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이름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다>
철학과 2024101245 최혜민
2002년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주인공 ‘치히로’가 부모님과 함께 새로 이사간 곳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신들의 세계’에 들어서며 시작된다. 치히로의 부모님은 허락되지 않은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되어버리고, 치히로는 그곳에서 만난 ‘하쿠’의 도움을 받아 부모님을 구해 돌아가려 한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이곳에 남아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조언하고, 치히로는 그런 하쿠의 말을 따라 신들이 머무는 여관의 주인인 ‘유바바’를 만나러 간다. 그러나 치히로는 여관에서 일하게 되는 대가로 유바바에게 ‘치히로’라는 이름을 뺏기고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영화는 ‘센’이 된 치히로가 여관에서 겪는 신비롭고 기묘한 모험을 그려내며, 그 일련의 모험을 마친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부모님과 함께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치히로가 이름을 빼앗기며 시작하고, 또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며 끝난다. 치히로가 이름을 빼앗기는 순간을 되짚어 보면 여관에서의 노동을 주관하는 유바바가 있었다. 유바바가 치히로에게 노동의 기회를 부여하며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이름이었다. 그렇게 치히로는 노동자가 되며 이름을 빼앗긴다. 나는 여기서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문자에 그치지 않으며, 나아가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름은 존재와 동시에 부여되지만, 부여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름의 의미가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존재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그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는 다른 존재와 차별성을 가지기도 하고, 그 존재만의 고유성을 지니기도 하며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치히로가 노동의 대가로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는 것은 정체성이 상실된 채 오직 노동자로서만 기능하는 존재로 전락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인간소외 현상과도 맥이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인간소외 현상이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 노동 및 노동의 산물 또는 자아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본격화된 개념이다. 나는 특히 현재 대한민국의 많은 노동자들 역시 자기 자신으로서 노동하고, 존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직업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사치나 불필요한 일로 여겨지곤 한다. 그렇게 해서 직업을 가져도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의 ‘워라밸’이라는 신조어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의 피로를 드러내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물론 좋은 회사에서 큰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자아실현의 일종이며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은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삶만을 성공한 삶이라고 규정하며, 이와 다른 형태의 삶은 실패한 삶으로 낙인찍는 분위기가 팽배해있고, 그로 인해 점점 어린 나이의 학생들까지 ‘실패한 삶’에 대해 두려움을 갖도록 하여 결국 자기파괴적인 경쟁을 부추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회가 규정하는 ‘성공한 삶’과 ‘실패한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 설령 그 삶 속에서 큰 부와 명예를 누릴 수는 없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삶을 과연 실패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름을 빼앗긴 존재’들은 단순히 노동자 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존재들은 너무나 철저하고 치밀하게 지워지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님비현상이었다. 님비(NIMBY)현상이란 ‘Not In My BackYard’의 약자로, 자신의 주거공간에 혐오시설의 유치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혐오시설이란, 장애인 거주시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 시설, 소방관, 동물화장장 등이 있다. 혐오의 대상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이며, 약자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너무나 쉽게 타자화 되어 정체성을 잃게된다. 그리고 이처럼 특정 존재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그 존재를 거부하는 것은 이름을 빼앗긴 치히로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사회적인 시선이나 폭력 등에 노출될 것을 우려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수밖에 없는 성소수자들이나, 오랜 시간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양한 권리들로부터 배제되어 왔던 여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이 밖에도 약자성을 지니고, 자신의 정체성을 빼앗기거나 감추며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되어 존재하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약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타인의 정체성을 짓밟으며 내 정체성을 견고히 하려는 시도는 결국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무너트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관용이나 자선의 차원이 아닌, 지극히 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차원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치히로는 과연 어떻게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영화 속에서 치히로가 이름을 되찾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으나, 다양한 모험과 사건들을 겪으며 성장하였고, 하쿠와 같은 이들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앞서 설명한 자본주의적 사회와 인간소외 현상에 맞서는 치히로의 자세가 선명히 드러나는 장면을 통해 어떻게 치히로가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는지 접근하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로 ‘가오나시’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선의를 베푼 치히로에게 보답하고자 금을 선물하지만, 치히로가 이를 ‘필요 없다’며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치히로가 금화와 같은 자본보다 친구의 안위를 우선하는 장면을 통해 치히로가 자본주의적인 논리를 따르지 않는 인물임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또 치히로의 자본주의를 향한 반항은 앞서 이야기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소외에 대한 반항과도 맞닿아있으며,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장면은 치히로가 ‘신들의 세계’에서 자신을 도와준 하쿠의 이름을 불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치히로는 하쿠가 자신이 어린 시절 빠졌던 강이고, 그런 자신을 구해준 것이 하쿠임을 기억해냄과 동시에 하쿠의 진짜 이름인 ‘코하쿠’라는 이름으로 하쿠를 부른다. 나조차 나를 알 수 없을 때, 혹은 너무나 거대한 이 세계가 내 존재를 지우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영화는 치히로를 통해 그 해답을 그 제시한다. 바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를 타자화하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그 존재를 알고자 노력한다면 이 세계 전체를 뒤집는 것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너와 나라는 작은 세계만큼은 또렷하게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준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종반부에서 치히로가 수많은 돼지들 속에서 돼지로 변한 부모를 찾아내라는 유바바의 난제를 해결하는 방식 역시 인상적이었다. 치히로는 유바바가 제시한 돼지들 중에 부모님은 없다는 답을 내놓아 난제를 돌파하는데, 이는 앞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 치히로의 모습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초반에서 부모님을 찾기 위해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던 치히로는 이름을 내놓으라는 유바바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었으나, 영화의 종반부에서의 치히로는 유바바가 제시한 논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답으로 부모님을 되찾는다. 이는 치히로가 유바바의 논리, 즉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거부함을 의미하며,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이름을 빼앗겼던 치히로의 성장과 자아의 되찾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이름은 무엇인지, 나는 그 이름을 꼭 쥐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으로 존재하며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방황하고 순응하며 무사히 이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막연하게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치히로처럼 끝내주는 모험을 떠날 용기도 없기에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고는 있지만 여전히 내 삶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그치만 모든 삶이 부와 명예로 가득할 수도, 끝없는 모험으로 가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끊임없이 고민하고, 제 이름을 되뇌이는 삶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내 삶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부와 명예가 가득한 삶을 쫓을 수도 있고, 당장이라도 이 세계를 뒤로하고 모험 속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 수 많은 가능성들이 나를 끝없는 고민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기어이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신들의 세계’가 아닌, 침대 맡이나 어느 골목길 따위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이름을 빼앗고, 새로운 기호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치를 빼앗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학번도 관리를 위해 부여하는 것입니다. 24학번은 24학년도에 입학한 학생이며, 뒤따르는 단과대학, 학과, 이름 한글 순 등도 관리의 편의를 위해 부여되는 기호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떠올라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학과에 동명이인이 있을 때는 이 학번이 구분할 수 있는 기호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번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관리 대상으로서 학생으로 소외시키게 됩니다. 영화에서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치히로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놀던 강의 이름을 떠올리고,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성숙된 생각을 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모험을 겪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름은 오늘날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