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일뤠할망 이야기와 제주 신화 연구의 필요성
2022101245 철학과 오지효
어린 시절 아파트 위층 사시는 이모님은 동화나 만화 전집을 파시는 일을 했다. 이웃 좋다는 게 뭐냐며 어머니는 어린 나와 언니에게 자주 전집을 사주셨는데, 그때 읽게 된 전집 중 하나가 바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올림포스 신들과 티탄의 전쟁, 신과 인간의 이야기가 뒤섞인 트로이 전쟁 등 그리스 로마 신화의 굵직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아네모네와 해바라기에 얽힌 신들의 이야기, 하늘의 떠 있는 별자리에 관한 이야기들은 한창 상상력이 풍부했던 10살 무렵의 나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이 책을 기점으로 나는 ‘신화’와 ‘신’에 대한 막연한 경외와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보통 커가며 사라지는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는 달리 신화와 신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고등학교 입학 이후 한국사와 세계사를 배우며 애니미즘, 토테미즘, 파피루스 등 나는 체감 할 수도 없는 까마득한 기원전 시대부터 존재하는 신화의 의미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인간들에게 신화란 무엇일까? 비가 오지 않아도 신에게 빌고, 농사가 흉년이 들어도 하늘님을 찾으며 마음이 번잡할 때는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언젠가는 신이 인간들의 원망 상대로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현재는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과학적인 원인을 찾고 분석하고 나름의 대처 방안까지 제도화되어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 옛날 옛적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보다 더 커다란 두려움과 무력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은 그런 두려움과 불안이 만든 막연한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잘못되거나 재해가 닥쳤을 때 핑계를 돌릴 수 있는,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위로받는 수동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신을 찾을 때는 비단 두려움과 원망만 있는 게 아니다. 기쁘고 고맙고, 소위 행운이라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역시 인간들은 신을 찾는다.
하지만 이처럼 신화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다양한 신화를 접하다 보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신화는 전부 해외, 혹은 육지의 신화들이 전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내가 가장 먼저 접한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이고, 영화 어벤져스의 흥행으로 북유럽의 토르 신화 역시 전 국민이 가장 많이 아는 신화가 되었다. 또한 고조선의 단군왕검 신화, 해모수와 하백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의 이야기를 담은 주몽 신화,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 신화 등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신화이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우리조차 제주도의 신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과거 수많은 신들과, 그 신들을 섬기며 살았던 옛 도민들의 마음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제주도 신화를 치면 제주도 신화월드, 신화리조트가 뜨는 게 현재 제주도 신화의 실정이다. 이에 나는 제주도 신화와 사회적 담론을 함께 담은 책 <모든 것의 처음, 신화>를 읽고 ‘생불꽃에 담긴 대창성사유와 법지법의 원리’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생불꽃에 담긴 대창성사유와 법지법의 원리’는 삼싕할망과 서천꽃밭 신화를 중점으로 진행된다. 나는 그중에서도 삼싕할망과 일뤠할망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삼싕할망 이야기에서 제주 사람들은 15살까지를 아이로 여겨, 자라는 동안 삼싕할망에게 무병과 건강을 기원하고 15살 이전에 아이가 죽는다면 그 아이의 환생을 빌며 불도맞이굿을 벌인다. 15살 이전에 죽은 아이들은 저승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천꽃밭으로 들어가 자신의 생불꽃을 스스로 되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 이 부분을 읽으며 그 당시도 지금도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열 달을 품어 낳아 금이야 옥이야 기른 아이가 제 명의 반도 살지 못하고 죽는 걸 어느 부모가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 아기를 품에 안겨준 신이 아직 제 아이를 기억하고 있기를, 신의 자비라도 바라며 아이를 보내야 그나마 눈물 한 방울 덜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서천꽃밭에서 환생하는 것을 책에서는 “‘꽃다운 나이’의 죽음을 꽃의 재생을 통해 극복하려는 주술적 사유”라고 해석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 주술은 인간의 삶의 전반에 뿌리깊게 내려앉은 민속신앙이었단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아이의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삼싕할망과 비슷한 신이 바로 일뤠할망이다. 일뤠할망은 자신이 좌정한 마을의 육아와 치병을 담당하는 신으로 으레 제주의 마을이라면 일뤠할망을 모시는 일뤳당을 갖추고 있다. 아버지의 고향이 가시리시고, 어릴 적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5살 무렵까지 가시리에서 자란 나는 일뤠할망이 익숙하다. 할아버지 집 가는 길에 있는 따라비 오름 부근에 있는 가시리의 본향당인 ‘구석물당’에서 모시는 신 중 하나가 바로 일뤠할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추억이 없더라도 제주도 아이들이라면 어릴 적 놀랐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넋들라’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일뤠할망은 제주도 아이들에게 친숙하고 정겨운 여신이다. 책에서 일뤳당의 사탕과 과자를 아이들이 가져가도 동티가 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된 부분 역시 이러한 일뤠할망의 모습을 더욱 정겹게 만든다. “당이라면 동티가 발동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어야 할 텐데 일뤳당신은 아이들을 지켜주는 신이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라고 하니, 살면서 신에게 이토록 대가 없는 사랑을 받을 수가 있을까.
제주도는 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신을 일상생활에서 섬기고 살았던 신화의 섬이다. 또한 교재 한국철학사 17페이지에도 나와있듯이 신화는 그 나라 최초의 인간관을 담고 있다. 신은 사실상 인간의 이상적인 인물, 영웅이므로 신화는 고대인들의 이상과 생활을 묘사한 글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1105년 고려시대의 숙종이 제주를 ‘탐라군’으로 개편하기 전 까지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별도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단군신화 혹은 주몽신화, 혁거세신화만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주도의 신화는 더욱 많이 연구될 필요가 있다. 한 민족의 심층 깊숙이 잠재하는 생활사의 단면, 정신적인 고향인 신화를 통해 한국사의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독립국으로 존재하였던 탐라국과 고대 제주도민들의 삶은 위에서 소개한 책의 저자도 말하였듯이 오늘날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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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주 신화는 제주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밝히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장소로서 제주를 이해하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우리의 미래 삶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제주에서 살고 있지만, 이 제주는 동서의 세계 가운데 하나이며, 그 역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주의 전통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어느 순간엔가 박제되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또한 세계에 대한 생각은 여기에서부터 확장해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민족주의적 햡소성, 국지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