌 별자리는 한반도 남쪽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미 1978년 충북대 이융조교수는 충북 청원군의 고인돌유적에서 조그마한 돌 판을 발견했는데, 표면에는 지름이 2~7cm의 크고 작은 홈이 65개나 파여 있었다.
고등과학원의 박창범 교수는 조사한 결과, 이것이 기원전 500년경의 천문도이며 북두칠성, 작은곰자리, 용자리, 카시오페이아 등을 묘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실로 ‘고인돌의 나라’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인돌이 많은 나라다. 고인돌의 영어로는 ‘Dolmen’이고, 일본어는 ‘도루멘’이라고 하는데 바로 우리말 돌멩이이다. 이것만 봐도 고인돌이 우리나라에서 유래하여 전 세계로 흘러간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의 숫자는 약 8만기로 추산되는데, 한반도에는 남북한을 합쳐 5만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며, 이 가운데 천문도를 새긴 고인돌은 주로 평양에서 발견되는데, 그 수가 200여 기에 이른다.
그러나 고인돌의 뚜껑돌에 새긴 구멍이 천문도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이 구멍에 대한 견해가 분분했다.
고인돌의 뚜껑돌에 있는 구멍은 고인돌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으로 보거나, 불을 일구는 발화구멍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으며, 하늘과 태양 숭배사상의 표현 또는 장례의식이나 장식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일부는 민간에서의 장수를 의미하는 발자국으로 인식하기도 했고 피장자의 족보로도 보았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제사를 지내고, 그 회수를 표시하거나 제사에 사용된 동물의 수량을 표시했다고 설명했다. 즉 학자들 마다 하늘과 태양 숭배 사상의 표현, 또는 장례의식이나 장식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제사를 지내고 그 횟수를 표시하거나, 제사에 쓰인 동물의 수량을 표시한 것과 같은 기초적인 산술의 증거 정도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우리조상은 이미 오랜 전부터 북두칠성 문양을 몸에 띄고 태어난 아이들을 '제왕' '대장군' 등의 운명을 지닌 것으로 풀었다. 또 북두칠성은 하늘을 오르는 '수레'로도 여겨졌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이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신앙이었다.
불교와 같은 종교에도 칠성신앙이 그대로 전해지는데, 북두칠성을 타고 하늘나라로 간다는 신앙이다. 우리나라불교에서의 칠성여래는 일본, 중국, 태국, 캄보디아, 인도 등 수많은 나라에서는 결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특히 고구려 고분의 수많은 벽화들에는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수레로 그려진 것들도 있다. 견우와 직녀가 1년에 단 하루, 7월7일 칠석(七夕)에 오작교라는 다리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별자리와 관련된 천문학 설화에서 발전했을 것이다.
천문학에서 견우(牽牛)라는 별자리와 직녀라는 별자리가 각각 있고, 이들 두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정반대 위치에 떨어진 채 하늘을 회전하다가 칠석이면 합쳐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견우는 독수리별자리를 구성하는 알타이어(Altair) 별이며, 직녀는 거문고별자리의 베가(Wega) 별을 지칭한다. 견우직녀 이야기로 대표되는 칠월칠석이란 절기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이미 고구려 사회에도 깊이 침투해 있었다.
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벽화고분인 덕흥리 고분이다. 북한 남포시에 소재하는 이 고분은 축조연대가 서기 408년이라는 확실한 기록이 무덤 자체에 남아있어 고구려 무덤의 연대를 결정하는 가늠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곳 무덤 앞 칸 천장 남측에는 견우와 직녀 그림이 있다. 견우는 글자 그대로 소를 끌고 있으며, 그 뒤 은하수를 형상화한 것임이 분명한 굽이치는 강물 그림 너머에 직녀가 있다. 이들이 각각 견우와 직녀임은 두 인물 옆에 각각 '견우지상'과 '직녀지상'이라는 묵 글씨가 적혀 있다는 점에서 의심할 바가 없다. 같은 고구려 벽화고분 중 대안리 1호분에는 직녀 그림이 확인된다.
견우직녀 설화와 칠월칠석 신앙이 고구려 사회에 짙게 침투해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는 남포시 소재 ‘감신총’이라는 고분벽화에 보이는 서왕모(西王母)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근본이 별자리인 까닭에 천상을 노니는 존재들이며 사람이 죽어서 승천한 죽은 영혼들을 돌보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런 까닭에 죽은 고구려 사람들이 잠든 무덤의 천장을 장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인돌 무덤에 새겨진 구멍의 배열 상태를 조사한 학자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별자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성좌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한 돌에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은 것처럼 보이는 고인돌이, 현대 과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우리 선조들이 당시의 최첨단의 과학기술 정보를 돌 위에 적은 것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획기적인 자료가 됐다.
총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있는 2백여 기의 고인돌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는 북극 주변의 별자리와 지평선, 적도 부근의 28수를 비롯해 모두 40여 개가 된다.
이 별자리들은 북위 39도의 평양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새긴 것이다. 또 이 별자리에는 특이하게 은하수와 플레이아데스성단들도 새겨져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이렇듯 많이 새긴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다.
아래의 사진의 왼쪽은 황해남도 은천군 우녕동의 고인돌로서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는 4800년 전으로 나타났으며 계절은 여름경이다.
또 오른 쪽 사진의 강동군 화강리 고인돌에는 전사, 화개(케페우스별)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천문학적 연대는 3700년 전 여름경이다.
< 황해도 정동리 우녕동 별자리 고인돌> < 강동군 항목2리 별자리 고인돌>
함경남도 함남 함주군 지석리의 고인돌에서 발견된 별 그림은 기원전 1500년경의 것으로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북극점을 기준으로 해 큰곰별자리에 속해 있는 북두칠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작은곰별자리, 카시오페아, 케페우스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특히 뚜껑돌 우측을 따라 은하수에 해당하는 작은 별들이 많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은하수가 별들이 많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의 관찰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를 4부류로 구분해 새겼는데, 그 크기는 직경 10, 6, 3, 2센티미터 순이고 깊이는 3~3.5센티미터 정도이다. 이 돌에 새겨진 별을 관찰하면 동지, 하지, 춘분, 추분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용자리별을 기준으로 볼 때,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에 속하는 별에 해당하는 구멍들의 간격이 용덕리 고인돌보다 더 정확하며, 4등성 이하의 별까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단순히 별을 관상한 것이 아니라, 관측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의 천문학이론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 우선 밝혀져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떠한 과학적인 원리를 가지고 우주 천문을 관측하고 계산을 하였으며, 그 철학적인 실체는 무엇이며 그 객관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선 고문헌의 내용을 검토해보자!
태백일사의 제 3권에서 신시본기에는 우리나라 책력의 시원을 ‘계해’라고 하는 역법을 썼다고 한다. 이어서 구을 단군 때에 ‘갑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제사에서도 ‘7회 제신력’이라는 역법이 있었다고 한다.
“ 신시에 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 첫 회의 날엔 천신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에 제사지내고, 3회 날에는 수신에 제하고, 4회 날에는 화신에 제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에 제하고, 6회 날에는 금신에 제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에 제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듬은 예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구을이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해의 시작이라 했다.
六癸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으로 계를 처음으로 시작한다. 계는 啓요 해는 核이니, 일출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계를 蘇羅라하고, 갑을 청차이라 하고, 을을 적강이라 하고 ,병을 중림이라 하고 정을 해익이라 하고, 무를 중황이라 하고, 기를 열호수라 하고, 경을 임수라 하고, 신을 강진이라 하고, 임을 유부지라 했다.
亥를 支于離, 자를 효양, 축을 가다, 인을 만량, 묘를 신특백, 진을 밀다, 사를 비돈, 오를 융비,미를 순방,신을 명조, 유를 운두, 술을 개복이라 한다. ”
위 글을 보면 우선 우리나라의 책력이란 사실 음력의 달력과 12절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오늘날까지 동양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12간지나 천간시간의 책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중국학자 쉬랑즈는 ‘중국사전사화’의 저서에서 중국의 역법은 사실 동이족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구절을 그 증거로도 삼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다른 각도에서 책력을 논하는 문헌이 있다. 이른바 박제상공이 저술 했다고 하는 ‘부도지’의 글이다. 우리는 박제상의 징심록 15권 중에서 제1권인 부도지의 20장과 23장을 해석하면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 부도지의 20장과 22장은 역(易)의 이치와 역(曆)법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과 달력의 기본적인 원리와 계산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중국의 역법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중국의 천문과 역법에 대하여 거북이나 ‘명엽’의 변화를 보고 작성한 우매한 점술역법 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부도지 23장에서는 부도역법의 기본적인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 4, 7의 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 5, 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 6, 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
문제는 위의 글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는데 대부분 전문가들도 위 글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며 경우에는 음력으로 생각하는 경우와 양력으로 생각하는 경우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부도지의 전체 내용을 보면 오늘날까지도 유지되는 동양사회의 음력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하며 마치 서양의 태양력을 옹호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 글은 동양사회에서는 용납할 수가 없는 서양의 태양력의 역법을 주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위 글은 서양의 역법에 경도된 자의 소행이라는 근거로 간주되고 이에 따라 자연히 진위논란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부도지가 작성된 시기가 430여년경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로서는 서양의 태양력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기라는 것이다.
결국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의 책력은 중국의 역법의 시조 격으로 동양사회에서 고유한 역법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부도지의 역법은 서양의 태양역법으로서 부도지 자체의 저서가 위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위 신시본기의 책려이나 부도지의 역법이 태양역이나 태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태음역이나 태양력의 그자체가 우주 운행의 현실을 정화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자의적이고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음역과 양력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고 이들의 역계산법과는 달리 자체 고유한 역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 인위적인 말의 의미는 현실의 자연세계를 정확히 반영하는 역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사용하는 이른바 ‘그레고리역법’과 기타의 북한에서 흔히 사용하는 ‘주체연호’ 등은 모두 이른바 황제 중심의 역법인데 이는 우주 운행의 과정을 정확하게 반영하기보다는 왕의 생일처럼 기념적인 사건과 꿰맞추어 정해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역법은 일종의 점성술이나 주술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위 부도지의 주장에 의하면 적어도 정확한 역법이라고 한다면 1년은 12달이 아니라 13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1개월은 기본적으로 28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년을 13달로 하고 한 달을 28일로 하는 역법은 과연 무슨 근거로 하여 이루어 진것일까?
이를 이른바 ‘부도역법’이라고 하며 이 기원은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민족사에서 역법의 시조격인 ‘계해의 역법’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자연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과학적인 역법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부도역법이란 오늘날의 양력의 역법을 셈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고조선의 계해역법이나 7회 신력이나 갑자책력이나 부도역법은 모두 그 근본이 같다는 것이다. 즉 계해의 역법이나 부도역법은 모두 우주운행의 변화를 객관적인 이치에 맞게 수리화하고 수량화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부도역법이나 계해역법의 본래의 역법이란 그 본질적인 중심이 어디이며 그 수 계산법은 무엇인가?
우선 그 역법에서 중심적인 것이 바로 북극성이고 북두칠성의 운행을 보면서 계산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계해역법은 우주운행의 기본중심이 북극성이고 북두칠성과의 운행을 통하여 우주와 만물의 운행과 주기를 자연이치 그대로 계산한 것이다.
그리고 부도역법은 이를 더욱 추상화하고 일반화하여 단순한 역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미 태백일사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고조선의 계의 역법이란 바로 ‘소라’ 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소라는 사실 다음과 같은 바다와 육지에서 자라나는 갑각류의 소라와 같은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소라라는 생명체의 모습을 수학적으로 계산한 것이다.
위 그림은 자연의 형상과 형태에 숨겨져 있는 이른바 황금비, 황금분할의 수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피보나치수열’이라고 하여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는 수열이다.
우리조상들은 자연에서 얼마든지 관찰할 수가 있는 황금비 황금분할의 수 계산법으로 북두칠성의 운행과 우주의 주기를 계산한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무수하게 존재하는 고인돌은 이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위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등장하는 ‘소라’라는 것은 분명 한문이 아니고 순수 한글의 소리음이다. 아마 갑각류의 소라가 아니고 잣나무의 ‘솔’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솔의 음이 소라로 되고 이 형상이 금척의 수 계산에 가장 합당한 것이다. 이 소라가 솔을 의미하든 갑각류를 의미하든지 별로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해를 ‘지우리’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북극성의 밝기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가지고 시간을 계산하는 역법을 의미한다.
즉 해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기울기를 수치로 계산하는 책력을 의미한다. 해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기울기의 비율이라는 말을 축약하여 생긴 개념이고 이러한 방법으로 동서양의 대부분의 고대학자들이 시간을 계산하고 각분시라는 시간구분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지우리라는 말 자체에 매우 과도한 해석을 하고 있다. 개념적인 파악은 오히려 주관적인 착각을 부른다. 과학적인 태도가 아닌 것이다.
혹자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땅위로 자라 나오면 해를 향하여 자라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라 한다. 또는 태양이 뜨고 지면서 자연의 생명체는 빛과 어둠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자연의 모든 생명현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지우리’를 철학적으로 풀이하자면 세상이치를 태양의 움직임에 비유하건데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보임이 있으며 보임이 있으면 반드시 지음이 있으며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공이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해의 개념이고 지우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빛이란 태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북극성은 밝기로 계산된다. 없어졌다가 생기는 것이며, 나타났다가 지나간다가는 것으로 마치 삶에서 흔히 있는 이별이고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생명의 씨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계’란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원방각의 수학적인 계산에 의하여 그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 북극성이 한번 그 운행을 하면 대략 2만5천 8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소라와 같은 자연의 황금률을 우주에 적용하게 되면 오늘날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마야인들의 책력마저도 이에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역법이 된다.
오늘날 인류문명사의 모든 역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위적인 개념에 근거하여 수리화한 역법이기에 모두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원천적으로 정확하게 반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조상들의 역법이야말로 이른바 황금률의 우주 자연의 법칙을 책력에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신의 역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편 신라의 충신인 박제상공이 저술한 부도지의 이른바 ‘부도역법’ 은 고조선에서 널리 대중화되어 있는 역법을 금척의 원리로 수리화한 것이어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우주의 운행원리는 북극성의 삼성의 변화와 그 4단 운행을 금척의 원리로 수리화 하고 5개의 보이지 않는 자리와 7개의 별자리를 가지고 그 밝기정도를 수치로 계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금척의 원리로 실제 적용한 책력이나 혹은 남아 있는 증거물은 무엇이며 또 이를 계승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는가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이를 증거 하는 유물과 유적은 단편적으로 극소수의 것에서만 그 흔적을 보이고 있을 뿐이고 더구나 이에 관한 탐구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고 다만 설화와 전설로만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흔히 신라의 건국설화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을 우물가에 비유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혹자는 무슨 해양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너무도 자의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흔히 북두칠성을 국자에 비유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북두칠성은 우물가에서 물을 뜨는 것으로 비유하였는데, 신라의 선덕여왕의 첨성대가 바로 북두칠성의 상징으로 건축된 성탑인 것이다.
아직도 첨성대를 우물로 비유하여 마치 알을 우물가의 용과 비유하기도 하는데, 사실 나정의 의미는 원방각의 철학에서 방의 형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첨성대의 꼭지부분의 사각형의 모양은 바로 북두칠성의 국자모양의 사각형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여 원, 방, 각으로 이루어진 금척의 원리를 형상화 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 조상은 아주 먼 옛날부터 북극성을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역법을 만들고 철학을 세우고 과학을 하며 이를 자연의 농사일에 적용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우주의 별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천부경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 것이고 이를 원리화 한 것을 금척이라고 규정하고 계속 전승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세계에는 돌무덤들이 더러 존재하지만 고인돌처럼 형식과 위용을 갖추고 매우 너른 강역 내에서 나타나는 경우는 우리 민족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고인돌에는 작은 방이 있고 그 곁에 망자가 사용하던 물건들이나 청동검과 같은 부장품이 있다. 그런데 아직 주목받지 못한 고인돌의 부장품 중에서 ‘돌저울추’가 있다.
임진강 중류 지역에서 발견된 돌저울추는 한 농사꾼의 밭에서 발굴됐는데, 그 농부는 농사하는데 걸리적거리는 고인돌을 불도저로 밀었고, 그 아래서 돌저울추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저울추는 돌과 무쇠로 만들어졌으며, 몸통에는 `십오근(十五斤)`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 무게에 따라 저울추가 각각 달리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저울추가 의미하는 것은 매우 크다. 우선 저울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수량과 수의 과학이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삶을 살아가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정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고 이러한 공정성은 동물세계와 같이 오로지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세워지는 양육강식의 궤변논리가 아니라 객관적인 수에 기초하는 철학적 권위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나가서는 이 돌추가 의미하는 것은 시장제도에서 필수불가결한 공정한 셈법과 제도가 이미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나 고조선의 화폐인 ‘돈’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법률에서도 당시의 사회에는 시장경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저울추의 존재는 이 시장이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당시에도 도량형이 통일돼 있었으며, 산동 지역의 저울추와 무게가 같다는 사실은 산동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미 그 이전부터 고조선의 무역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길이 무게 부피 등의 단위를 통일 한 도량형의 존재는 고조선이 여러 가지로 중국에 비해 사회제도가 매우 정교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먼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선박도 중요하지만, 항해기술 즉 배가 육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때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나침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나침반(羅針盤)의 사용에 있어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년) 정월 초에 당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자석을 얻어간 사실이 쓰여 있고, 5월에는 급찬 지진산 등을 통해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나침반은 송나라 때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런 자료를 보더라도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발명한 나라는 신라로 볼 수 있다. 나침반에 대한 기록은 통일신라가 등장한 이듬해이지만 통일신라 전에 나침반이 사용되었음이 틀림없으며, 어느 나라보다 나침반을 사용했다면 당시 항해술도 매우 앞섰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셈법을 뒷받침 하는 정밀한 수학과 과학이 전제되며, 이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실체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당시 고조선사회는 이미 저울과 추의 관계로 상징되는 정치철학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단군시대의 신지 발리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신지비사’에는 고조선의 만주지역의 삼한일대의 지세를 저울에 비유한 바, 고조선은 삼한으로 황금분할 되었는데 진한을 저울대로 비유하고 변한을 저울추, 마한을 저울판으로 황금분할 되어 하나의 공동체사회를 구성하고 운영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의 수학과 철학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너무도 먼 일이고 그 기억의 흔적도 아련하지만, 새 아침에 처음 집을 나서는 설레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철학을 찾아서 또 다시 길을 가보자!
28숙의 천문도
우주의 별자리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위해서는 양자역학의 셈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천문학은 양자역학의 시조라고 할 수가 있다.
양자역학은 자연수의 구구단을 거부한다.
즉 군환체의 고등수학이 전제되어야한다.
초고대사회를 정치적으로 이끌어간 제사장들은 고등수학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고등수학이란?
허수사용, 무리수, 무한급수, 소수의 원리, 다양한 상수, 등을 사용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특히 군환체수학을 사용하는 것이다.
초고대사회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달이나 북극성의 음직임은 인간의 농사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하고 이 분야에서 천문학 계산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부상하는 것이다.
결국 양자역학의 시조가 바로 천문학이라는 의미가 된다.
인류의 문명은 초고대에서는 원시적인 양자역학의 군론이 사용되고
이후에는 고대사회에 이르러 수량계산이 가능한 자연수의 구구단이 널리 공유된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몰락한 양자역학은 현대의 디지털사회가되면서 다시 부활을 하게 되는 순환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인류의 문명도 주파수처럼 창조와 몰락 그리고 부활의 반복적인 사이클을 그리고 흘러가는 가봅니다.
다음의 사례를 분석해보자.
6 개월간의 월력이 새겨진 이샹고의 뼈
초고대사회에서 달의 공전과 자전주기를 연구한 결과 여성의 월경주기와 달의 주기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증거는 구석기시대 유물에서 찾을 수 있다. 우간다와 자이레 사이에 있는 에드워즈 호숫가에서 1962년 하인젤린(Jean de Heinzelin)에 의해 발견된 기원전 2만~2만5천년 전의 ‘이샹고의 뼈’(Ishango’s bone)가 그 것이다.
마샥(Alexander Marshack, 1918~2004, 1972년)은 현미경을 통해 이 뼈를 분석한 결과 미세한 금들로 6개월 간의 월력(月曆, 현재 우리가 쓰는 태양의 공전주기에 근거한 태양력이 아닌 달의 공전 주기인 29일 기준으로 한 달을 정하는 월력)을 표시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이외에도 구석기시대(기원전 3만~1만년)의 월력이 새겨진 유물로 프랑스 남부 바스크 이츠리츠(Isturitz)에서 발견된 뿔(기원전 2만5천년), 프랑스 도르도뉴(Dordogne)의 블랜차드(Blanchard) 주거지에서 발견된 뼈, 남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발굴된 ‘비비의 종아리뼈’ 등이 있다. 이 월력은 인간이 최초로 수를 사용한 기록이다.
그리고 여성이 고유하게 가지는 월경주기와 달의 공전 주기가 같다는 사실에서 여성이 맨 처음 수학적 기술을 발견하고 사용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블랜차드지방에서 발견된 월력(위), 이츠리츠의 월력이 새겨진 뼈(아래)
그리고 그 증거는 여기 있다.
구석기 시대의 월력 유물들이 나온 곳에서는 곡식의 신이자 생명과 출산의 신인 여성성에 대한 숭배의식(Goddess Worship)이 행해졌다.
여성의 성기, 가슴 등을 강조한 조각물을 만들어 여성성을 숭배하는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의미하는 핏빛 붉은 색 황토를 그 조각품에 칠하였다.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Wilendorf Venus), 프랑스 로셀(Laussel Venus)의 비너스, 체코의 베스트니츠(Dolni Vestonice)와 브르노(Brno)에서 발견된 여성 성기를 추상화한 메달과 원판 등이 그 유물이다.
프랑스 로셀에 있는 대형 암벽 부조. 기원전 2만 3000년 전 구석기 시대 제작.
오른 손에 든 초생달 모양의 들소 뿔은 풍요를 상징하고, 배를 향한 왼손은 생식능력을 상징한다.
즉 13달을 새긴 horn을 들고 있다 ( 이미 당시에 1년을 13개월로 계산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로셀의 비너스(월력에 의한 13달을 새긴 horn을 들고 있다) 여성이 월경주기를 기록한 월력을 만든 이유는 수렵생활을 하던 석기인들이 농경문화를 정착시키며 파종과 수확 등의 경작을 위해 필요로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게다가 당시 농사는 여성들이 몫 이였다. 남성이 수렵을 하고 여성이 경작을 했던 것이다.
체코의 베스트니츠에서 출토된 맘모쓰의 상아로 만든 목걸이 ( 다리를 벌리고 있으며 여성의 성기를 극단적으로 추상화 하였다.)
여성의 생리주기를 달의 운동주기가 동일하여 이를 기반으로 하여 당양한 철학과 사상이 생기게된다. 즉 신화 설화적인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창작된 것이다. “경배하라.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몸을. 피 흘려 생명의 능력을 보이니 이를 더욱 찬양하라.” 28의 수는 생명체의 탄생의 수로 각인되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탄생한 것을 28의 수로 표현하였습니다. 28의 수는 가로세로의 7의 정사각형입니다. 가로 세로가 7인 정사각형의 면적은 49입니다. 48과 49와 50의 차이가 묘연합니다.
바위에 새겨진 윷판은 남원 오작교뿐 아니라 임실, 청주, 전주등등 여러곳에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이 윷놀이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전승되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내려오는 풍습(놀이)인데
김일권 교수는 윷판은 우리 고대 선조들이 창안한 최초의 천문우주 문형이라는 말을 합니다 즉, 우리 한민족의 우주를 보는 관점을 표현한 것이라는 거죠
조선 선조때의 김문표의 [윷판설]에 밖의 원은 하늘을, 안의 네모는 땅을 한가운데의 점은 북진의 추성 즉, 북극성이고 나머지 28점은 천상의 28수로 북극성을 뭇별이 둘러싼 형상을 말한다고 기록했고 돌아서 나오는 방향에 따라 동지, 추분, 하지등의 경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기원을 고대 부여의 중앙과 지방의 네 관직명을 나타낸거라고도 하고 고구려의 5부족 전통을 나타낸거라고 합니다 저가(도) 구가(개) 우가(윷) 마가(모) 그리고 중앙의 왕을 '대가, 걸, 고을'
북극성을 중심으로 1년 사계절에 네방위로 돌아가는 북두칠성의 천체 운행 모형이라는 말도 설득력이 있는게 윷판 옆에 칠성이 같이 성혈이 되어있는 게 뒷받침해 줍니다
예전에 새벽에 정한수를 길어 떠놓고 칠성님에게 기도한 우리네 어머니들의 지혜가 떠오르네요
우리의 산하에는 비록 전천 천문도는 아니지만, 무수한 석각 천문도가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민족도 이루지 못한, 아니 꿈조차 꿀 수 없었던 하늘 기록,,,
한민족의 고대 역사 뿐 아니라, 천문의 역사 나아가 전 세계의 역사를 다시 써야만하는 우리만의 하늘 기록이 있습니다.
자부선생은 발귀리 후세 사람이다. 선생은 신의 원리를 밝혀 득도하였으며, 일찍이 해와 달의 주기(日月之纏)를 측정하여 비약적으로 발전(飛昇)시켰다. 또 해와 달의 주기를 추적하고, 고찰하여 오행치수의 원리를 저술하였다. 이름하여 '칠정운천도'다. 이것이 '칠성력'의 시작이다.
후에 창기소(蒼其蘇)가 다시 그 법(칠정운천도)을 다시 복원하여 '오행치수의 방법'을 밝혔다. 이것 역시 신시 황부의 중경(하늘의 이치를 밝힌 환력)에서 나온 것이다.
우(虞) 나라 사람 '사우(?禹)'는 회계산에 와서 조선으로부터 오행치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자허선인(紫虛仙人)에게 '창수사자 부루'를 뵙기를 청하여 '황부중경'을 받아 갔다. 이것이 신시 황부의 중경이다. 우(禹:우왕)는 황부중경을 취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치수(治水)의 공을 세웠다.
첫 날(一回日)은 천신(天神)에게, 둘째 날(二回日)은 월신(月神)에게, 셋째 날(三回日)은 수신(水神)에게, 넷째 날(四回日)은 화신(火神)에게, 다섯째 날(五回日)은 목신(木神)에게, 여섯째 날(六回日)은 금신(金神)에게, 일곱째 날(七回日)은 토신(土神)에게 각각제를 올렸다. 이것이 책력의 시작(曆始)이다.
※ 회(回)의 의미는 주기라는 뜻임.
위 7회력(七回曆)의 순은 분명히 "일(日), 월(月),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이다.
이 7회력(七回曆)의 순(順)이 언제?, 왜? "일(日),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위 글을 통해서 요일의 어원과 의미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루의 시작을 제(祭)를 올리면서 시작하였다는 것은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는 것이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는 제(祭)를 올리며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넋두리> - 넋(魂) 두드림
제(祭)의 의미를 다시한번 음미해 봅시다.
천신, 월신, 수신, 화신, 목신, 금신, 토신이 현대적 감각으로는 가슴에 와 닫지 않을지 모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면서 또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서 주변 사람이나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고개 한번 숙여 보는 것도 의미있는 삶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부도지』 14장의 “又奠定北辰七耀之位 (우전정북진칠요지위)” 구절의 의미는 “또 북극성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였다” 이다.
이 구절은 우주의 현상, 예를 들면 - 북극을 중심으로 별들이 도는 현상이 있으므로 그것들을 보고"저게 북극성이다, 일곱별의 이름을 따서 7요라고 하자"는 의미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편의 기록을 표로 만들고 오늘날의 달력과 비교해 보자.
7회제신력과 오늘날의 달력을 비교하면 하늘(天)이 태양(日)으로 글자가 바뀌고,
화요일과 수요일의 순서만 바뀌었다.
七回祭神曆 칠회제신력
一回日
二회일
三회일
四회일
五회일
六회일
七회일
祭天神
祭月神
祭水神
祭火神
祭木神
祭金神
祭土神
현대력
日요일
月曜日
水요일
火요일
木요일
金요일
土요일
다시 부도지 14장으로 돌아가 “燔贖於盤石之上會歌而奉天雄之樂 (번속어반석지상 회가이봉천웅지악)”
으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넓고 평평한 돌 위에 올려놓고 제사를 드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울렸다”.
부도지 14장과 칠회제신력을 살피면 매일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는 것에 눈길이 간다.
환웅의 음악이 울려졌다는 것에서 이 사건은 지구대격변후의 시간대로 보여진다.
매일 제사를 지냈다는 의미는 엄혹한 자연환경하에서 생존하고 살아나가는 매일 매순간이
소중하였기 때문에 감사 혹은 기원의 의미를 가졌으리라.
7성력(七星曆)
시간이 흐르면서 당대에는 매일 하늘에 제사지내던 중요한 사건에 변화가 온다.
『태백일사(소도경전훈본)』의 추가설명을 보면 “자부선생은 말하기를…칠성력(七星曆) 의
기원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달력의 이름에서 제사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늘날 한국의 달력과 같이
일곱천체 (일곱별)만 남아 있다. 칠회제신력이 칠성력이 되었다.
요즘은 농경중심사회가 아닌 산업사회이고,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7일중에
하루를 쉬는 날로 법으로 정해 쉬고 있다. 최근에는 5일근무로 변하기도 했다.
7일중 특별히 하루 쉬는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맞추어 교회나 사찰을 찾아
예배하러 간다. 무슬림은 금요일이 예배일이고, 유태교는 토요일, 유태교의 뿌리를 가진 기독교는
대부분 일요일이나 종파에 따라 토요일을 예배일로 정하고 있기도 하다.
근 100여년 전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민족이 믿었던 무교나 불교에서는
특별히 순환하는 7일1주일중에서 어떤 특정일을 지정하여 예배일로 지정한 것은 없는 듯하다.
칠회제신력을 가진 민족은 매일이 다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와는 다르게 특정일을 예배일로 지정하지는 않은듯 여겨진다.
원 : 무극 :성수(7)
방: 반극 : 법수(8)
각: 태극 : 체수(9)
곡옥과 옥저(피리)
곡우(曲玉)는 단순히 금관의 화려함을 더하는 장식물이기만 한가?'
박물관에 전시된 신라금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치빛의 구부러진 옥. 방송위원회의 제작지원을 받아 지난 1년간 '곡옥의 비밀'을 쫓은 대구MBC 백운국 PD는 이 곡옥이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허구를 증명하는 단초라고 말한다.
일본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세 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인 곡옥이 한반도에서 전래된 유물이고 특히 이 곡옥이 중국인들이 동이(東夷)라고 불렀던 동북아시아 문화의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점은 곡옥문화 한가운데 우리 민족이 서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
그는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가 대량으로 발견된 중국 요서지방의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지에서 곡옥의 기원을 알려 줄 만한 옥룡들이 발견된 점, 무엇보다 이 같은 곡옥이 중국의 중원지방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홍산문화 유적지의 봉분들이 중국의 분묘양식과는 달리 한반도의 적석총, 즉 돌무지무덤 형태를 띠고 있고 진주 남강 일대에서 홍산문화 유적과 유사한 곡옥을 비롯한 돌무지무덤, 빗살무늬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어요."
이 같은 사실로 미뤄 홍산문화 유적지 일대가 중국과는 다른 별개의 문화를 이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
"동아시아의 역사를 중국역사의 한 갈래로 보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동북아시아 곡옥문화의 중심에 우리 민족이 있음이 증명되면서 다시 한번 그 허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왕관의 부속물로 다뤄지긴 했지만 '곡옥'자체가 방송전파를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백 PD는 "박물관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유물인 줄 알았던 곡옥이 생명성 있는 유물로 존재하고 있고, 특히 이 프로그램을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들을 보여주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곡옥의 비밀'은 한반도에서 전해진 곡옥이 일본에서 종교적, 의식적 대상으로 신성시되고 있는 모습을 조명하는 1부 '천황의 보물'과 홍산문화 유적을 더듬으며 중국의 동북공정 주장의 허구를 밝히는 2부 '무너지는 동북공정'편으로 제작되었다.
1921년 처음으로 발굴된 금관총 금관. 위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을 붙여 세운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국립경주박물관
칠정운천도의 이론서 - 주비산경
동양에서 오늘날 까지 남겨진 가장 오래된 천문학서로 ‘주비산경’(周髀算經) 이 있다.
이 책이 집필된 시기를 대략 대략 기원전 100년 경의 서한(西漢)시대로 보고 있으나 실제 천문학의 이론적인 특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책에는 우주만물을 원방각의 기하학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대하여 정말한 기하학적인 분석을 하고 있어서 기하학이 부족한 동양에서는 가장 독보적이다.
그런데 종래에는 주비산경이 무슨 특정한 설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었다.
이른바 마치 우주는 원이고 지구는 평평하다는 개천설(蓋 天設)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또 그림자를 이용해 여러 가지 거리를 계산했다고 하면서 이때 이용된 것이 피타고라스의 정리인데, 동양에서는 이 정리 를 구고현(句股弦)의 정리라고 불렀다고 하는 식으로 분수의 계산을 하는 것으로 왜곡소개하였다.
잘못 이해한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수학은 수비주의이고 무리수를 모르고 허수를 모릅니다.
자연수의 분수정도로만 우주만물을 환산합니다만
주비산경은 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허실수의 환산 무리수 초원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비율이나 비례개념을 가지는 상수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이를테면 황금비나 닯은비의 개념이 바로 중요한 상수로 하고 있던 것이다.
‘주비산경’에서 소개한 원방각이론은 본래 환단문명의 원방각과 일치하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원이란는 것은 천이라고 하는 데 이는 독자적인 상수라는 것이다.
수로 말하자면 소수의 개념이다. 수량계산에 사용할 수가 없는 군에 속한다.
방이라고 하는 것은 지에 해당하는데 수량계산이 가능하다.
그래서 방이라고 하는 것은 법수라고 하였다.
각은 인이라고하는 데 체수라고 하는 것으로 불려졌다.
우주만물을 이와같은 원방각이로 국각 단위로 계산했는데 그게 천지인이고 수로 1, 2, 3의 수이다.
그렇다면 1, 2.3이란 차원의 개념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삼재라는 개념으로 변화된 것이다 혹은 태극이라는 개념으로도 사용되었다.
태극의 개념 삼재의 개념은 기하학에서는 각에 해당하는 개념입니다.
이개념은 고조선의 초기부터 사용되고 이조 봉건시절에 훈민점음에서도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아무튼 ‘주비산경’의 ‘주비’에서 주는 원주인데 흔히 주나라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비(髀)는 일종의 자와같은 단위의 의미를 가지는 막대로서 해를 관측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의문점은 왜 이상스러운 개념을 사용하게된 것일까요?
원방각의 개념은 고조선의 천문학에서만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주비산경이 등장하는 시기에 고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산채로 묻히고 그에 관한 천문학도서들이 모조리 발태워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분서갱유사건입니다.
현재 차이나족의 시조라는 사람 진시왕이 사건의 유발사입니다.
이사람에 의해서 고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사라지고 점성술이 매마른 대지위에 들불처럼 일어나게됩니다.
거럼에도 불구하고 주비산경은 등장합니다.
주비산경이야말로 고조선의 천문학을 계승한 것이죠.
이 책은 환단문명의 원방각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담고있는 수리학이자 천문학이론서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주비산경에서 7형도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 있는데
이 7형도의 개념은 환단문명에서 환웅시대에 7성력 혹은 7정운천도의 7의 개념과 동일합니다.
환웅시대에서 사용되는 7정운천도 7성력의 7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이 7의 개념을 주목해야한다.
일반적으로 8의 개념이 중요한데 왜 8의 수가 아니라 7의 수인가?
주역8괘 8중론등과는 어떻게 다른가하는 점이다.
특히 세종대와의 시절에 성안된 7정산내외편의 7정산과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나라의 학계에서는 천편일률적으로 7정산의 7의 개념을 태양과 달과 대양계의 5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의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해설하고 설명하는데...
너무 무지한 소리이고 무책임한 해설입니다.
7정산의 7의 개념은 일종의 상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별을 중심으로 해서 7의 상수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음의 주비산경의 7형도는 환단시대의 7정운천도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천문학의 차원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주만물의 중요한 상수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비산경에서는 은 땅과 하늘의 거리를 8만의 상수로 규정하였는데 이를 8만 리라고 하고
삼각형의 닮음비를 이용해 태양까지의 거리를 측정했다.
즉 태양 바로 아래 지 점에서 6만 리 떨어진 장소에 8자짜리 막대기를 세웠을 때, 그림자 의 길이가 6자였다.
삼각형의 닮음비를 이용하면 다음과 같다.
6:60000=8:x ∴x=80000 따라서 막대기를 세워 놓은 지점에서 태양까지 거리는 8만 리다.
‘주비산경’ 상권에는 해와 달이 운행하는 궤도에 관한 설명도 있 는데, 이 설명에 따르면 해와 달은 절기에 따라 모두 일곱 종류의 동심원 궤도를 따라 돌고 있다.
일곱 개의 동심원을 칠형도(七 衡圖)라고 하는데, 각 궤도 사이의 간격은 1만 9833리 100보(1리는 300보)다.
가장 안쪽 궤도의 지름은 23만 8000리,
두 번째 궤도의 지름은 27만 7666리 200보,
세 번째는 31만 7333리 100보,
네 번째 는 35만 7000리,
다섯 번째는 39만 6666리 200보,
여섯 번째는 43 만 6333리 100보,
일곱 번째는 47만 6000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리와 보의 단위는 어떠한 것일까요?
현재에는 황화문명의 단위는 환단문명의 단위와 짭봉이되어서 순수한 단위를 찾기가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현재까지 전래되는 리와보의 단위는 주척(周尺)의 이름은 옛날 주(周)나라에서 사용했다 하여 주척이라 불렀다 하네요
그런데 이 주척의 단위는 즉 1자(尺)라는 의미인데 현대로 말하면 23.1cm이지요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길이의 단위로 촌(寸)-척(尺)-보(步) -장(丈)-리(里)-식(息)으로 되어 있어요 촌(寸)은 “손의마디”라는 뜻으로 10촌이 1척이니까 2,31cm 이지요
보(步)는 “한걸음”이란 뜻으로 6척(1.386m)이고 1장은 10척(2,31m)이 되지요
그리고 180장이 1리(415,8m)이고 30리가 1식(12,474km) 이지요
진시황이 전국을 평정한후 통일한 것 중 하나가 길이.넓이,부피,무게 등의 단위인 도량형(度量衡) 이지요
만약 도량형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지역마다 정보의 편차가 심하고 이는 전국을 통치하는데 혼란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이 길이 였는데 길이를 알아야 영토 넓이를 알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통일적인 도량형을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중앙에서는 전국 표준의 자(尺)인 기준척(基準尺)을 마련하여 늘 보관하고 있었지요
이 기준척은 왕조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았으며 그래서 전쟁이나 반란등으로 수도가 함락될때 빠뜨리지 않고 챙겨가야할 중요한 품목중 하나였어요
물론 이 중요한 기준척이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거리를 측량할때의 단위, 신발을 재는단위, 옷을 재단할때 재는단위 등 분야에 따라 다른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조선시대 때에도 건물을 지을때 사용하던 영조척(營造尺), 포목과 의복 등에 적용되던 포백척(布帛尺) 제사용의 제기와 관련된 조례기척(造禮器尺), 그리고 거리나 면적등을 잴때 사용하던 주척(周尺)등 다양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하는 것은 위에서 등장하는 수가 수량이 아니라 단위 ㅏㄹ느 것이고 단위는 오늘날의 상수개념과 같습니다. 그당시의 상수는 비율상수가 척도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비례계산이나 비율계산이라는 점이다. 수량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늘날 수학상수 20개 물리상수 38개 그리고 중요한 비율 닯은비와 황금비 그리고 공식인 원의 공식과 타원공식 그리고 쌍곡선과 포물선의 관계식으로 풀어야한다.
결국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상수의 개념과 수열 그리고 기하학공식이 이미 수천년전부터 사용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뤄보아 환단문명의 원방각의 역학은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7형도와 7정운천도는 다른 개념입니다.
7형도라는 것은 순수한 수리학적인 개념입니다.
그에 비하여 7정운천도는 수리학물리학의 역학적인 개념을 포함하여 철학적인 개념까지도 포함합니다.
아무튼 워방각의 원리에 의하여 삼한의 도시를 하나의 공동체로 확정하는데 바로 이러한 관점이 지역에 관한 역학적인 관점입니다.
저울대는 는 원방각의 기하학에서 7의 수입니다.
우리한글에서 ㄱ 자 가 수로 하면 7입니다.
가로는 지의 실수 2이고 세로는 지의 허수 2입니다.
가로와 세로가 교차하는 지점이 인의 3입니다.
가로세로 합은 4이고 인은 3이니 합이 7입니다.
ㄱ자가의 수가 7이고 ㄴ자의 수도 7인데 ㄱ자는 허수이고 ㄴ자는 실수입니다.
ㄱ+ㄴ= 14입니다.
우주만물을 원방각의 ㄱ+ ㄴ=14의 수열로 계산하기도 하고...
위와 같이 7형도로 길이와 넓이를 환산하기도 하고
삼한의 나라를 철학적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과정을 원방각의 법칙으로 환산한 것이 7형도이고 7정산입니다.
환웅시대에는 이를 7정운천도라고 규정하였다고 합니다.
7의 상수가 아주 중요합니다.
황금비도 그 수가 7에서 시작합니다.
즉 피보나치의 수열인데
1-1-2-3- 5-8- 13-21- 34- 55-89- 144-233- 377
21의 수가 37일입니다.
7형도란 황금비 피보나치의 아래 수열을 상수로한 것입니다.
58= 21+ 37 58*58= 3364
21수가 일묘연한 알갱이입니다.
황금비 수열에서 8번째의 수열입니다.
결국 7형도란 사실상 21의 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21- 34- 55- 89- 144- 233- 377
7주기 차원 군의 의미
1) 7의 순환주기: 27순환주기 - 142857 -3*9 자연상수
2) 음양오행의 십진법
3) 10!= 7주기
4) 49주기
5) 빛의 분활 : 7+ 73
6) 황금비 37+ 73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
천상열차분야지도
▲ 천상열차분야지도 삭석
1.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는가.
가. 그림 부분태조본 1395 천문도에는 122.5×211×12cm의 오석(烏石)의 가운데에 직경 76.1cm의 원을 그려 육안으로 보이는 1467개의 별, 은하수, 주극원, 적도, 황도, 28수(宿)의 구역과 12궁(宮)이 새겨져 있다.
또 상단 가운데에 직경 약 20cm의 원 둘레를 따라 24절기마다 저녁과 새벽에 남중하는 별자리 절후별혼효중성(節候別昏曉中星) 를 적은 중성기(中星記)가 있다.
나. 글씨 부분가운데 성도의 좌우상하의 바깥쪽에는 십이국분야급성수분도(十二國分野及星宿分度), 일수(日宿), 월수(月宿), 황도십이궁진(黃道十二宮辰), 십이국분야(十二國分野), 이십팔수거극분도(二十八宿去極分度), 천문도지(天文圖志) 등의 제명을 붙이고 춘추시대 12국(國)과 12차(次)의 대응, 별자리의 구역, 태양과 달의 운행궤도, 28수의 거극도(去極度), 천문도 작성의 제작 경위, 제작 연월일 등을 밝히고 있다.다.
언제 관측하고 만들었는가서기 1세기경 북위 40°즉 고구려(高句麗)에서 관측한 하늘의 모습이다.
이는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천문도에 새겨진 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내린 결론이다.
천문도를 각석(刻石)한 시기는 4세기 이후 6·7세기 이전이라고 추정한다.
지금 전하는 천문도는 태조 4년 1395 에 제작되었으며, 태조는 천문도지(天文圖志)에서 천문도의 석본이 옛날 평양성에 있었으며 이를 복각하였다고 말한다.
천문도의 중심인 북극 근처는 한양의 위도인 북위 38°를 나타내므로 14세기 하늘의 모습이며, 그 바깥쪽은 고구리(高句麗)의 위도인 북위 약 40°를 나타내므로 서기 1세기에 관측한 별자리이다(박창범, {한국과학사학회지} 제 20권 제 2호(1998), 송명호 정리)2.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란 무슨 뜻인가.
가. 天象(천상)이란 무슨 뜻인가.天象(천상)이란 하늘의 천문 현상(現象)을 말한다.
안상현은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이며, 천상이란 하늘에 떠 있는 천체를 말하는데, 특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과 은하수를 그렸다고 한다(안상현, 『우리 별자리』 현암사).
안상현의 해석은 첫째, 상(象)과 상(像)의 축자적 의미를 혼동하고 있다.
상(象)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어로 쓰이고, 상(像)은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사물에 쓰인다.
예를 들어 상징(象徵)·구상(具象)·추상(抽象)·현상(現象)·기상(氣象)과 석상(石像)·불상(佛像)·초상(肖像)은 다르게 쓰인다.
천문 현상(現象)과 달리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사진의 현상을 말할 때는 현상(現像)이라고 한다.
'象'과 '像'을 혼용해서 사용할 수 있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이 간행되던 시기나 전국시대까지의 문자생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천문도를 처음 만든 1세기의 고구려(高句麗) 때나 이를 복각한 14세기에는 '象'과 '像'을 거의 혼용하지 않았다.
둘째,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져 있는 직경 76.1cm의 천문도만을 천상열차분야지도라고 간주하고 내린 결론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그림과 글씨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글씨 부분에서 천문현상(天文現象)을 당시의 과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림 부분에서는 육안으로 관측할 수 없는 부분까지 표시되어 있다.
그림 부분 중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1467개의 별과 은하수뿐이다.
적도, 황도, 12궁 또는 28수의 구역설정, 거극도를 고려한 후에 평면상에 그린 별의 위치 등은 육안으로 볼 수 없거나 알 수 없다.
이들은 글씨 부분에 명시한 28수의 거극도, 해와 달의 운행궤도 등과 함께 천문현상이지 하늘의 모습이 아니다.
제자리를 지키는 별과 적도, 황도, 거극도 등을 통해 혼효중성(昏曉中星), 동지, 하지 등의 천문현상과 지상의 위치 등을 다각도로 관측하기 위한 천문도이다.
그러므로 천상(天象)이란 '하늘의 모습'이 아니라 '천문현상(天文現象)'이다.
나. 열차(列次)란 12차(次)나 차례와 무관하다.
'열차(列次)'의 축자적 의미는 하늘의 구역(次)을 나열한 것이다. '열차(列次)'에 관한 해석이 분분하여 이를 고구한다.
박명순은 열차(列次)란 차례로 벌여놓았다는 뜻으로 풀이한다(박명순, {天象列次分野之圖에 대한 考察} 논문, p.5).
'차(次)'란 차례라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머무르는 장소'라는 공간적 개념이다.
춘추전국시대는 국가 전체가 군사동맹체였으며 이들은 군사 주둔지를 次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박명순의 해석은 오역(誤譯)이다. 次에 차례라는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별 또는 별자리에는 차례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상현은 열차(列次)에서 '次'는 하늘의 적도를 세로로 열두 구역으로 나눈 단위다.
그러므로 '열차(列次)'는 '차에 따라 벌려 놓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이는 박명순의 시간 개념을 공간 개념으로 이해하였으므로 진일보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次에 관한 꼼꼼한 천착을 남겼다. 次는 12년쯤 제자리로 돌아오는 목성(歲星)의 위치, 또는 중국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1247)와 천상열차분야지도(기원 1C, 1395 복각)의 기록을 토대로 次는 12次로 보았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글씨부분 십이국분야급성수분도(十二國分野及星宿分度)에서는 천상에서의 12차의 구역과 지상에서의 12국의 분야를 1대 1로 대응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수성지차(壽星之次)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수(軫宿) 12도(度)부터 저수( 宿) 4도(度)까지의 합은 31도(度)이다.
이는 12차(次)로 수성(壽星)에 속하며 12국(國)으로는 정(鄭)나라의 위치에 해당되고 12주(州)로는 연주( 州)에 속하며 12지(支)로는 진(辰)에 해당된다(自軫十二度 至 四度 合三十一度 爲壽星之次 鄭之分野 屬袞州 於辰在辰).
그러므로 천상열분야지도에서 '列次'와 '分野'를 대응시킨다면 '次'는 '12次'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안상현의 해석은 타당하다.
그러나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천문 현상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고정된 위치를 점하는 구체적인 별과 28개의 별자리이다.
진수(軫宿) 12도(度)부터 저수( 宿)까지라는 방식으로 12개의 등각 거리(30°∼31°)로 나눈 추상적 개념인 수성(壽星)의 차(次)가 아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난점이 따른다.다. 분야(分野)와 대응한 열차(列次)는 12차(次)가 아니라 12궁(宮)이다.
순우천문도(1247)와 달리 천상열차분야지도(1395)의 그림 부분에는 12차(次) 대신 12궁(宮)을 표시하였다.
황도 12궁과 12국을 분야하였다(E. 黃道十二宮辰 十二國分野).
12궁은 언제부터 쓰이던 말인지 알 수 없으나 12차는 서기전에 이미 사용하던 말이었다.
반고(班固, 32∼92)는 {漢書} [律曆志]를 쓸 때 12차를 정리하였다.
더구나 반고는 유흠(劉歆 기원전 46∼기원후 23)의 저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천문도를 제작한 기원 1세기에 일반화되어 있는 12차가 아니라 서양 별자리 12궁으로 제명한 까닭은 알 수 없더라도 이를 주목해야 한다.
12국 분야(分野)를 대응시킬 때 12차보다 12궁을 중시했음도 분명하다.
더구나 천문도의 76.1cm의 원 제일 바깥쪽에 12궁과 12국이 같은 칸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야(分野)와 열차(列次)를 관련짓는다면 그림 부분의 12宮이지 글씨 부분의 12次가 아니다.
또한 次를 列한다고 할 때 列은 어떤 형상물을 나열 또는 배열한다는 뜻이라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그림 부분과 관련이 있다. 더구나 글씨 부분은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고칠 수 있으나 그림 부분은 고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천문도지(天文圖志)에서도 그림 부분에서 별의 도수가 차이가 나서 바로잡았다고만 하였다. 만에 하나 오늘날 전하는 조선의 복각본(1395)에 12차 대신 12궁이 그려져 있는 까닭이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고친 탓이라고 가정하자.
아니면 고구리(高句麗)에서 12궁으로 표시하였으며, 조선에서 복각할 때 중국의 순우천문도(1247)와 다르더라도 이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추정해 보자.
어느 경우이든 중국의 천문도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고구리 또는 조선 천문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해야 한다.
이 다름은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구리(高句麗)에서 12차 대신에 굳이 서양별자리 12궁으로 지상의 12국을 분야(分野)한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지리적 정치적 이유를 들 수 있다. 고구리(高句麗)는 중국과 다른 오늘날 그리스 로마 지역과 교류를 하였으며 고구리인(高句麗人)들은 '서양'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나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의 거부를 천문도를 통해서 표명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이들은 중국보다 앞선 시기에 서양 천문학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둘째는 과학적 타당성을 고려하였을지도 모른다. 12차는 28수의 별자리들을 등각의 폭(30°∼31°)으로 맞추려고 재조합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별자리 12궁은 고유의 별자리 이름이다.
예를 들면 '금우궁(金牛宮)'과 '거해궁(巨蟹宮)'은 서양별자리 명으로 '황소자리' '게자리'라는 구체적인 서양 별자리 명이다.
12차보다는 12궁이 알기 쉽고 관측하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천문학자가 아니라서 서양 별자리 12궁이 등각으로 나누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
만약 등각 거리라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별자리를 뚜렷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필자의 수준을 뛰어넘는 천문지식이므로 천문학자의 몫이다.
※ 12궁은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명명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 후 기원 200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로 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원 1세기 반고(班固, 32∼92)가 정리한 12차는 중국 고대 천문학자들이 서역 지방에서 전래된 천문학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정립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는 필자의 조심스러운 추측이며 이 글에서 '서양 별자리'는 중국에서 서쪽 지방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유럽을 명시하는 말이 아니며 필자는 성사(星史)를 모른다.
라. 次는 12宮, 28宿, 日宿, 月宿, 적도, 황도 등의 개념을 포함한다.그렇다면 왜 궁(宮)이라는 별자리로 표시하고 차(次)라는 제명을 붙였는가.
즉 '천상열궁분야지도(天象列宮分野之圖)'라고 하지 않았는가.
次는 공간적 개념이므로 12차만을 뜻한다고 고집하지 않을 때 의문이 풀린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천문현상의 위치확인의 기준은 복합적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그림과 글씨 부분을 통하여 1467개의 별과 별자리, 태양의 운행 궤도 日宿 ], 달의 운행궤도 月宿 , 주극원, 황도, 적도, 은하수 등이 그려져 있다.
이들의 위치를 지상의 위치로 대응시키고 있으나 위치의 판단 기준은 28수, 거극도 등을 통한 유기적 관계망 속에 묶어 놓았다.
유기적 관계망이란 지상에서의 위치 판단이나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의 정확한 측정을 위하여 여러 별자리와 태양과 달의 운행 궤도, 어떤 별이 황도와 적도에서 이격된 거리, 북극에서 별까지를 수직으로 잰 각거리인 거극도(去極度)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하여 종합적 판단을 하도록 구축한 천문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次'는 '28수, 12궁, 월수(月宿), 일수(日宿), 은하수, 적도, 황도 등이 머무르는 위치'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次란 군대의 숙영지이므로 공간의 고정성과 이동성을 모두 확보하는 개념이다.
분야(分野)란 말할 것도 없이 춘추전국시대의 12국과 이들의 위치를 뜻한다.
마.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란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란 천문현상(天文現象)을 관측하기 위하여 28수(宿), 12궁(宮), 적도, 황도 등으로 나타내고 춘추전국시대의 지명과 대응시켜 만든 천문도(天文圖)이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하늘의 형상을 차례에 입각해 분류해놓은 그림'이란 뜻으로 조선 태조 4년(1359)에 제작되었다. 이성계는 우연히 입수하게 된 고구려 '천상열차분야지도' 탁본을 천문학자 류방택으로 하여금 새로 제작하게 하였던 바, 이것으로써 계천입극(繼天立極)의 천명론을 내세워 이반된 고려의 민심을 무마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1.2x2m/국보 228호)
태조본 1395 천문도에는 122.5×211×12cm의 오석(烏石)의 가운데에 직경 76.1cm의 원을 그려 육안으로 보이는 1467개의 별, 은하수, 주극원, 적도, 황도, 28수(宿)의 구역과 12궁(宮)이 새겨져 있다. 또 상단 가운데에 직경 약 20cm의 원 둘레를 따라 24절기마다 저녁과 새벽에 남중하는 별자리 절후별혼효중성(節候別昏曉中星) 를 적은 중성기(中星記)가 있다.
기원 전 3,000년 경에정확하게 하늘을 관찰하여 고인돌에 천문도를 새긴 우리 선조의 과학 기술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천상 열차 분야 지도(天象 列次 分野 之圖)'로 이어진다.
천상열차분야의 '천상天象'은 하늘의 형체이고,'열차(列次)'는 황도 부근을 12지역으로 나눈 12차이며, '분야(分野)'는 이에 대응하는 지상의 지역이다. 곧 천상열차분야지도는천상도, 열차도, 분야도라는 세 지도를 합친 지도를 뜻한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는 고구려 말기, 당나라 군이 쳐들어온 672년에 대동강 물에 빠뜨렸는데, 다행히 그 전에 제작해둔 탁본 한 장이 조선 초에 발견되었다.
이덕일 박사는 당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석각본을 수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천문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독자적인 천하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당나라가 석각 천문도를 수장한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본 것이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는 오래된 천문도 중의 하나이다.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인 전천 천문도의 역사는 삼가 성도에서 비롯되지만, 이 천문도는 현존하지 않으며, 그 역사적 실존 여부도 불확실하다. 다만, 그 별에 대한 정보는 당나라 때, '보천가'라는 책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281좌 1,445개에 달하는 동아시아 별자리의 표준이 되었다.
[보천가]
그러나 이것은 천문도로 그린 것이 아니며, 본격적인 전천 천문도로 1,247년에 만든 중국 소주의 '순우 천문도'가 있지만, 이것은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보다 무려 9세기나 늦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계절별 별자리 엄밀하게 정의되는 용어는 아니지만 특정한 계절 밤 9시경 남쪽 하늘에서 잘 보이는 별자리들을 계절별 별자리라고 한다. 별자리를 찾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성군들로는 봄철대곡선, 여름철대삼각형, 가을철대사각형, 겨울철대삼각형이 있다.
소주천문도와 비교
중국 소주(蘇州)시 문묘(공자묘)에는 남송시대(1127~1279)의 귀중본 비각이 전시돼 있다. 네 개의 비각 중에서 현재‘천문도’와 ‘지리도’, ‘제왕소운도’ 세 개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지리도 아래 이 비각들을 만든 시기와 유래가 적혀있다.
지리도아래에는 원래 1190년 황상(黃裳)이 그린 것을 순우 정미(丁未, 1247)년 왕치원(王致遠)이 사천에서 얻어 돌에 새겼다고 기록돼 있다. 천문도는 ‘소주천문도(蘇州天文圖)’ 또는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로 불리며 1247년 완성됐다. 소주천문도에는중국에서 볼 수 있는 사계절 별이 모두 새겨져 있으며, 이는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천문도이다
소주천문도에는 1,443개의 별이 동양의 전통방식인3원 28수 별자리 체계로 그려져 있다.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 천문도, 소주천문도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첫째로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소주천문도는 차이의 골자는 그 중심부에 있다.
우리의 전통 천문도는 그 중심세계가 ‘북극3성- 북두칠성’이고 중국 전통의 천문도는 그 중심세계가 ‘북극5성- 사보四輔4성’ 이다.
말하자면 고조선의 천문도는 우주의 중심세계를 ‘북극 3성과 북두칠성’ 으로 보는 것이고,
지나인들은 그 중심세계를 ‘북극5성과 사보4성’ 으로 보고 있다.
둘째로 전체 별의 수에서 차이가 나는데
소주천문도도 별의 수가 1443인데 비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467개이어서 24개가 차이가 난다.
천문학이란 초고대에서부터 발달한 학문인데 매우 수리물리학적이고 과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초고대사회가 양육깅식으로 변하면서 천문학은 점차 점성술로 변질되었습니다.
즉 초고대의 천문학은 별의 움직임을 기하학으로 공식화한 것이고 이는 곧 지구상의 기상변화를 예측하고 과학적으로 수량화는 기초적인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인 학문이 수비주의적인 궤변자들의 극성으로 점성수로 변질이 되고 이데올로기로 범벅이됩니다. 현재의 전래된 주역팔괘라든가 음양오행론은 대표적인 점성술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전개과정에 대하여 전혀 알지못하는 현대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외국의 지식을 암송하여 박사학위를 따는 현실이기에 우리의 역사를 알리가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환단 문명에서 정립된 천문학을 알리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으로 마련된 이른비 칠정산내외편의 천문학적인 의미를 잘못알고 엉뚱한 해석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왜곡된 것이 7정산내외편이라고 하는 개념규정부터 왜곡되어 있습니다. 7정산이라는 개념이 뭔가에 대한 해석부터 자의적이고 틀린다는 것입니다.
7정산의 7의 개념을 모든 전문가들이 해와 달 그리고 태양의 5행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합니다.
이는 엄청난 왜곡이고 잘못된 해석입니다.
7정산이라는 의미는 지구의 공전주기에 의하여 우주의 별자리와 시간계산을 하는 것을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태양과 달과 수금 목금토성의 행성운행의 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곡해합니다.
7정산이란 24절기운동계산을 하는 것인데... 어찌 태양행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왜곡하는지...
7정산이란 지구의 공전과 자전과 달의 공전과저 자전주기를 7원의 운동과정으로 파악하고 계산하는 것을의미합니다.
이러한 계산에 의하여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24절기로 정확하게 관측되고 계산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바로 잡야야합니다.
7정산의 천문학적인 계보는 다음과같습니다.
천문학의 시조격은 자부선생이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 의하면 환웅시대의 발귀리의 후손인 자부선생이 칠정운천도를 정립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칠성력의 시조라고 합니다.
이 칠성력은 주천력을 거치면서 주비산경의 7형도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7정산이란 개념은 바로 주비산경의 7형도입니다.
그렇다면 7형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7형도를 달과 태양의 관계로 환산사는 것을 내적인 7형도라고하고 전체 우주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을 외적인 7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정산내편은 지구의 공전과정에서 24절기의 지점을 환산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7형도의 구분을 함으로써 24절기의 지점을 확정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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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인터넷을 통해서 천편일률적으로 해서살하고 소개하고 있는 것 내용입니다.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조선전기 문신·천문학자 이순지와 김담이 세종대왕의 왕명으로 원나라의 수시력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여 1444년에 편찬한 역법서. 3책. 활자본.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에 대한 해설서이다.
칠정(七政)이란 일·월과 오성(五星), 즉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5개 행성(行星)을 가리킨 것으로, 이 해설서에서는 이들 천체의 운행에 관한 자료가 다루어져 있다.
세종은 1423년 우선 학자들에게 선명력(宣明曆)·수시력(授時曆)·보교회(步交會)·보중성역요(步中星曆要) 등의 역법(曆法)의 차이점을 비교, 교정시켰다.
이어 1432년 예문관제학 정인지(鄭麟趾)·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 등에게 명나라의 『칠정추보(七政推步)』·『대통통궤 大統通軌』·『태양통궤(太陽通軌)』·『태음통궤(太陰通軌)』 등의 서적을 연구하여 수시력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칠정산내편』의 내용은 권두에 여러 천문상수(天文常數), 즉 천행제율(天行諸率)·일행제율(日行諸率)·일월식(日月食)의 여러 상수가 실리고, 다음에 역일(曆日)·태양·태음·중성(中星)·교식(交食)·오성(五星)·사여성(四餘星)의 7개의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말에 한양을 기준으로 한 이지(二至), 즉 동지(冬至)와 하지(夏至) 후의 일출몰(日出沒) 시각과 밤낮의 길이를 나타낸 표가 실려 있고, 각 장에 필요한 곳에는 입성(立成)이라고 부르는 여러 가지 수표(數表)가 들어 있다. 일월오성의 운행을 다룬 것으로 보면 이 역서는 단순한 달력이 아니라 오늘날의 천체력(天體曆)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일행제율의 항에서 보면, 세주(歲周, 1년의 길이)=365일 2,425분으로 되어 있고 1일=10, 000분(分)=100각(刻) 1각(刻)=100분(分) 의 십진법(十進法)이 쓰인 것으로 보면, 1년의 길이가 현재 실시하고 있는 그레고리(Gregory)태양력과 같은 365.2425일이고, 1분은 현행 8.64초와 같았음을 알 수가 있다.
서양과 다른 점의 하나는 하늘의 한바퀴인 주천도(周天度), 즉 원주의 각도를 360°가 아니라 365°25′75″로 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태양이 하늘을 한바퀴 도는 일수를 그대로 도(度)·분(分)·초(秒)로 나타낸 것으로 각 도에서도 십진법으로, 1도=100분, 1분=100초 로 하고 있는 데 유래한다.
여기 1도는 오늘날의 0.9756°에 해당한다. 끝의 대목에 있는 사여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별이 아니다. 이들은 어느 특정한 위치의 규칙적인 변동, 또는 규칙적으로 운행한다고 본 가상적인 천체의 이동을 생각하여, 마치 별의 운행처럼 보고 이를 복술가(卜術家)의 추산의 근거로 쓴 것 같다.
사여성의 이름은 자기(紫氣)·월패(月孛)·나후(羅睺)·계도(計都)인데, 『칠정산내편』에 의하면 이들은 각각 28년, 8년 10개월, 18년 7개월로 하늘을 한바퀴 돈다. 이 중 나후와 계도는 태양이나 달과는 반대로 돌고 있는데 이 둘은 본래 중국에는 없었던 것으로, 인도에서 온 범어(梵語)의 Rahu와 Ketu에 유래한다.
중국에서는 이 둘을 보이지 않는 별(二隱星)이라고 하여 나계(羅計)로 총칭하였고, 일월오성은 칠요(七曜), 여기에 나계 둘을 합하여 구요(九曜), 또 자기와 월패를 더하여 십일요(十一曜)로 불렀다.
칠요양재결(七曜攘災決)에는 나후를 일명 식두신(蝕頭神), 계도를 일명 식미신(蝕尾神)으로 하였는데, 하늘을 도는 주기와 일월식이 관련되는 데서 미루어 이들은 황도(黃道)와 백도(白道)의 두 교점으로 추정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5책. 활자본. 왕명에 따라 서역(西域)의 회회력법(回回曆法)을 연구하여 해설, 편찬한 책이다.
원나라는 이 회회력 이외도 중국력을 크게 개량한 『수시력 授時曆』을 만들었으며, 당시 중국에는 계통이 다른 두가지의 역법이 시행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회회력을 해설한 『칠정산외편』은 수시력을 해설한 『칠정산내편』과는 그 계통이나 방법에 큰 차이가 있다.
『칠정산외편』은 각 도의 단위는 그리스의 전통을 따라 오늘날처럼 원주를 360°로 하여 60진법(進法)이 쓰이고 있다. 또 1태양년(太陽年)의 길이는 역일(曆日)로 365일로 하되 128태양년에 31윤일(閏日)을 두고 있으므로, 128태양년=(365×128+31)일 따라서, 1태양년={{%269}}(365×128+31)일 =365{{%269}}일 =365.242188일 =365일 5시 48분 45초 로 현대값보다 1초 짧을 뿐이다.
이 값은 수시력의 값 365.2425일보다 두 자리나 더 정확한 것이다. 그런데 아라비아는 순전한 음력을 쓰고 있기 때문에 태음년(太陰年=354.36667일)을 태양년 대신에 쓰고 있어서, 그들이 만든 표의 간격이 태음년으로 되어 계산이 복잡하여진다. 왜냐하면, 아무리 음력을 쓰더라도 역계산에는 계절이 순환하는 주기인 태양년이 기준이 되어야 실용성(농업)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다른 점은 1년의 기준이 동지가 아니라 춘분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 역(曆)의 계산이 중요시되어 동지를 연초로 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천문학에서는 역일(曆日)보다도 천체의 경도, 즉 적경(赤經)이나 황경(黃經)의 기점인 춘분점(春分點)이 중요시된 데서 연유하는 것 같다. 『칠정산외편』의 내용은 태양·태음·교식(交食)·오성(五星)·태음오성능범(太陰五星凌犯)의 5장으로 되어 있고, 필요한 곳에 여러 가지 표, 즉 입성(立成)도 실려 있다. 능범이란 달이 다른 천체(여기서는 5개 행성)를 가리는 현상을 말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칠정산내외편의 진실
세종대왕에 의하여 마련된 ≪칠정산내외편≫의 역학적인 의미와 그 본적질적인 특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에 대한 평가 역시 환단문명의 다른 유물과 마찬가지로 왜곡되게 평가합니다.
칠정산의 개념부터 잘못 해석합니다.
심히 통탄할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천문학을 담당하는 천문학자들의 잘못된 해석에 기안합니다.
간단하게 알아봅시다.
질성산 내외편이란 무엇인가?
천편일률적으로 아래와같이 합니다.
워키백과에 의하면
《칠정산》(七政算)은 운동하는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서술한 역서이다. 《칠정산》에서 서술하는 천체는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이다.
칠정산 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과 명(明)나라의 『태음통궤(太陰通軌)』 및 『태양통궤(太陽通軌)』를 참고로 하여 수시력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고 있다.
『칠정산』 외편은 태음력법인 회회력(回回曆)을 참고하여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천문 계산에 필요한 상수들과 수표 및 계산 방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일식과 월식의 예보와 행성의 운동에 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비록 미신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계산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과학적이다
수많은 전문가 학자들도 위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못하고 인터넷에 떠다니는 해설도 대부분이 이를 근간으로 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칠정산내외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매우 일천하고 수준이 낮은 결과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칠정산내외편의 성격을 위와같이 규정하게된 근거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그에 연구는 1970년대에 이르러 이은성·유경로·현정준 세 천문학자에 의하여 시작된 것인데 이들의 해석에 대한 반박이 지금까지 없는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