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청라언덕
이은상(李殷相) 작사, 박태준(朴泰俊) 작곡의 가곡.
일명 「동무 생각」. 작곡자가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재학 때인 1925년에 음악적 전문지식없이 작곡한 곡이다. 노랫말은 모두 3절로 되어 있으며, 제1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박자는 4분의 4박자에서 8분의 9박자로 바뀌며, 라장조로 되어 있다. 보통빠르기의 속도이고, 세도막형식으로 되어 있다.
4분의 4박자로 된 제16소절까지의 선율은 4소절 단위로 같은 리듬의 반복이고,
이후는 8분의 9박자로 박자가 바뀌며 리듬도 바뀐다.
초창기의 가곡으로 찬송가와 창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찍부터 널리 애창되었고, 중고등학교의 교재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자 어릴 적에 많이 듣고 부른 노래 '동무 생각'이다.
오늘 청라언덕을 찾는 사람들 마음속에 동무생각이 울려 퍼진다.
대구의 몽마르뜨라고 부르는 청라언덕에 서 있다.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 동무생각이다.
이 노래는 어색할 만큼 꽤 많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중년을 넘은 우리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 음악이 태어난 그곳 대구 청라언덕의 그늘에서 옛 추억을 생각한다.
누구든 55년전의 이 노래를 기억할까?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라는 뜻이고 대구大邱의 구邱자는 언덕구자이니
이는 청라언덕이 된다.
푸른 담쟁이덩굴이 해를 향해 작은 손을 벌리는 이곳은 대구 동산병원의 뒷산이된다.
달성 토성이 대구의 중심일 때 동쪽에 있다 하여 동산이라 불렀다.
청라언덕, 참 고운 이름이다.
오늘은 이 땅에 봉사와 선교를 하러 온 선교사들을 생각해본다.
힘든 선교 생활에 고향을 그리며
이 언덕에 담쟁이덩굴을 심어
제2의 고향을 만들었으리라,
그들은 부모 형제 핏줄 하나없는 이곳 타향땅에 뼈를 묻었다.
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의술을 펼칠 때 이곳여 사는 주민들은 가난으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여 이 언덕에 시신을 그냥 묻었는데, 선교사들은 공동묘지가 된 이 언덕에 정착했고, 나중에 본인과 가족들도 아메리카 고향이 아닌 낯선 이 땅에 묻혔다.
선교사 알렌이 관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서울 제중원이고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가 증축하여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듯,
대구에서는 존슨 선교사가 제일약방을 시초로
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이란 간판을 걸고 진료를 시작한 것이
현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의 효시이다.
124년 전 제중원으로 시작한 동산의료원은 대구 의료사의 시작이었고,
선교사들은 개화가 안된 조선사회의 온갖 핍박과 설움 속에서
의료봉사 외에 사회·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들의 노고와 희생에 감사한다.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도 이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리라.'
청라언덕 끝에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묻혀있는 묘지가 있다.
조그만 비석들이 모여있는 은혜정원인데 비석의 글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평생을 이국땅에서 신앙과 봉사와 개혁을 위한 삶을 살다 이곳에 잠든 그들을 생각한다.
챔니스, 스윗즈, 블레어 주택 등 선교사들의 주택을 보면 120년 전
그들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그가 심은 대구 최초의 서양사과나무는 대구사과의 조상이다.
이은상 시, 박태준 곡의 동무생각 노래비 앞에서 가물대는 가사의 노래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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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李殷相) 작사 박태준(朴泰俊) 작곡
동무생각
작곡가 박태준 씨는
1921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후
마산 창신학교 음악교사로 부임하여
마침 이 학교에...
↑1910년 당시의 마산 창신학교
(지금의 창원시 마산 합포구 상남동 87번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기독교계)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인 창신학교에
국어교사로 있을 때
박태준이 1921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창신학교에
음악교사(1921~1923)로
부임해 옴으로써
교분이 두터워져서
가곡 ‘사우(思友)’를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으로
1922년 발표하였다.
‘사우(思友)’는 ‘동무생각’으로 개명되었다.
↑‘동무생각’ 2절의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의
조수(潮水)는 마산 앞바다 합포만 돌섬 유원지에
저녁 파도를 가리킨다.
↑마산 월포해수욕장과 자산동 굼턱.
옛날 월포해수욕장은
물이 차갑지 않고
멀리까지 얕으며
백사장과 송림이 길게 늘어져 있어
피서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1931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옛 제비산) 언덕에서
월포의 일몰을 보면서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은상은 푸른 담쟁이넝쿨 가득한
청라 언덕과
좁고 긴 90계단이 아름다운
태준의 고향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아했다.
태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은상은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박 선생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운 시(詩)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날도 박태준은 이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이
둘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문득 은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박 선생님!
선생님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물었다.
은상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는 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되는 사랑이고요.”
“제가 다니던 계성학교(註. 기독교계)
가까이에 있는
신명여고(註. 기독교계)의
여학생이었어요.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한 번은 그 여학생이
자두를 한 바구니 가져와
교회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전 그 자두가 저한테까지 올까 하며
가슴을 조이며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
나는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자리에 없었으니
주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려고요.
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한참 책상 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둘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땐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그 길을 지나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두꺼워진
칠월 하순이었는데,
그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라는...
하지만 라일락 이파리가
어떤 맛인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해졌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거지요.
손을 뻗어 연한 잎 하나를 떼서
입안에 넣었는데.
아! 그 맛이란!
그건 먹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거든요.
그때였어요.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내 코앞에 마주 있었지요.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 그 맛 때문에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했지요.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바보스럽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어휴, 그렇게 골백번 연습한 말을 두고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은상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알아요.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태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며 웃었어요.
제게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 후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렸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드릴 테니
곡을 붙여보시겠어요?”
잠시 후 은상은
태준의 고향 추억과
눈앞에 펼쳐진
월포 바닷가의 풍경을 담은
시를 건네주었다.
수첩을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박태준(朴泰俊,1900~1986)이
계성학교 다닐 적(1911~1915)
좋아했던 여학생과의 내용을 담은 노래가
바로‘동무생각’이다.
얼굴이 예쁜 미인이었던
그 여학생을 생각했던 박태준은
후에 자신의 사돈이 될
이은상 시인에게 이야기하여
탄생된 것이다.
한편 이 여학생은 용모가 뛰어나
인기가 있었으며,
결혼 후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다시 법조인과 결혼하였으나
안타깝게 경주에서 대구로 오는
고속도로에서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가곡(歌曲)이란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시조시를 노래하는
한국의 전통 성악곡을 말한다.
'동무생각'
장르: 가곡(歌曲),
1922년 작,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
1.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2.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3.
서리 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진 연당에서 금새 뛸 적에
나는 깊이 물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 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금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4.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영상 바로재생 04:00
동무 생각♬ - 소프라노 박현주 | KBS 170330 방송
↑‘동무 생각’ 노래비는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세 채의 선교사 사택이 있었던
청라(靑蘿) 언덕
계명대 동산의료원 내
의료선교 박물관에
2009년 6월 17일
전재규 동산의료원 의료선교
명예 박물관장
(전 계명대 의대 학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올렸다.
이날 신명여고생 20여 명이
함께 참석했는데
이한결 양(18세, 3학년)은
중학교 때 ‘동무생각’을 배웠다며
우리 학교 선배님을
짝사랑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에 대해
다들 놀랐다고 말했다.
백합은 박태준이 짝사랑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을 표현한다고
의료원 측은 설명했다.
그 여학생(유인경?)의 얼굴이
백합처럼 흰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전재규 관장은
3.1운동길이 지나는 동산은
대구의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간직한 곳이라며
이런 곳에 청라 언덕 ‘동무생각’ 노래비가
세워져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대구 사람들은
이렇게 박태준이 태어나고
다녔던 계성학교와
박태준이 짝사랑했던
신명여학교 여고생과
인근 푸른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옛 선교사 사택과
東山 일대의 언덕에서
청순한 사랑이 짝사랑으로
움텄을 것을 상상하여
푸를 청(靑) 자(字),
담쟁이 넝쿨 라(蘿) 자(字)라
풀이하여
‘청라 언덕’이라 명명하고
‘동무생각’ 노래비를 세우고
창작 오페라를 공연했다.
현재명, 김동리, 박목월,
이상화, 이인성도
이 청라언덕에 올라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