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쉬운 바다 / 고명자
바다 보러 간다
집 앞에서 전철만 타면 수평선
바다 없는 지역 사람은 어디에서 연애를 하나
술은 또 어디로 가서 퍼 마시나
울고불고 싶을 땐 어디에 숨어 고래감 치며 우나
파도를 붙잡고 엎어치기 메치기하는 저 애들 수작을 봐봐
바다의 시간은 잴 수 없어
수십 년 된 근심이 쌓인 얼굴이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이물질을 떼어 주려했으나
떠밀려온 미역줄기를 주워내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그 앞에서 슬쩍 얼굴을 치웠다
오늘 바다는 유리 한 장 눌러놓은 것 같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삼십 미터짜리 파도가 나를 덮쳐
순전히 바다의 일이었다고 떠넘겨도 되는
오늘 같은 아무렴
쓴물 올라오는 속병도 고칠 수 있으려나
손바닥 한가득 바다를 퍼 올린다
모래 한 알을 위해 물결도 애쓴다
고등어 갈치 병어새끼 받아다 장사나 해볼까
다 늙은 행색으로 방파제에 얌전히 앉아
뜨개바늘에 가자미 코를 걸어 요리조리 팔아볼까
궁리 밖으로 슬쩍 발을 내밀어 보는데
바다, 풀어낼 수 없는 말이다
ㅡ 웹진 <시산맥> 202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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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자 시인
1958년 서울 출생
2005년 『시와정신』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2018년 백신애창작기금 수혜, 제1회 전국 계간지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