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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한국 정가의 뒤안팍에서 귀여움을 받던 소녀라고 할 수도 없고
처녀라고 할 수도 없고 페어 레이디라고도 할 수 없는 미혼모(未婚母)인 여인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번안 가요를 부르며,
한국 정가와 이 여인과 이 여인이 낳아 놓은 아이에 대하여
메주알 고주알 참새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미 정가와 재벌가에서는 '이름이 나 있는 여인'이었다.
1970년 3월 17일. 이 날 밤에 드디어 한국 정가를 발끈 뒤집어 놓는 일대 사건이 터졌다.
여인은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오후 7시까지 집에 있었다.
몸과 마음에 무슨 이상이 있었던지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점심마저 거른 후에 아직 저녁 상을 받지 않고 있을 때였다.
전화 벨이 울렸다.
아이의 아빠가 외국 출장 중이라서 이 집 전화 번호를 알고 그녀를 찾을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누굴까? 왜 전화를 걸었을까?
그녀는 수화기에 귀를 대고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안 간다는 말을 했고, 한참 있다가는
'송별회로 모이셨다니 인사만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차는 그녀가 은거(隱居)하고 있는 서교동에서 신촌-퇴계로-장충동을 거쳐 타워호텔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위장 번호판을 단 20 여 대의 검정차들이 즐비하게 주차하여 있었다.
당대 박정희 권가(權家)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타고 온 차들이었다.
그녀는 17층으로 올라갔다.
밤 8시 10분 경이었다.
그리고 10시 40분 경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사모님! 약속을 해 주시고 가셔야지요. 그냥 가시면 곤란해집니다."
그녀는 말없이 차에 탔다.
그날 저녁 그녀가 레코드 플레이어에게 청한 노래는 'Release Me'였다.
그녀는 왜, 누구에게, 무엇을 하소연하고자 '나를 놓아 달라'는 흐느끼는 리듬의 노래를 청했을까.
아마도 운명의 여신이 초대장을 보내 그날 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닐가.
차는 시청앞을 지나 신촌을 거쳐 서교동 그녀의 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포장이 안된 어두운 골목이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건장한 두 사람의 모습이 힐끈 보였다.
한 사람은 검은 잠버를 입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바리 코트를 걸친 사람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 늦은 시간의 이 골목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한 11시 40분 경이었다.
문을 열라고 했다.
운전수가 유리창을 약간 내렸다.
정일권 총리의 심부름을 왔다고 했다.
정 총리가 심부름을 보냈다면 안심해도 된다.
유리창문이 조금 더 열렸다.
그 때였다.
열린 창문을 통하여 그녀에게 인사말이 쏟아졌다.
"안녕! 비너스! 팡!"
그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었다.
그들은 운전수에게 절두산 성당 쪽으로 차를 몰도록 했다.
신음 소리와 함께 선혈이 낭자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절명(絶命)하여 가는 미녀를 실은 차는
제2한강교 로터리를 거쳐 절두산 성당 앞에 도착했다.
거기에 검은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와 그녀의 운전수인 오빠와 사고 차량을 내둔 채
통행 금지 시간이 넘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이 정인숙(鄭仁淑)이다.
정인숙은 대구 시장의 딸로 특히 영어 회화에 능통했다.
한국 정치는 일본 정치의 원숭이 판인 경우가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권부(權府)에서 관리하는 여인들이 있었다.
6.25 사변 때도 그랬지만 5.16 후에도 이 더러운 권부의 관행은 이어지고 있었다.
200 여 명의 꽃다운 아가씨들이 차출되었다.
그 중에서 성적 순으로 50명을 뽑고, 다시 신원 조회를 통하여 25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모(美貌) 순으로 다섯 명을 뽑았다.
그녀가 바로 이 다섯 명 중에서 1등으로 뽑힌 재원(才媛)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권부의 깊숙한 밤의 세계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숱한 권력자와 정객, 그리고 경제인이 있었다.
그러다가 정인숙이 임신을 했다.
태아의 아버지는 현직 국무총리인 정일권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화려한 사교 무대를 뒤로 두고
일발의 총성과 함게 밤안개처럼 홀연히 세상을 떠났을까.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설과 죽음의 사신에 대한 기사와 추적과 전언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죽음의 실체가 공식적으로 공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자료들을 이용하여 더 이상의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미녀의 인적 사항이나 미녀의 죽음은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더욱 궁금하고 더욱 이야깃거리가 되는 세인(世人)의 관심사(關心事)가 되었다.
....그 당시 정인숙의 가방속에서 고위공직자들의 명함이 줄줄이 나왔고
정인숙의 아들(정성일)이 박정희(대통령) 아들이냐 정일권(국무총리) 아들이냐
설이 분분했으나 정일권 아들이었음이 판명(친자 확인 소송)되었으나..
아직도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정인숙의 아들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아래 사진은 정인숙이 살해된채로 발견됐을시에 한국일보 기자가 찍은 사진이라 하네요
신문에는 실리지 못한채 보관되어 왔다고...
http://blog.naver.com/hyssjang?Redirect=Log&logNo=150008277316
<정리>
정인숙 사건은 1970년 3월17일 오후 11시께 서울 한강변에서 미모의 여인이 피살된 채 발견된 사건입니다. 당시 경찰은 정인숙의 사생활에 분노한 친오빠 정종욱이 여동생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려 한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정인숙은 그 동안 하는 일도 별로 없이 고급 주택에서 살고 일류 호텔과 카바레를 전전하며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평소 그녀는 자신이 모 고관과 깊은 관계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론은 한국판 '크리스틴 킬러' 사건이라고 떠들어댔고, 야당은 국회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정치 문제화하였습니다. 정일권 국무총리의 이름이 수없이 거명되었고, 심지어는 박대통령도 거론되었습니다.
이 정인숙 사건은 당시 제3공화국 고위층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위정자들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습니다. 정인숙은 이른바 고급 접대부로서 정부의 고관대작들만을 상대로 하였던 것인데, 이 사건이 터짐으로써 고위층의 부도덕한 타락상이 세상 밖으로 노출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전모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온갖 추측이 난무하였을 뿐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정치인과 고위층의 스캔들은 있게 마련이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정치생명이 끝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정확히 밝혀지기란 어려웠습니다.
정인숙사건이 발생하자 청와대에서는 웃지못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육박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육영수 여사의 '육'자와 박정희대통령의 '박'자가 합쳐져서 일어난 대통령 부부의 말다툼을 지칭한 것입니다.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는 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일권 국무총리,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 군장성, 다섯개 재벌그룹회장, 장관, 국회의원 등 27명이 연루되었습니다. 정인숙에게 걸린 남성들은 웬만하면 도망쳐야 할 정도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박정의 공화국의 요정정치가 빚어낸 전국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첫댓글 나중에 이분 아들 소송걸어서 정일권국무총리 아들인거 확인됬다면서요??? 뭐 친오빠가 죽인게아니고 안기부에서 죽인거라던데... 정말 우리나라근현대사는 진짜 영화같고 신기해요. 박정희시대도그렇고 전두환시대때나.. 진짜
박수칠때 떠나라 그거랑 좀 비슷하다
와..............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사진무섭다 ...........ㄷㄷㄷ;
사진 무서워 ㄷㄷㄷ
200여명은 어터케 뽑힌건데요? 와 겁난다 저시대는
안녕 비너스 팡 ... ㄷㄷㄷ 조낸 무섭네요 ...
어익후,,영화로 만들어도 될듯...
박정희 시대때나 지금이나 정계에서의 스캔들은 뒤로는 무지 유명하죠..펄시스터즈의 배인순인가? 그여자가 밝히지 않았나?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지만 정계에서 그 영화 가만놔두지 않을듯.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