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결실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시간? 거리? 그 모두? 다 나름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는 줄 압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그만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주 만나면 정이 들고 나아가 사랑으로 자라기 쉽습니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도 오래 만나지 못하면 점점 멀어집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이 있게 마련입니다. 일이 있듯이 사람들과의 만남이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를 만나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인연은 얼마든지 앞의 인연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본인들도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계속 가까이서 살며 교제를 이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겨우 열두 살 된 아이들의 바람이었지만 결혼해서 살았을까요? 그것도 사실 모를 일입니다. 십년, 이십년 세월 속에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가까이 지내는 것이 가능성을 훨씬 높인다는 것입니다. 서로 좋아하면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가려는 힘도 생깁니다. 앞일을 모르지만 가능성은 확실히 높습니다. 자주 보면서 정이 쌓이고 사랑이 익어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양쪽 부모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 서로의 신뢰까지 업게 됩니다. 물론 꼭 사랑만 가지고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헤어지고 12년, ‘해성’은 인터넷을 통하여 ‘나영’을 찾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연결이 됩니다. 이민 간 현지에서 나영이 이름을 바꾸어 살았기에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영이 놀라워하며 연결을 했는데 해성이 화면에 뜹니다. 놀라움? 반가움? 그런데 서로의 가는 방향이 따로 있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배워야 하고, 사실 서로가 모두 바쁩니다. 그래서 다시 따로 시간을 갖기로 합니다. 다시 12년, 해성이 나영을 만나려 미국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물론 나영이 이미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보고 싶습니다. 화면으로 본 것 이상의 실제를 보고 싶습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긴 여행을 합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 사람들 봐. 어떤 관계일까? 카페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묘합니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 그들을 보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럴 만한 호기심이지요. 한 여자를 가운데 두고 두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한쪽 편의 남자와 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른 쪽의 남자는 어떤 관계의 사람일까요? 게다가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동양인 얼굴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남녀가 남매일까요? 닮은 모습은 별로 없는데? 아니면 부부? 그러면 옆의 미국인은 누구지? 왜 그 자리에 와 있는 거지? 참으로 묘한 관계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 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 하면서 말입니다.
해성이와 나영이는 한 동네 살며 함께 학교를 다녔습니다. 마치 연인처럼 그렇게 붙어 다녔습니다. 나영이는 커서 해성이와 결혼하겠다는 꿈도 가졌습니다. 어느 날 나영이 가족이 캐나다 이민을 가게 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쿵저러쿵 발할 처지도 아닙니다. 어른들의 일이고 부모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떠났습니다. 나영이는 낯선 이국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이겨내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습니다. 어쩌면 해성이와 있을 때보다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고집하며 나아갈 수 있는 강인한 여성이 되어갑니다. 미국으로 들어와 작가의 길을 걷습니다.
외딴 곳에 들어와 원룸을 얻어 생활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 건물 안에서 거주합니다. 그리고 유대인 청년과 이웃하며 가까워집니다. 시간이 흘러 연인이 되고 결혼합니다. 나름 작가로서의 삶을 살며 성취감도 얻고 자기 삶에 만족합니다. 남편 ‘아서’도 품성이 착하고 아내의 활동을 인정해주고 서로 사랑하며 크게 부하지는 않아도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다시 해성이와 연결이 됩니다. 이제는 서로가 30대의 장년입니다. 해성이는 아직 미혼이지만 내내 그렇게 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혼한 나영이가 보고 싶습니다. 그 남편도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 그 때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13시간이 넘게 온 사람인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어? 남편은 상대 남성의 그 정성(?)에 감복하여 아내가 옛 사람을 만나겠다는 것에 기꺼이 동의해줍니다. 두 사람이 하루를 지내도록 배려해줍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자리를 같이합니다. 함께 나영이 부부의 거처까지 동행하고 헤어집니다. 나영이 해성이를 택시 타는 데까지 배웅해주고 돌아옵니다. 나영이와 해성이 길 위에서 마주하고 한참을 바라봅니다.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요? 택시가 오고 해성이 타고 떠납니다. 차창 밖으로 보는 이국의 풍경,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성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니 입구에 남편이 서서 맞습니다. 남편의 품에 안겨 흐느낍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