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낯설음>
익숙한 낯설음이란 뭘까? 저는 비록 철학을 배운 적이 없지만, 이런 생각거리가 주어지면 주로 단어에 포커싱해서 생각의 시작을 여는 편입니다. 때문에 ‘익숙함과 낯설다’라는 단어에 조금 집중해 보았습니다. 저희가 일상생활에서 낯설다고 느끼는 때는 언제일까요.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가보는 장소...정도에 저희는 낯설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낯설음? 처음이 아닌 대상에게서 낯설음을 느끼려면, 발견하려면 저희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어야 할까요. 고민을 이어 나가며 저는 두 가지의 대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면’입니다. 제가 대상을 볼 때, 그것이 사람이던, 사물이던, 다른 볼 수 없는 어떠한 개념적인 것이던지, 그 대상을 100퍼센트 보고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50퍼센트, 정말 많으면 80퍼센트 정도만을 바라보며 산다고 생각하는데, 별생각 없이는 그 부분만을 보며, 시간이 쌓이고 경험이 축적되며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문득, 저희가 의도적으로, 혹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서 대상의 보지 못한 어떠한 ‘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저희는 그에 대한 낯섦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관점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겐, 물론 저에게도.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자신의 일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모르는 나. 그 일면은 조금 더 제 본모습에 가깝겠죠. 사회성과 타인이 보는 나의 이미지 그런 것들로 칠해져 있는 페르소나가 아닌, 남이 모르기에 더 진실될 수 있는, 가면 뒤 나의 모습. 그 일면의 일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보편적인 반응으로써 “너 되게 낯설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낯설음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켜 놓을지는 온전히 두 사람의 몫이지만, 그것이 긍정, 부정 어느 쪽에 상관없이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다는 점을 보았을 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낌으로서 대상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하여 본질로 다가가는, 바로 큰 주제인 익숙한 낯섦과 의미에서 교집합을 가지고 있고 이를 충분히 시사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면’에 대한 생각은 이전의 ‘남이 모르는 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점으로부터 조금 더 뻗어나가서, 제가 이 ‘면’을 주제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나도 모르는 나”입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일면, 제가 이것을 느낀 건 단순한 계기였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화가 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직접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주변 사물을 마구잡이로 차고, 던지고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행한 것은. 그러다 문득, 저희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 화낼 때 물건을 집어 던지던 그 모습. 저는 그걸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 스스로에게 큰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에게 비롯된 저도 모르는 저의 다른 면이 있던 것이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저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상처 주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한동안 이 감정을 외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조차 저의 일부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 또한 나. 나는 누구이며,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에 대한 무수한 선택지 중 하나라고. 그런 시간이 있고 나서, 이제는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것을 즐거워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이런 곳에 재능이 있었잖아?, 내가 이런 것도 좋아했었네? 와 같이 저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도와주는 선택지로서 작동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처음에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낯설음이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제게 남아있기에 이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대답은 “시선”입니다. 단순히 아이에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아이 때 매일 같이 뛰어놀던 골목길을 다시 가보았을 때 신체의 변화로 달라진 시선. 거기서 느낀 낯설음. 그리고 쌉쌀하면서 몽글몽글한 감정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제가 생각한 것은 조금 다른 결의 생각입니다.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저의 주관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세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에 대해서인데, 저에게 세상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공간을 의미하고 세계는 그 세상 속, 제가 ‘인지’하는 범위 내의 공간이고. 이 공간 안에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저의 개념적인 관점이 더해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앞서 한 이유는, 바로 익숙한 낯설음 – 시선이 이 주관을 정립할 수 있었던 최초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소에 하늘 사진을 많이 찍고 다닐 정도로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때문에, 그 전까지의 하늘은 날씨, 구름, 노을, 해 이런 것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물에 불과했고, 그것이 제게 익숙한 하늘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말 평범한 날의 그런 하늘을 보고 걷고 있었는데 하늘이 유독 너무 높아 보였습니다. 아득할 정도로. 그렇게 너무 높아서,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되뇌었습니다. “세계란 무엇인가?” 그 질문 한 마디를 통해 세계에 대한 관점을 머금은 시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선으로 본 하늘은 여러 번의 고민을 거쳐 단순한 자연물에서 ‘세계의 경계’로 변화했습니다.
[[ 아득히 높은 하늘, 그 이후에 존재하는 공간은 나에게는 없는 공간과 마찬가지. 그렇다면 결국 나에게 주어진 하늘은 –비록 충분히 높고, 아득함에도. 거기까지인 것인가. 그럼 그 아득함이 내 세계의 범위겠지. 그렇다면 하늘 같은 수직적인 범위 말고, 수평적인 범위는 어떻게 될까.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람과 나의 상관관계는 있을까. 만약 없다면, 그 사람은 내 세계에는 없는 사람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렇게 없는 사람을 하나 둘씩 지워간다면 결국 내 세계에는 내가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들이 존재하겠구나. 결국 세계는 내가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나의 역할은 그것을 넓혀가는 것. 여행도 좋고 책도 좋아. 그리고 그 세계를 나의 가치 분석을 통해 바라보고, 해석해 가는 것. 그게 나의 역할이야. ]]
이렇게 저의 시선만 달라졌을 뿐인데 하늘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익숙한 것에서 특별한 무엇인가로. 세상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고심해 볼 수 있는 무엇인가로. 익숙한 낯설음의 시선은 그 통찰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맨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철학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한 사고가 정확한 흐름이었는지, 오류는 없었는지, 생각이 깔끔하게 정돈 되었는지 와 같은 점들을 정확하게 검토해 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과제를 통해서 제 생각을 죽 늘여놓으며 정리하여 타인에게 보여주는 경험이 제게는 하나의 색다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색다름. 그것은 낯설음으로도 말할 수 있겠죠. 평소에 사용하던 익숙한 도구인 생각과 말, 거기서 낯선 도구인 글을 통해 표현하는 것. 그렇기에 이번 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조차도 익숙한 낯설음. 자체였고, 제가 이번 과제를 통해 좋은 고뇌와 경험을 얻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면과 시선의 관점에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군요. 면이라고 표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에 내가 보는 지점, 곧 시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시선에서는 이 점을 좀 더 본격화하였는데, 그 속에도 시선과는 다른 보편적 기준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을 볼 때는 주관과 객관의 두 가지 면과 두 가지 시선이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예로 든 하늘의 경우, 우리는 지표면 위에 있는 어떤 공간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공간의 범위는 그것을 보는 나의 시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시선에는 지금까지 하늘의 경계를 무엇이라고 불러온 객관적인 기준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내가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전제되어 있지만, 동시에 나의 시선에 따라 그것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사실적 판단이고,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각각의 인식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