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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원전 2세기 로마,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을 혼자 키우며 살아가고 있던 코르넬리아의 집에 귀족 부인들이 찾아왔다. 부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이윽고 각자 자기네 집에서 가장 값나가는 보석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코르넬리아가 대화에 끼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자, 한 부인이 말했다. "코르넬리아, 당신은 정말 보석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나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가난하다고 수군대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자 코르넬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그런 보석은 하나도 없지만, 대신 다른 보석은 있지요." 그리고 자신의 어린 두 아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다가오자 그녀는 다정하게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기 이 아이들이 저의 보석입니다.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보석이지요."
이 두 아이가 후에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가 되는 그라쿠스 형제이다. 두 형제는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 인품과 신망이 높았으며, 둘 모두 가난한 평민의 권리 확대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숭고한 삶을 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라쿠스 형제
평문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다
그라쿠스 형제의 외할아버지 즉, 코르넬리아(Cornelia Africana)의 아버지는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쳐 로마를 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236~183 BC)였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the Elder)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개선식을 두 번이나 올린 유명한 장군으로, 공화정 시대의 최고 관직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consul)도 두 번이나 지냈다. 참고로 정원 2명의 집정관은 행정 및 군사의 장(長)으로 1년의 임기 동안 거의 무제한의 권한을 보유했다. 집정관의 선출 권한은 원로원에 있었으며 대개 유력 가문의 사람들만이 이 직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로마에서 집정관을 배출한 가문은 귀족으로 대접해 주었기 때문에 그라쿠스 가문은 귀족 가문인 셈이다.
형제 중 첫째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기원전 163년경에 태어났다. 당시의 관습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따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역시 아버지와 같은 티베리우스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지만 어머니인 코르넬리아의 뛰어난 가르침을 받고 자라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고 평판이 자자했던 티베리우스는 성년이 되자 새가 날아가는 모양이나 구름이 흐르는 모양을 보고 신의 뜻을 점치는 점복관(占卜官)을 맡게 되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직위로 그가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명성을 얻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역시 티베리우스를 매우 뛰어난 인물로 보고 사위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요청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곧 약혼을 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아피우스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아내에게 딸의 남편감을 정하고 오는 길이라고 소리치자 아내가 깜짝 놀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니, 왜 그렇게 서두르셨어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사위로 삼는다면 모르지만요!"
[네이버 지식백과] 그라쿠스 형제
그라쿠스 형제와 함께 있는 코르넬리아. 코르넬리아는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이집트 왕의 청혼까지 거절했다고 전해온다.
<코르넬리,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Cornelie, Mère des Gracques)>, 조제프 브누아 쉬베(Joseph Benoit Suvee),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320 x 414cm, 루브르 박물관 소장.<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티베리우스의 누나는 할아버지인 스키피오 아푸리카누스의 양자인 스키피오 2세와 결혼했는데, 그는 제3차 포에니전쟁(149BC~146 BC)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매부인 스키피오 2세를 따라 제3차 포에니전쟁에 참가했는데, 그가 보여준 용맹함과 지략으로 군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도 언제나 선봉에 섰으며 적의 성에 맨 먼저 올라간 이도 그였다. 또한, 진중에 있던 모든 병사들로부터 큰 존경을 얻었기 때문에 그가 군대를 떠날 때 모두가 섭섭해하며 다시 돌아오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티베리우스는 재무관으로 선출되었고, 집정관인 가이우스 만키누스의 부대에 근무하게 되어 곧 누만티아로 출정을 떠났다. 만키누스의 부대는 그러나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거듭 패배를 당했고 이에 만키누스는 어느 날 밤 진지를 버리고 군대를 철수시키고자 했다. 이를 눈치 챈 누만티아 사람들이 철수하는 로마군을 곧바로 뒤쫓아 왔고 이내 전군을 포위하여 막다른 길에 몰아넣었다. 만키누스는 목숨만이라도 건지고자 대표를 보내 휴전을 제안했지만, 누만티아 사람들은 티베리우스가 대표로 오지 않는 한 상대도 하지 않겠다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의 아버지가 과거 누만티아와 휴전을 맺어 그 조건들을 잘 지킨 전례가 있었고 아들인 티베리우스 역시 뛰어난 인격자로 로마 밖에까지 평판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결국 티베리우스가 직접 누만티아로 가 휴전을 성립시켰고 이에 따라 2만 명의 로마인과 그 밖의 많은 노예들, 그리고 군대를 따라왔던 많은 일꾼들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가 휴전 협정을 마치고 돌아오자 로마 시민들은 패전의 책임은 전적으로 만키누스에게 있다고 하면서 티베리우스를 로마인들을 구한 인물로 칭송하였고 그의 덕망과 훌륭한 외교 솜씨를 찬양했다. 전쟁에 패하고 돌아왔지만 티베리우스는 일약 로마 전체의 유력인사가 되었고 곧 호민관
[네이버 지식백과] 그라쿠스 형제
토지 개혁을 추진하다
당시의 로마는 극심한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100여 년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라고 할 만큼 영토가 넓어지면서 경제 규모도 급속히 커졌지만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자영농의 경우 잦은 참전으로 토지를 제대로 경작할 수 없어 농작지는 황폐화되었고, 수확물을 제대로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이집트 등으로부터 주식량원이었던 밀이 싼 값으로 로마에 공급되자 자영농들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소수의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던 자영농들은 밀농사를 포기하고 대신 포도나 올리브 등을 경작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자영농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무작정 먹을 것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거나 아니면 스스로 노예가 되어 생계를 도모하고자 했다. 귀족들과 부자들은 주인을 잃은 토지는 서류를 조작하여 쉽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욕심나는 땅이 있다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이후 그들은 전쟁 포로나 노예를 활용하여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라고 하는 대규모 농장 운영체계를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빈부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로마 시대 라티푼디움(latifundium)을 묘사한 그림. 라티푼디움은 ‘광대한 토지’를 뜻하는 라틴어로, 전쟁 포로나 노예를 활용해 대규모 농장으로 운영되었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으로 당선되자마자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토지 개혁을 착수했다. 한 사람이 5백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가질 수 없도록 하는 법률은 이미 있었지만, 부자들은 꾀를 내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등 많은 땅을 공공연하게 소유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가 새로 재정한 법안은 상당히 너그러운 것으로, 부자들은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에 대해서도 적당한 가격을 지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예상과 달리 부자들은 법안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티베리우스가 나라를 뒤흔들어 혁명을 일으키고자 이러한 법안을 만든 것이니 그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고 악선전을 했다.
그러나 부자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티베리우스는 뛰어난 웅변술로 시민들에게 부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 (전략) 지휘관들은 조상들의 무덤과 제단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워야 한다고 부하들에게 요구하지만 그것은 모두 헛된 거짓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많은 로마 사람들 중에 조상의 무덤과 제단을 갖추어 놓고 자신의 집과 가정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들의 재산과 호강을 지켜주기 위해 싸웠고 또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이름은 얻었지만,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손바닥만한 땅도 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티베리우스의 열변이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의 적들은 감히 그와 이론으로 대항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신 다른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움직이기로 했다. 호민관들의 결정은 만장일치가 되어야만 효력이 있었기 때문에 옥타비우스가 반대표를 던지자 티베리우스의 법안은 무효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화가 나 견딜 수 없었고, 곧 새로운 법안을 제출했다. 이 새 법안은 법률을 어기고 토지를 사유화시킨 사람들을 그 고장에서 쫓아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전보다 훨씬 부자들에게 불리한 법안이었다.
티베리우스와 옥타비우스는 이 법안을 사이에 두고 날마다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나중에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가 법률을 어기고 많은 재산을 사유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얼마 안 되는 재산이지만 옥타비우스의 땅값으로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옥타비우스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참다못한 티베리우스는 토지 법안에 대한 투표가 끝날 때까지 나라의 모든 관리들에게 직무를 중지하라고 선포했고, 겁이 난 관리들은 모든 직무를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음성과 말은 순수하고 세련되었으며 생활이나 식사에 있어서도 소박하고 검소한 편이었다고 한다.
드디어 법안에 대한 투표일이 되어 각 지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투표의 시작을 선언했을 때 부자들이 투표에 쓰는 병을 빼앗는 바람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에 티베리우스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싸우려고 몰려들었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집정관을 지낸 만리우스와 풀비우스는 이것을 보고 티베리우스의 손을 잡으며 제발 싸움을 진정시켜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티베리우스는 여기서 물러난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존경하는 두 사람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망설였다. 이에 두 사람은 이를 원로원에 물어보자고 제의했고, 티베리우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로원에서는 부자들의 세력이 훨씬 강했으므로 그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투표를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를 호민관직에서 해임시키는 방법을 통해 난관을 타개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과 옥타비우스 둘 중 한 사람이 호민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이를 관철시켜 그의 호민관 직위를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평민회의에서 토지개혁법이 통과되었고 곧 토지 측량이 실시되었으며, 토지를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한 감시위원 역시 선출되었다.
부자들은 이러한 상황 전개에 매우 불안해했고 틈만 나면 티베리우스를 깎아내리려고 애를 썼다. 특히 티베리우스가 옥타비우스를 호민관직에서 해임시켰던 것은 그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때 마침 아틸루스의 왕이 세상을 떠났고 유서를 통해 그의 재산을 로마 사람들이 상속받도록 했다. 티베리우스는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법률을 제안했다. 첫째, 아틸루스 왕의 재산은 농기구와 경장에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데 사용하고, 둘째, 원로원은 이 유산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으니 평민회의에서 이 문제를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원로원은 이 제안에 대해 분개했고, 티베리우스가 왕이 되고자 획책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마의 원로원. 로마의 입법 및 자문 기관으로 초기 공화정 시기에는 300명이었으나 나중에는 600명으로 확대되었다. 최상급 신분인 종신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키케로의 연설(Cicero Denounces Catiline)>, 체사레 마카리(Cesare Maccari)>, 1889, 프레스코화, 이탈리아 마다마궁 소장.
그를 노리는 정적들의 음모가 점점 뚜렷해져가자 티베리우스는 시민들의 지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새 법안을 제안했다. 첫째, 전쟁 복무 기간을 단축시키고, 둘째, 재판 결과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평민회의에서 다시 판결을 받을 수 있게 하며, 셋째, 원로원 의원들로만 구성하던 법관 자리에 같은 숫자만큼의 기사 계급 시민들을 참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원로원의 권리를 감소시키는 것으로써 격분한 귀족들은 여기저기에서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쏟아 내었다.
마침내 이 법안에 대해 투표하는 날이 되었다. 귀족들과 부자들이 티베리우스의 목숨을 노린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자신도 투표 장소에 가기를 꺼려했지만, 귀족 가문 출신의 이름 난 철학자인 블로시우스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라쿠스의 아들이며 스키피오 아푸리카누스의 외손자입니다. 로마사람들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당신이 겁을 내어 민중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티베리우스는 투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반갑게 맞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다.
투표가 벌어지는 대회장 주변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매우 시끄러웠다고 한다. 이 혼란 속에서 집정관 플라비우스 플라쿠스가 티베리우스의 곁으로 다가와 지금 원로원 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귀족들과 부자들이 티베리우스를 죽이고자 많은 노예와 부하들을 무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티베리우스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 음모를 알려 주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그에게 묻자, 티베리우스는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안 들릴 것이므로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것을 본 반대파가 원로원으로 달려가 티베리우스가 자기 머리를 가리킨 것은 왕관을 달라는 뜻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원로원은 발칵 뒤집혔다.
푸블리우스 나시카는 폭군을 없애야 한다고 집정관에게 호소했지만, 집정관이 상황을 더 두고 보아야 한다면서 이를 거절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자! 이제 집정관까지 나라를 배반했소, 그러니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나시카가 이끄는 무리들은 곧바로 대회장으로 들이닥쳤고 그들의 손에는 곤봉과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무기를 휘둘렀으며 이에 죽어 넘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티베리우스는 자리를 피해 급히 달아났으나 곧 땅에 쓰러져 있던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 할 때 갑자기 둔중한 무기가 날아왔다. 자신과 함께 호민관을 지내고 있던 푸블리우스 사투레이우스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던 것이다.
귀족들과 부자들은 티베리우스를 죽인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그의 시체를 모욕했고, 다른 300여 구의 시체들과 함께 티베르강에 던져 버렸다. 또한 티베리우스의 친구들을 재판도 없이 죽이거나 강제로 추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리우스에 대한 시민들의 사랑은 오히려 더욱 커져 그의 죽음과 관련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히 나시카에 대한 시민들의 원한은 너무나 커서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얼마 뒤 페르가몬 근처에서 죽고 말았다.
티베리우스 보다 9살 어린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는 형을 살해한 정적들이 두려워서였는지 아니면 정적들에 대한 사람들의 미움을 더욱 자극하려고 그랬는지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지만 그는 게으름과 사치를 피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면서 그 역시도 형과 마찬가지로 그저 이름 없는 인간으로 일생을 마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베티우스라는 친구가 고발을 당해 가이우스가 변호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는 조리 있는 변론과 재치 있는 웅변술로 방청객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다른 웅변가들의 연설은 가이우스에 비하여 한낱 어린아이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자 귀족들과 부자들은 그가 호민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수군거리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평민회의에서 연설하는 가이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는 뛰어난 연설가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그 후 많은 이들이 그의 연설 방식을 모방했다.
얼마 후 가이우스는 집정관 오레스테스의 재무관이 되어 사르디니아 섬으로 떠나게 되었다. 정적들은 매우 기뻐했고, 가이우스 자신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어려서부터 전술에 대한 훈련을 쌓아왔고 무술 실력 역시 뛰어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때까지도 정치에 뛰어들기를 주저 하고 있었지만, 시민과 친구들의 계속되는 권유로 입장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가이우스는 사르디니아 섬에 도착하자 곧 여러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적들은 그의 용맹함을 두려워했고, 주민들은 그의 정의로움에 감사했다. 특히 당시 한파가 몰아쳤을 때 병사들의 추위를 덜어주기 위해 직접 각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시민들로부터 옷을 보급 받도록 한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컸다.
이 무렵 가이우스는 정치에 나설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키케로(Cicero)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원래 관직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갖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이 꿈속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정계에 나서게 되었다. "가이우스야! 왜 그러고 있느냐?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와 나는 똑같은 일생을 살아가도록 이미 정해져 있다.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란 말이다."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이우스는 로마로 일찍 돌아왔고 곧 호민관에 출마했다. 귀족과 부자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평민들의 열렬한 성원으로 가이우스는 4등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호민관의 직무를 시작하자 누가 가장 능력 있는 호민관인지 금방 드러나게 되었다. 가이우스가 특히 정성을 쏟았던 것은 도로 건설로, 그의 설계와 공사 지도에 의해 로마 특유의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들이 도시 곳곳에 건설되었다. 또한 그는 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웅변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웅변은 힘이 넘쳐서 마치 불을 토하는 듯 열렬했고,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연단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어깨에 걸친 가운을 벗어던진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의 인격에 더 큰 찬사를 보냈다. 그는 언제나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냈지만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했다. 그의 행동을 지켜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독재를 한다거나 교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이우스는 여러 가지 개혁 법안을 마련했다. 먼저 형의 뜻을 이어 평민 특히 빈민들에게 국유지를 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하고자 했고, 그들을 위해 곡식의 가격을 낮췄다. 또한 병사들이 무료로 군복을 공급받도록 했으며, 17세 이하의 복역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여러 동맹국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과 동등한 선거권을 주었으며, 300명의 원로원 의원뿐만이 아니라 기사 계급 중 300명을 택하여 그들 역시 법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시민들은 가이우스의 법안들을 통과시켰고 특히 기사 계급의 법관을 선출하는 권리를 그에게 맡겼다. 이렇게 되자 가이우스의 권력은 급격히 커졌다.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호민관인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포섭했다. 리비우스는 원로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급속히 가이우스의 경쟁자로 부상했다. 원로원은 리비우스가 제안한 시민들에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법안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했고 쉽게 통과시켜 주었다. 대신 리비우스는 자신이 정치계에 뛰어들어 시민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원로원 덕분이라고 선전을 했다. 시민들은 리비우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제안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야말로 진심으로 시민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리비우스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상대적으로 가이우스의 인기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때 또 다른 호민관인 루브리우스가 완전히 파괴된 카르타고를 다시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제비를 뽑은 결과 가이우스가 이 일을 맡게 되었고 곧 카르타고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70일 만에 카르타고 복구를 위한 기초 사업들을 모두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를 비운 사이 정적들은 더욱 활개를 치며 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리비우스는 가이우스와 가까운 친구인 풀비우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거짓 소문을 내었다.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풀비우스와 가까운 친구였던 가이우스의 인기는 그만큼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원로원은 과거 가이우스가 다른 사람을 집정관 후보로 추대하면서 자신을 떨어뜨린 것 때문에 가이우스를 증오하고 있던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이 되도록 힘을 기울였고 곧 성공을 거뒀다.
로마로 돌아온 가이우스는 곧 세 번째로 호민관에 출마했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절대 다수의 표를 얻었지만, 그의 동료들이 표를 속여서 발표했다는 의심을 받고 그의 표가 무효 처리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원로원뿐만 아니라 다른 호민관들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이우스의 정적들은 카르타고에서 행한 그의 성과 역시 모두 허물어 버렸고, 오피미우스 주도로 가이우스가 만들었던 법을 전부 폐기할 것을 계획했다.
가이우스가 통과시킨 법을 폐기하기로 결정하는 날, 오피미우스의 하인인 안틸리우스가 풀비우스 일파를 향해 "귀한 분께서 행차하시니, 어서 길을 비켜라, 이 악한 무리들아!"라고 외쳤다가 분노한 사람 중 한 명이 던진 철로 만들어진 펜에 맞아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오피미우스는 기다리고 있던 기회를 만난 듯이 몹시 기뻐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고 자신의 하인을 죽인 사람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이처럼 무섭고 끔찍한 일을 그냥 넘길 수 없다며 분개했다. 원로원은 오피미우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반역자를 잡아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오피미우스는 사람들에게 무장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모이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듣자 풀비우스는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 사람들을 집결시켰으며, 당일이 되자 무장을 갖추고 전통적으로 평민의 아성이었던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무장을 갖추지 않고, 마치 평민회의에 나가는 것처럼 평상복을 입은 채 허리에 작은 칼 하나를 차고 그 곳으로 향했다. 그가 막 집을 나서자 아내인 리키니아가 뛰어 나와 이렇게 말했다.
"가이우스, 오늘의 이 작별은 당신이 평민들 앞에 연설을 하러 나갈 때와는 다르며 또한 영광스러운 전쟁을 위해 출정을 하는 길도 아닙니다...(중략)... 당신은 무장도 안 하고 남을 해치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상처를 입겠다는 뜻이니 참으로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나라에 아무 이로움도 없는 죽음을 당하시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악이 승리하고, 힘과 칼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눈물을 흘리는 부인의 팔을 내려놓고 친구들과 묵묵히 걸어갔다. 리키니아는 다시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다가 놓치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풀비우스는 자신의 어린 막내아들을 전령으로 보내 화해를 제안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으나 오피미우스가 반대했고, 곧이어 수많은 병사들과 크레타 섬에서 데려온 궁수들을 이끌고 나와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풀비우스는 도망치다 큰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가이우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단지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대된 것을 몹시 슬퍼하다 디아나 신전으로 들어가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친구인 폼포니우스와 리키니우스가 그를 말리면서 칼을 빼앗아 버렸다. 이후 나무 다리를 지났을 때 두 친구는 아무도 다리를 건너오지 못하게 자신들이 다리 입구를 지키겠다고 말하며 가이우스에게 몸을 잘 숨기라는 부탁을 했다. 결국 두 친구는 죽음을 당했고 가이우스는 필로크라테스라는 하인과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이때 시민들은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달리기 선수라도 응원하듯 격려해 주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으며, 말을 빌려달라고 해도 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가이우스는 어느 숲에 도달한 후 필로크라테스의 손을 빌어 목숨을 끊었고, 그가 죽자 필로크라테스 역시 자결했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두 사람은 사로 잡혔는데, 하인이 주인을 안고 떨어지지를 않아서 먼저 하인을 죽인 다음 가이우스를 죽였다고도 한다.
두 친구가 자살하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서 칼을 빼앗으며 빨리 도망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Death of Gaius Gracchus)>, 장 밥티스트 토피노_레브룬(Jean Baptiste Topino-Lebrun), 1792, 캔버스에 유채, 마르세유 미술관 소장.
가이우스와 풀비우스 일파들의 시체는 모두 티베르강에 던져졌는데, 그 수가 무려 3천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오피미우스는 곧이어 귀족들 사이에서도 절대적 권력을 장악했고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 무슨 큰 명예라도 되는 듯 자신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신전까지 세웠다. 그러나 곧 부정한 방법으로 공금을 가로챈 것이 탄로나 자신의 모든 명예를 잃은 것은 물론 평생을 증오와 모욕 속에서 살아갔다고 한다.
시민들은 한동안 억압에 눌려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쿠스 형제를 그리워하며 몹시 슬퍼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광장에 그라쿠스 형제의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고, 두 사람이 죽은 자리를 신성한 땅이라고 공포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철마다 햇과일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왔으며, 신전에 들어온 것처럼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라쿠스 형제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추진했던 토지개혁법은 약 60년 뒤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100~44 BC)의 손에 의해 드디어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라쿠스 형제
기원전에도 이런 정치가가 존재했다는게 대단하네요.
그보다 지들 위해서 목숨걸은 그라쿠스 형제들에게 응원한다고 주댕이는 나불대면서
도망칠때 쓸 말한필 안내준 로마시민들도 참...
첫댓글 정치 머리아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