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80) -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15년 만에 등장한 10월 태풍이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영암에서 무화과농사를 짓는 지인은 태풍전야에 마음 졸이다가 밤사이에 남해안을 스치고 무사히 빠져나간 것에 한시름 놓았다고 기뻐한다. 창밖의 촉촉한 가을비 바라보며 경로원 카페에서 나누는 국화차 향기가 그윽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우리네 삶도 모진 비바람에 끄떡없이 뿌리내리면 좋으리라.
9일은 한글날, 23년 만에 공휴일로 다시 지정된 567돌 한글날 경축식이 이날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TV로 중계되는 경축식장의 전면에는 '한글, 우리의 자랑 세계의 으뜸'이란 자막이 눈길을 끈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경축사에서 언급한 '한글은 그 만들어진 날, 이유, 창제원리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고 한류의 확산과 함께 한글을 제2외국어로 지정하는 나라들도 여럿'이라는 내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글은 세계 51개국의 세종학당에서 가르치는 국제적 언어로 자리 잡았고 유네스코에 한글창제의 위대한 뜻을 담은 세종대왕상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지난 해 실크로드 여행 중 키르키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교수와 학생을 여럿 만나 이를 확인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 만난 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경찰관이라는 그녀는 하루 동안의 여행코스에 참여하였는데 키르키스스탄의 산중에서 판매하는 벌꿀을 가리키며 '굴'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바로 잡아주니 벌에서 채취하는 '꿀'과 바다에서 채취하는 '굴'의 구별이 어렵다며 열심히 한글을 배워서 한국에 가 석사과정을 밟고 싶다고 말하였다.
김정택 한글학회장이 지구상의 많은 나라 가운데 자기 말과 글을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고 강조하는 것과 박종국 세종대왕기념사업회장이 한글은 우리 겨레 역사의 가장 빛나는 유산이라는 말이 신선하게 들린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추진하는데 앞장섰던 인사가 쓴 시론을 통하여 새롭게 알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한글은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글자다. 그런데 한글은 태어나고 500년이 지나도록 그 빛을 보지 못했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때와 그 뒤 수십 년 동안은 한글을 알리고 쓰게 하려고 애썼으나 연산군 뒤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한글은 찬밥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대한제국 고종 때 주시경 선생과 여러분이 잠깐 한글을 살려 쓰려고 하다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서 우리 말글이 사라질 뻔했다. 다행히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조선어학회가 한글날(처음 이름 가갸날)을 만들고 한글을 지켜서 광복 뒤부터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군정 때인 46년부터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한글 사랑’을 외치며 한글로 공문서와 교과서도 쓰고 한글 나라가 되려는 즈음 90년에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면서 우리 말글살이가 흔들리고 나라까지 어렵게 됐다. 그래서 한글단체가 중심이 되어 한글날 국경일 추진운동을 해서 2005년에 한글날이 국경일이 됐으나 공휴일이 안 되니 그 빛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공휴일 되찾기 운동을 해서 22년 만에 다시 공휴일이 됐다. 이젠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는 잘못을 또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이날을 잘 지켜 나가야한다.
다시 한글날이 공휴일이 됐고 한글 발전 중심지인 한글박물관도 완공됐다. 여기저기서 한글을 빛내고 한글로 더 잘살 길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거리엔 영어 간판이 늘어나고 우리 말글 속에 외국 말글을 섞어 쓰는 일이 많아 걱정스럽다. 우리가 마음먹고 하기에 따라서 한글이 빛나고 나라가 일어난다. 다 함께 한글날을 경축하고 기뻐하면서 즐기자.(중앙일보 2013. 10.9 이대로의 글)
이런 배경을 살피니 경축식에서 부르는 한글날 노래가사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이처럼 자랑스런 우리말을 바르지 않게 쓰는 풍조가 늘어나는 것이 안타깝다. 신문에서 다룬 사례를 살펴본다.
'한글날이 23년 만에 공휴일로 다시 지정된 가운데 인터넷 상에서 언어 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언어 파괴의 대표적인 사례로 무분별한 줄임말이 꼽힌다.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 '화떡녀'(화장을 떡칠한 여자),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등 인터넷에 자주 접속하지 않으면 뜻을 헤아리기 힘든 줄임말 등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심지어 'ㅈㅅ'(죄송), 'ㅅㄱ'(수고) 등 초성으로만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맞춤법, 띄어쓰기 등을 무시한 사례도 눈에 띈다. '도대체'를 '도데체'로, '설거지'를 '설겆이'로, '봬요'를 '뵈요'라고 쓰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종결어미로 '∼음', '∼했음', '하겠슴' 등을 사용하는 '음슴체', '-긔'로 마무리하는 '긔체' 등도 자주 쓰인다. "밥 먹었음?", "공부하기 싫음", "나 긔엽긔?"(나 귀엽지?), "너무 좋긔"(너무 좋다) 등이 그 예다.(중앙일보 2013. 10. 9)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저희 상담원들이 모두 통화중이십니다.' 등 잘못된 높임말과 식당의 종업원을 통칭 '이모, 언니'라고 부르는 호칭인플레도 혼란스럽다.
언어가 사고(思考)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똑바른 말, 올바른 생각의 생활화가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는 한글날 노래가사의 정신을 되살리는 지름길이 아닐까.
추신,
바른 어법을 강조하며 20여 년 전 봉직하던 학교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덧붙인다.
(광주대신문, 1994년 2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