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1월 21일 오후 여덟 시, 서울시 마포구 용강동-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랑 곱창 하나요.”
“오랜만이구먼, 총각. 이제 아버지 속 그만 썩이는 겨?”
‘네, 이제 마음잡았습니다.“
근처에서 일행과 합류한 백무현이 칠순이 넘은 돼지곱창집 주인 할머니에게 반갑게 응수했다. 사업상이나 프라이버시의 이유로 가급적 폐쇄된 고급식당을 주로 이용하는 삼영그룹 수뇌부가 흔치 않게 이용하는 오픈된 장소가 바로 용강동의 돼지껍데기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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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양은 술 마실 줄 아나?”
이희광이 술을 극구 사양한 탓에 대작할 사람이 같이 온 임수정밖에 없는 무현으로서는 상대가 거절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 네.”
영은에게 제법 당돌하게 굴었던 때와 달리,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지닌 상대 앞에서 수정은 한 마리 양으로 전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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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마치고, 그 다음 계획 세워둔 바가 있나?”
영은에 의해 앞날이 결정되다시피 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일이 창창하게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계모의 생각을 돌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사내의 인정을 받는 것 또한 수정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저는..영국 학교를 졸업해도 삼영의 그늘로 안주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지? 비록 계모라 한들 영은이가 세게 밀어주면 미래 회장 자리도 꿈은 아닐 텐데.”
“그래서 싫다는 겁니다. 저한테 그렇게 커다란 가족이 있어서 회장 자리를 꿰찬다면, 다른 능력 있는 인재의 자리를 빼앗는 거고, 또 로열패밀리가 아니면 회장이 못 된다는 법칙을 또 한 번 증명하는 게 되니까요.”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갈수록 수정은 점점 담대해져만 갔다. 수정의 말에 무현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인데? 맞는 말이야. 어찌 보면 그건 악습이지. 그럼, 지원하고자 하는 분야가 따로 있나? 빽은 차치하고서라도, 드러나지 않게 지원사격은 해 줄 용의가 있지.”
어둠의 그림자가 세 사람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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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 수상한 그림자가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 희광은 냅다 발로 괴한을 걷어찼다. 한차례 벌러덩 넘어진 그림자..다시 일어난 사내의 손에 회칼이 들려 있었다.
“만식이, 이 새끼!”
희광이 고함을 지르며 단도를 꺼내 달려들었다. 칼을 매개로 한 두 싸움닭의 혈투..삼십 초의 시간이 흐르고 승부는 희광의 애매한 판정승으로 끝이 났다. 목울대에 칼이 꽂힌 남자를 노려보는 희광의 왼쪽 가슴과 다리에 선혈이 낭자했다.
“아저씨..괜찮아요?”
수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상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점차 목숨이 사그라들어 가는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수상쩍은 생각에 희광이 남자의 옷깃을 확 들추었다. 손목의 맥박 측정기와 연결된 크레모아 조끼가 남자의 복부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비켜!”
희광의 등 뒤에서 벼락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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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지축을 흔드는 굉음..그 직후 일어난 일은 그 주변에 있는 누구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크레모아가 터지며 발출한 수백 개의 쇠구슬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백무현이 십여 미터 뒤로 날아감과 동시에, 나머지 파편이 사방을 휩쓸기 직전 공중에서 그냥 멈춰버린 것이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에이전트의 총탄을 손을 내뻗어 정지시킨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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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수정은 그러나, 폭탄의 희생자는 안중에도 없는 채로 피를 흘리며 누운 희광을 부둥켜안고 울어댔다.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위로조로 앰뷸런스를 불렀다며 안심하라는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쩝..”
수정의 어깨에서 손을 뗀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구멍 숭숭 뚫린 양복을 내려다보는 무현의 눈동자가 허여멀건 백색에서 보통 사람의 검은 색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회색 일변도였던 전신의 피부에 점차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감사해야 합니까?”
무현이 자조 섞인 투로 물었다. 그 대상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30년 전 구소련에서 권력싸움에 패해 숙청당한 바실리 라미우스라는 이름의 3성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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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식이?”
“틀림없습니다. 이희광 씨가 분명히 그렇게 외쳤답니다.”
“지금 당장, 전국에서 칼 제법 쓴다 하는 놈들이랑 그 만식이라는 놈 이름 대조해 봐. 데이터 찾는 즉시 나한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SQ본부에 출근한 하상우 사장이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결과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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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줘 봐.”
간단한 서류철을 훑어본 하상우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 갔다.
“이게 확실한가?”
“틀림없습니다. 혹시나 싶어 근처 CCTV화면과 대조해 봐도 일치하더군요. 분명히 윤익수 총리 직속 경호원입니다.”
“가만, 생각을 좀 해 보자고. 장대수의 배신자가 단박에 알만한 인물이 윤익수의 심복이라..장대수와 윤 총리의 교집합이란 얘긴데?”
“섣부른 추측 아닐까요?”
그 추측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 우려한 부하직원이 사장의 판단에 조금이나마 이의를 제기했지만, 달리 생각할 근거가 없었다.
“윗선엔 내가 얘기하지. 이 자료는 블랙으로 처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