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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위원장님의 카톡에서]
♧도척지견(盜拓之犬)♧
앞 집의 숫닭은 아침에
"꼬꼬댁" 하고
활개를 치고,
뒷 집 진도개는
외부 사람이 접근하면
짖어대는 것이
그네들 일과였지요.
그런데, 언제인가 부터
닭(酉)과 개(犬)가 조용해 졌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개가 닭에게 물었습니다.
"넌 왜 새벽에 울지 않니?"
그 물음에 닭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 아저씨가 백수가 됐는데
새벽잠을 깨워서야 되겠냐? "
그런데,
"넌 왜 요즘 짖지 않고 조용한거야"?
닭의 물음에
진도개가 대답했습니다.
"요즘, 앞을 봐도 도둑놈이요,
뒤를 봐도 도둑놈들 판인데
짖어 봐야 뭐하냐?
내 입만 아프지!!
그래서 입 다물고 산다."
그래요,
요즘은 부정, 부패하는 도둑 놈들의 천국이니 개가 짖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옛 말에
"도척지견" 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도척의 개'' 라는 뜻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밥 주는 사람에게 무작정 굴종하고
맹종(盲從)하는
얼뜨기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
"도척(盜拓)"이란
악명 높은 큰 도둑이 있었는데,
그 졸개들이 2천 여 명이나 되었는데
"도척"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유린(蹂躪)하고,
약탈하는 악마와도 같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도척의 집에 있는 개(犬)는
도척이 어떤 놈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 찌거기나 던져주는
"도척"에게만 꼬리를 흔들어 대면서
"도척"에게 반(反)하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냐를 가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작정 짖어대고,
물어 뜯었다고 합니다.
"도척"이 짖으라고 하면 짖고,
물어라 하면 물었지요.
그 더러운 밥 찌꺼기
한 덩이를 얻어먹고자
"도척"의 눈치를 보면서 연신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도척지견"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르는 채
"도척"의 개(犬)처럼
앞도, 뒤도 가리지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 찌거기 한 덩이 던져주는 자에게 굴종하며, 비열하고도 악랄한 개 노릇을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畜狗)를 빗대어
"도척의 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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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과 두 다리
독일 시골의 어떤 가난한 학생이
여행을 하던중 어느 싸구려 여인숙에
투숙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신발이 없어졌다.
그는 화가 나서
어느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나 욕을하면서 하나님도 무심하지
하필 나같은 가난뱅이의 신발을 훔쳐가게 하시다니 라고 원망했다.
그날이 마침 주일 이었는데 여인숙 주인이 미안하게 됐다고 하면서
창고에서 헌신발 하나를 꺼내어 주면서 함께 교회가자고 했다.
그는 마지 못해
교회에 따라 갔으나
기도를 해도 신발 생각에 찬송을 불러도 신발생각 뿐 이었다.
그런데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손빽을 치면서 찬송을 불렀다.
그래서 속으로
이 사람은 얼마나
좋은 신발을 신고있기에 저렇게 기쁘게 찬송을 부를까 하고 곁눈으로 그 사람이
신고있는 신발을 보았다.
그 순간 그는 낌짝 놀랐다.
그 사람은 신발을 신고있지 않았다.
두 다리가 없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너무 한심 스러웠다.
저 사람은 신발을 신을 발이 없는데도 저렇게 감사하며
예배드리는데
나는 성한 두다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하찮은 신발 때문에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다니...
그 후부터 그의 삶이 변했다.
그는 항상 두 다리가 있는 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이 사람이 후에 독일 재무장관으로
이름을 떨친 '마르티 바덴' 이다.
감사는 만사다.
감사는 행복의 씨앗이다.
감사는 영혼의 얼굴이다.
은혜를 잊지말고 감사드립시다
고맙습니다
/ 12. 20 수요일
좋은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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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대1의 승리자
파격적인 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李舜臣(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전라좌수영 절도사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 있었을리는 없는것이다.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 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 외친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조하며 임금(선조도 속으로는 동조함)을 압박하고 있으니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公은 公, 私는 私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 야 한다는 문무백관 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못한다.
당시 이순신의 누명 상황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 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인 梧里 李元翼(오리 이원익, 1547~1634)이 임금의 어명으로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 외쳐도 이원익의 승락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로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
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하지 못하옵니다."
이원익의 이 말에 선조도 체념을 하고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 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없는가 보구나.!"
오직 한사람의 곱고 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 꺽었다.
드디어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
당시 문무백관 199명 대 1 이원익 한
사람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을 살려
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
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 자리를 잡게되는 소박하고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초가집에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세월은 400년이 지나고 시대만 수없이 변했을 뿐 정치는 변한게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외롭지 않은것이
대장부의 자존심이요 명예이다.
더구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통에는 더 할 것이다.
온갖 시기질투와 모함으로 사형 직전
까지 간 만고의 충신을 알아 보고
199대1로 임금의 불신으로 부터 믿어준 탁월한 선견지명의 굳은 신념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과 조선 사직을 지켜낸 오리 이원익
대감이야 말로 만고에 길이 빛나는
충신이며 나라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 이원익이 나라를
구했던것이다.
한 사람.!
올바른 한 사람이 중요하다.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시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러기에 오리 정승은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400년이 지났지만 오늘의 이
시대에 이원익 대감 같은 "정정당당"했던
淸白吏(청백리)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생각나게 할 뿐이다.
지금 시대에도 이원익 정승
같은 정정 당당했던 분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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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대1의 승리자
파격적인 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李舜臣(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전라좌수영 절도사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 있었을리는 없는것이다.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 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 외친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조하며 임금(선조도 속으로는 동조함)을 압박하고 있으니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公은 公, 私는 私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 야 한다는 문무백관 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못한다.
당시 이순신의 누명 상황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 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인 梧里 李元翼(오리 이원익, 1547~1634)이 임금의 어명으로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 외쳐도 이원익의 승락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로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
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하지 못하옵니다."
이원익의 이 말에 선조도 체념을 하고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 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없는가 보구나.!"
오직 한사람의 곱고 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 꺽었다.
드디어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
당시 문무백관 199명 대 1 이원익 한
사람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을 살려
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
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 자리를 잡게되는 소박하고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초가집에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세월은 400년이 지나고 시대만 수없이 변했을 뿐 정치는 변한게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외롭지 않은것이
대장부의 자존심이요 명예이다.
더구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통에는 더 할 것이다.
온갖 시기질투와 모함으로 사형 직전
까지 간 만고의 충신을 알아 보고
199대1로 임금의 불신으로 부터 믿어준 탁월한 선견지명의 굳은 신념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과 조선 사직을 지켜낸 오리 이원익
대감이야 말로 만고에 길이 빛나는
충신이며 나라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 이원익이 나라를
구했던것이다.
한 사람.!
올바른 한 사람이 중요하다.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시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러기에 오리 정승은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400년이 지났지만 오늘의 이
시대에 이원익 대감 같은 "정정당당"했던
淸白吏(청백리)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생각나게 할 뿐이다.
지금 시대에도 이원익 정승
같은 정정 당당했던 분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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