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5
1월19일[연중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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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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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QKWWQDhQ-M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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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추구하셨던 원형 교회는 일종의 노상(路上) 교회, 광야 교회, 이동 교회였습니다!>
공생활 절정기에 도달한 예수님과 제자단의 모습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장 서시면, 제자들이 그 뒤를 따랐고, 제자들 뒤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구름 관중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와 운집해있었습니다.
꿀보다 더 달고 천연암반수보다 더 시원한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감동받은 군중은 박수를 치고, 그 자리에서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사를 지니고 계심을 알게 된 병자들이 몰려와 어떻게든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계속 밀려들었습니다. 밀려드는 사람들의 질서를 잡는 일은 제자들의 주된 임무가 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보인 특별한 행동 방식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안주하거나 정착하지 않는 순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초대형 성전을 짓지 건립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성전 건립을 위한 모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물 만큼 머물렀다고 여겨지면 지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선포해야겠기에,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즉시 떠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추구했던 원형 교회는 일종의 노상(路上) 교회, 광야 교회, 이동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입니다. 견고하고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교회,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 아무런 걱정이 없는 교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문 꽁꽁 닫아건 교회, 세상의 고통 앞에서도 절대로 꿈쩍하지 않는 교회...
예수님께서 건설하고자 하셨던 참된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진정한 교회는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순간까지 쉼 없이 걸어가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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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축복의 통로, 옆구리>
사제의 역할은 신자들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고 또 하느님의 축복을 신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사제가 제물을 바치고 또 축복을 전해주고 하는 것이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옆구리를 통해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꼴찌를 하다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경북대 총장까지 역임한 박찬석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 前 경북대 총장 박찬석 -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주는 방식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 1호를 잡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멜키체덱의 대를 잇는 대사제로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방식 또한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사제로서 속죄제물인 당신의 피를 들고 주님의 성소인 하느님 앞에서 우리 죗값으로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피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뽑아내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하와에게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갈비뼈가 축복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피와 물로 태어났습니다. 피와 물은 성사를 의미하는데 우리는 모두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태어난 그리스도의 하와들인 것입니다.
옆구리를 찢어 갈비뼈를 빼 내든 피와 물을 빼 내든 그 모든 행위는 바로 참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그 통로로 우리를 당신 안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에 문을 옆으로 내어서 그 밖으로 성령으로 상징되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 그 비둘기를 받아들이는 땅이 축복을 받게 했던 상징적인 행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통로는 바로 교회로 상징되는 짐승들이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축복과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옆구리를 뚫어 하느님의 축복이 인간에게, 또 인간이 그 통로를 통하여 그분 심장에 계시는 하느님께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멜키체덱처럼 빵과 포도주만을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당신 생명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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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아름답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로는 '미(美)'라고 합니다. 미는 양(羊)과 대(大)의 합성어입니다. ‘큰 양이 맛있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라는 말에는 맛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Beauty'라고 합니다. 영어의 아름다움은 그 어원이 사람의 이름에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아름다움은 여성의 외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아름과 답다의 합성어입니다. 아름은 ‘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답다는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자신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맛’이나 ‘멋’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기준은 ‘품격’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품격을 드러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난향천리 덕향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품격은 덕으로 드러납니다. 덕의 아름다움은 만리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 수오지심을 가진 사람, 사양지심을 가진 사람, 시비지심을 가진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외모나 언변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그가 입은 제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면 사제가 사제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복음을 전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병자를 고쳐주는데서 시작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교회를 박해했지만 회개했던 바오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사제들이 있습니다.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땀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명예, 권력, 재물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아름다움은 신앙생활의 연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면 신자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아름다운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름답습니다. 재산의 반을 나누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아름답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갔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믿음을 보여주었던 백인대장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꽃동네의 시작이 되었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한센인들의 치료해 준 강대건 원장님은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요셉의원을 시작한 선우경식 원장님도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신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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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7-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제는 갈릴래아에서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악마들도 “믿고 무서워 떱니다.”(야고 2,19)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다.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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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거리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7-12)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뒤에,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마르 1,28) 그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대부분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라는 말과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서로 밀쳐 대고 다투었음을 나타냅니다.
뒤의 6장에,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치유되는 일이 일어났고, 그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더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우리는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도,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또 바오로 사도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우리가 어떤 성물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참 신앙과 미신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군중에게서 조금 뒤로 물러나십니다. 일종의 ‘거리두기’를 실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거리두기’를 실행하신 것은, 1) 무질서와 혼란을 바로잡고 한 사람씩 차례대로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2)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3) 사람들이 미신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지려고 서로 밀쳐 대고 서로 다투는 상황이 되면, 힘없는 사람은 옆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은총을 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거리두기’를 실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다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5,5-7)
‘벳자타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아마도 그 못에서 가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못 가에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고,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렸는데, 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남들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려고 서로 다투고, 서로 밀쳐 댄 것으로 보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는’ 병자는 아마도 기어갔을 텐데, 항상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은 사랑은 없고 이기심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쩌면 ‘몸의 병’보다 그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영혼의 병’이 더 심각한 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남들보다 먼저’ 만지려고 서로 밀쳐 댄 사람들도 남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심에 빠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보다 영혼을 먼저 고치려고 ‘거리두기’를 실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사람들이 몰려들더라도 병 고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함께하셨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실 때에도, 가르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 고치는 일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 밀쳐 대고 다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리두기’를 실행하셨습니다.
또 당신의 옷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깨우쳐 주기 위해서 ‘거리두기’를 실행하셨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의 간절한 심정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도 누구든지 그런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하다고 해서 이기심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우리는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몸의 치유는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지르는 것은 신앙고백도 아니고 복종하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를 금하십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 아는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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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입니다. 갈릴래아는 호수의 이름이자 호수가 속한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지역으로 보면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으며 남쪽에는 유다 지역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지역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 도시가 속한 유다 지역, 이스라엘의 최남단인 이두매아,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은 동쪽의 경계를 나타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티로와 시돈은 갈릴래아보다 더 북쪽에 있는, 당시에는 페니키아에, 지금은 레바논에 속하는 도시입니다. 도시와 지역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갈릴래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전 지역에, 더 나아가 다른 나라들에도 퍼져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통하여 마르코 복음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악령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외칩니다. 악령의 외침은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그분께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악령의 외침은 진정한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가르침과 업적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드러나는 신비를 통하여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입니다. 믿음은 알고 고백하며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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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이희진 빈첸시오 신부님]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온갖 비난을 받는 일도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칭찬을 받아 자신을 망각하는 때도 있죠.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상황은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예수님 곁으로 몰려듭니다. 그래서 그분을 서로 밀쳐대려고 하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서로 예수님께 은총과 축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명성에 이용하려고도, 어떤 이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어떤 이는 육체적, 물질적 이득을 취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이리저리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발견됩니다.
성당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수도자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제라는 이름으로 신앙인의 삶을 흔들어 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서 떨어져 서 계십니다.
그들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당신을 흔드는 것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서 떨어져 당신의 삶이 오직 하느님의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군중 속의 고독이 아버지 하느님 앞에 겸손하신 그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흔들어 대고 올려주고 추겨주면 자신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잊고 자신의 능력에 도취하여 착각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주님은 당신의 말 없는 겸손으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것이고, 나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이며, 나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 되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 이름이 아니라면 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저의 부끄러운 교만을 살피시고 용서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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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아>
마르코 3,7-12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들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사람을 보고
사람이 사람에게 보인다네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람아
무엇을 보고
무엇에게 보이는가
사람아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사람을 알고
사람이 사람에게 알려진다네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람아
무엇을 알고
무엇에게 알려지는가
사람아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사람을 끌고
사람이 사람에게 끌린다네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람아
무엇을 끌고
무엇에게 끌리는가
사람아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사람을 모으고
사람이 사람에게 모인다네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람아
무엇을 모으고
무엇에게 모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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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꿀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됩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악령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서 아부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 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행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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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극장에 간 지가 거의 8~9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상영 전에 먼저 나왔던 영상이 떠올려집니다. 대한 뉴스? 아닙니다. 광고? 이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 영상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화재 시 대피요령’입니다. 현재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곳의 비상구는 어디에 있는지, 만약 불이 난다면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8~9년 전, 그래도 영화를 종종 봤을 때 계속 나왔던 ‘화재 시 대피요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 대피요령 영상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습니다. 영화 시작 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옆에 앉은 사람들과 잡담하는 데 더 집중했었습니다. 하긴 극장에 온 것은 ‘화재 시 대피요령’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러온 것이니까요. 그러나 종종 안전사고로 인해서 인명 피해를 보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화재 시 대피요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사람만이 후회를 줄이면서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순간의 만족만을 찾으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 바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말이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한 진리이고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귀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을까요? 그들이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어도,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순간에 그의 모든 말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더러운 입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진실만을 내뱉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삶의 방향을 찾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오롯이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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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 내가 주님께 가는 이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오늘 주님과 제자들은 호숫가로 물러가시는데 사람들은 그 주님께 몰려가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은 왜 물러가시고 물러가시는 그 주님께 사람들은 왜 몰려가는지 자연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 몰려가는 사람들의 짓은 요즘 문제시하는 스토커의 짓이 아닐까요? 사람들을 피해 가시는데 굳이 거기까지 주님을 쫓아가 괴롭히니 말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과 제자들은 사람들을 피해 외딴곳으로 자주 가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것도 실은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와 쉬러 갔는데 그 외딴곳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쉬지도 못하고 가르치시고 치유해주신 끝에 굶주린 그들을 먹이신 사건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행위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스토커의 짓이 되겠지만 그러나 주님께는 스토커의 행위가 아닙니다.
스토커가 되는 것은 스토커의 행위에 달린 것 같지만 실은 그 짓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리기 때문입니다.
싫다고 하는데도 들이대면 스토커가 되는 것이기에 내가 싫다고 하지 않으면 그는 스토커가 아니 되겠지요.
사랑하는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아기는 스토커가 아니듯 주님께서는 당신이 쉬시려고 하다가도 사람들이 몰려오면 즉시 쉼의 Mode(상태)에서 사랑 Mode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사랑 충만한 사람의 신기함입니다. 사랑이 바닥나 충전하러 간 사람은 그러지 못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즉시 사랑 상태로 Mode 전환이 가능합니다.
이런 주님을 보면서 저는 자주 사랑이 고갈되고 그래서 저를 찾는 사람을 스토커로 만드는 저의 사랑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한편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충전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자주 실패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갈되면 즉시 주님께 달려가지 않아 실패하기도 하고, 혹 주님께 가더라도 주님 사랑 안에 진득하니 푹 잠겨서 있지 않고 이내 딴짓을 하는 겁니다.
적합한 예일지 모르지만, 목욕탕에 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잠그고 있지 못하고, 이내 때를 닦는다든지 손톱을 깎는다든지 하여 피로를 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충전에서 저의 실패 그러니까 저의 딴짓이란 주님께로 가서는 직전의 일들을 생각한다든지, 앞일을 생각하며 걱정하거나 계획을 세운다든지 그런 짓을 하기도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실패는 관상 기도를 하지 않고 청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고는 즉시 청원 기도를 하는 거지요. 오늘 주님께 몰려든 사람들 대부분이 병자들인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오늘 저도 제가 주님께 가는 이유를 성찰합니다. 나의 병 때문에만 주님께 가는 나는 아닌지, 또는 나의 병이 아니라 이웃의 병 때문에 갈지라도 주님 사랑 때문에 가지 않고 병 때문에만 가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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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에게 입이 있는 까닭은>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더러운 영들이 주님더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입을 다물라 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더러운 영들이 주님더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과시일까요, 믿음의 고백일까요? 그 답은 뻔합니다. 믿음의 고백이라면 더러운 영이 아니고 깨끗한 영이겠지요.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어찌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더러운 영도 능력은 영적인 능력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이고, 영적인 능력을 갖췄기에 신성을 알아보는 것이니, 그것을 뭐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좋은 것으로 착각할 필요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대단한 것이지 영적인 능력이 대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볼 뿐 사랑치 않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것이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그들에게 하늘이 다가오는 것은 축복이나 구원이 아니라 재앙이고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주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역시 좋게 이해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는 비굴하고도 교활한 양동작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 앞에 온 것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와 온 것이 아니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진정한 승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곳에 오지 않으셨으면 자기가 찾아갈 리가 없지요. 자기를 쫓아내려 오신 주님을 마지못해 마중 나온 것일 뿐입니다.
무릎 꿇은 것도 더 힘센 분 앞에 왔으니 그 힘에 굴복한 것이기도 하고, 거짓 복종으로 주님의 준엄한 명령을 피해볼 속셈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을 공격합니다. 당신의 정체를 내가 아니 나를 가혹하게 쫓아내시면 당신의 정체를 사람들이 다 알도록 까발리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삶을 철저히 사시려는 주님께서 자기를 내쫓으시면 자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들추어내겠다고 협박하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악령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또 저렇게 해보라고 하며 이미 주님을 공격했던 수법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 입 다물라고 일갈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갈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지식을 자랑하려거든 그 입 다물라! 공갈 협박이나 하려는 그 입은 다물라! 너희가 입이 있음은 믿음을 고백하라고 있는 것이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있는 것임을 알아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진정 우리의 구원자로 체험하였다면 복음에서 치유 받은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하느님께는 영광 찬미 드리고 이웃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라고 우리의 입이 있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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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산(山)처럼 -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잠을 깨 ‘자비의 집’ 숙소 문밖을 나서면 맨 먼저 눈을 들어 바라보는 불암산과 북두칠성입니다. 불암산 기슭에 있는 제 사랑하는 요셉수도원입니다. 제 침실 창밖에는 불암산 정상이, 식당 창밖에는 불암산 기슭이, 집무실 창밖에는 불암산 봉우리의 동생 같은 ‘애기봉’이 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을 상징하는 늘 거기 그 자리의 산이요, 이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입니다. 오래 전에 써 놓은,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짧은 세 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작詩作의 가장 많은 소재가 된 불암산입니다.
-1.
“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2.
“산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등을 기대거나
바라보면서
늘 거기
그 자리에 평화롭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1997.10.4.
-3.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 1998.1.27. -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 정주의 산 같은 분이십니다. 얼마전 남편의 강력한 권유로 피정을 하고 떠난 자매와의 면담 고백 상담 시 들은 말이 생생합니다.
“아, 여기 수도원은 진짜로 가득 차 있어요. 텅빈 배밭 같은데, 또 성전에 들어와도 주변 모두도 진짜로 가득하여 있고, 주변의 겨울 환경 색깔도 수수하고 순수하기가 진짜입니다.”
이어지는 이 자매가 남기고 간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나뭇가지마다 구슬이 가득 걸려 있더군요. 밤새 비가 와서 맺힌 것입니다. 구슬, 눈물, 저런 아픔이 있기에 나무가 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수도원은 고요하고 배나무는 말이 없고 새들은 지저귀고 시간은 충만한데 도대체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무엇으로 가득한가, 도대체 가득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가득한가 생각했답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조금 길이 보입니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묻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겠습니다. 불순한 피정자에게도 기회를 주신 주님께 영광드리옵니다. 고맙습니다. 2023.1.15. Agnes”-
나뭇가지에 달린 빗방울을 구슬로 눈물로 본 감성이 참 신선합니다. 더불어 언젠가 가을 이른 아침 풀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을 보며 쓴 ‘별꿈’이란 자작시와 자주 산책 때 부르는 ‘아침이슬’ 노래 중 참 곱고 아름다운 대목이 생각납니다.
4.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미소를 배운다.”
텅빈 허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피정 자매님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할 때 이런 충만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행복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은 명실공히 예수님 활약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중심이 되시어 당신께 가까이 오는 모든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면 엎드려 소리쳐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최상, 최고로 보호되는 우리삶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복음 장면에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과 함께 하되 때로 외딴곳을 꼭 찾으셨고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다는 것이니 몇 대목을 소개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적절한 때 조용히 뒤로 물러가는 것도 분별의 지혜입니다.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에게 이르셨다.’
열광하는 대중을 얼마나 경계하셨는지 깨닫습니다. 사실 호산나 노래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똑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고 죽였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는데 이런 민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대중의 인기에 현혹됨이 없이 늘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습니다. 마침 예전에 썼던 ‘사랑은’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5.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 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 되는 사랑이다”-1997.3.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셨기에, 늘 이탈의 초연한 삶에 초월과 내재, 관상과 활동의 삶을 동시에 사시며 늘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읽은 두 글귀가 생각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남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참 많이 강조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선택과 훈련, 습관의 강조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타고난 것들, 주어진 것들에 마음 뺏기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날마다 용감히 지혜롭게 참 좋은 주님을 선택하여, 즉 주님의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평화를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함으로 날로 주님을 닮아가자는 것입니다.
절로 주변 환경은 변화되고 나는 부단한 자아초월로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고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주님을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자 초월과 내재의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날로 자유로워지는 우리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 정주의 산처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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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
'나는 알아보고 있는가?'
오늘 복음(마르3,7-12)은 '군중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호숫가로 모여드는 말씀'입니다. 그런 큰 무리를 이룬 군중 안에 더러운 영들도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이 더러운 영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더러운 영들도 알아보는 하느님을 나는 알아보고 있는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0,20)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더러운 영들도 알아보는 예수님을 나는 알아보고 있는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와의 결정적 만남을 통해 완전한 회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이후부터 자매인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프란치스코는 두 가지 병, 곧 위장병과 눈병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육화의 겸손과 십자가 수난 사랑에 동참하기 위해서 잦은 단식을 했기 때문이고, 온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난 기쁨의 눈물과 회개의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 앞에서 기뻐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피조물의 찬가인 태양의 찬가'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 숨어계신 창조주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피조물을 대할 때마다 하느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7,25)
우리를 위해 늘 살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가까이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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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Zix9kMtNq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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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마르 3, 12)
먼저 깊어지는
우리들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애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들이
서로를 찌르는
날카로운
아픔이 됩니다.
다 솓아낸다고
다 풀리지 않듯
먼저 침묵을 통해
가장 중요한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참된 고백은
참된 영혼을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대화를
원하십니다.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소음 속에서는
단어조차
분간하기
힘듭니다.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빈 시간을
마련합니다.
말이 많을수록
점점 멀어지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참된 말은
쓰다듬을수록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편안해지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마음과 마음의
기쁨입니다.
소멸할 수 없는
예수님과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고백이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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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은 필요에 따라 불렸다가 필요 없을 때엔 버려지는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도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희망을 보게 하는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어둠은 사람들 안에 있는 어둠과 더욱 밀착될 뿐입니다. 분산된 마음이 또 사람들을 향할 때는 미궁과 미로 속을 반복하며 헤매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함께 해야 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구원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본질인 일치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경계심과 두려움 없는 고백이 되게 하는 건 먼저 하느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삶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로를 살게 하는 건 기도 속에서 빚어지는 고요와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올려지는 참된 신앙고백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기도를 통한 침묵은 우리의 어둠을 깨끗한 신앙으로 변화시킴을 믿습니다. 새로이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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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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