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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10회>
줄거리
백제의 견훤왕은 대야성 전투에서 또 다시 시련을 겪고 만다. 게다가, 의제인 추허조 장군이 태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사를 하고 만다. 그 즈음 무진주 성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에 종간과 은부는 궁예에게 왕건의 시중 벼슬을 거두고,다시 나주로 보낼 것을 청하게 된다. 한편, 연화의 모친이 자결을 하고 마는데, 한꺼번에 부모를 잃은 연화는 그예 궁예에게 독설을 퍼붓고 마는데....
씬 1 견훤의 군영(아침)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견훤이 다시 소리친다.
견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태자들을 끌고가 형을 집행하라.
신검,양검 아바마마... 용서하여주시오소서.
견훤 용서..? 용서...? 내가 분명 말하였다. 십오년 전의 그 수치를 기억하고 명예를 되찾으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상황을 만들어버렸어. 추허조를 죽게하다니. 허조를? 이놈들아, 내게는 너희들 보다 몇 배 몇 십배 소중한 아우였느니라. 어서 끌고가 처형하라. 어서...!
그러자, 부장들이 태자들을 데려가려 한다.
최필이 무릎을 꿇는다.
최필 폐하, 신을 먼저 죽여주시오소서. 태자마마님들께오선 잘못이 없사옵니다. 전사한 추장군과 신이 적의 계략을 미처 읽지 못해 일어난 일이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신덕 (무릎 꿇으며) 신들도 벌하여 주시오소서. 폐하의 위엄에 누를 끼치고 폐하의 군사들을 숱하게 잃었사옵니다. 군령으로 다스려주시오소서.
장군들이 모두 무릎을 꿇는다.
장군들 폐하, 신들도 벌하여주시오소서.
최승우 (눈치를 보다가) 폐하, 말씀올리옵건데 두 분 태자마마께오선 전투는 실패하셨사오나, 군령을 어긴 것은 아니옵니다. 통촉하시오소서.
견훤 아니야. 저희들 목숨을 살려고 추허조를 죽게 하였어. 허조를 말이야. 내 옳은 팔들이 하나 둘 다 죽어가고 있어. 지난번에는 수달이 죽었고, 이번에는 허조가 죽었어. 저 버러지 같은 것들 목숨을 살리려고 말이야.
최승우 태자마마들의 죄를 물으시자면, 다른 장수들에게도 똑같은 죄를 물으셔야 하옵니다. 어제의 전투는 패하셨사오나, 이들 모두 열심히 싸웠사옵니다. 노여움을 삭히시오소서, 폐하.
신검 용서하시오소서, 아바마마. 미처 어찌해 볼 겨를이 없었사옵니다. 워낙 갑작스런 적군의 기습을 받았사옵니다.
견훤 오, 오... 이런 일을 당하다니..? 내가 여기서 허조아우를 잃게 되다니... 오, 하늘이시여. 어찌 이렇게도 가혹하실 수가 있사옵니까? 허조를 데려가시다니요? (흐느끼며) 오, 허조야. 허조야...
모두들 폐하, 망극하옵니다.
견훤 (한탄처럼) 참으로 한스러운 대야성이로구나. 아직도 신라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도다. 천년을 버티어 온 사직이야. 내가 너무 무시하고 던벼든 것 같구나. 허나, 이대로는 못 물러간다. 제장들은 대오를 다시 정비하라. 모두 일어나라.
제장들 예, 폐하.
견훤 꼴도 보기 싫다. 태자들도 일어나거라. 너희들은 이번 전장에서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가서 뉘우치고, 반성하라. 물러가라, 이놈들아.
두태자 예, 아바마마.
비로소 일어나며 눈치를
보며 옆으로 비켜선다.
견훤은 계속 한숨을 쉰다.
견훤 악몽이로다.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어, 파진찬. 허조가 죽다니..허조가 죽다니... 오, 오...
견훤은 그렇게 계속 비탄해 한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디졸브...
씬 2 백제 황궁 외경
씬 3 동 황후전
박씨, 고비, 능환, 박영규가 함께 해 있다.
박씨 누가 죽었다고 했습니까, 지금?
능환 추허조 장군이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하옵니다. 방금 전 그런 파발이 도착했사옵니다.
고비 세상에..추장군이 말씀입니까? 추장군이 어떻게...?
박영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두 분 태자마마님을 구하시기 위해 대신 목숨을 잃으셨다 하옵니다.
박씨 뭐라고..? 우리 태자들 목숨을 구하려다가 그리 되었단 말인가?
박영규 예, 황후마마.
박씨 이런..이런...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그런 일이... 세상에 그렇다면 우리 태자들이 폐하께 또 어떤 곤욕을 치루었을꼬..?
박영규 황후마마, 전쟁이란 늘 그런 것이옵니다. 딱히 태자마마들만 혼을 내실 일이 있겠사옵니까?
능환 그것 참... 근래에 들어 파진찬 그 사람이 계속해 실수를 거듭하고 있어. 어떻게 허조의 목숨까지 잃게 한단 말인가, 어떻게..?
박영규 또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은 금성 쪽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옵니다.
박씨 금성은 또 왜?
박영규 태봉군이 무진주 성 가까이 이르러 전투태세에 돌입해있다 하옵니다.
박씨 무진주 성에서도 말인가?
박영규 그렇사옵니다. 그곳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상황이옵니다.
밖씨 ........
씬 4 나주 관아 외경
씬 5 동 관아 안
오씨와 다련군이 마주해
있다.
오씨 집사장이 돌아올 때가 되었지 않사옵니까?
다련군 물때를 맞추어 오자면, 이 삼일 더 걸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나저나, 윤신달장군과 전이갑장군이 무진주 성을 정말로 공격하려는 모양인데....큰 싸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씨 김언장군까지도 그리로 갔다고 들었사옵니다만은...
다련군 전투가 시작된다면 적지 않은 규모가 될 것이다. 당연히 모두 힘들을 합쳐야겠지.
오씨 서방님께서만 이곳으로 내려오시면 되는 일인데... 그것도 그렇게 쉽지가 않은 모양이옵니다.
다련군 그렇겠지. 한 나라의 정승이 아니더냐? 시중이라면 폐하 다음의 자리야. 그렇게 쉽게 놓고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전장이 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닌데... 우리는 군사적으로 한계가 있어요. 사실 앞뒤로 모두가 백제 땅 아니냐? 우리는 그저 이 나주만 단단하게 지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야.
오씨 장군들이 오죽 알아서 잘 하겠사옵니까? 두고 보시오소서.
씬 6 무진주 성 외경/
들판
윤신달, 전이갑, 김언이
무진주 성 쪽을 보고 있다. 성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김언 어떻소이까? 공격해볼만 하다고 하셨습니까?
윤신달 전면전보다는 한 번 소규모로 찔러 볼 필요는 있습니다.
전이갑 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쨌든 허락 없이 공격하지 말라는 왕시중의 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언 허허,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있는 것도 우습습니다. 한 번 접전을 해보시지요.
윤신달 좋습니다. 오늘 저녁을 기해 먼저 석포를 쏘아 날립시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조정에 다시 파발을 띄우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어떤 결론을 내든 내주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전이갑 암요, 한 번 적의 사정도 알아보고, 왕시중도 오시게 하고.. 일거양득입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일단 전령부터 띄웁시다.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김언 그렇게 하십시다.
씬 7 동 무진주 성 안
(석양)
지훤이 계속 고개를 외로 꼬며, 멀리 태봉군을 보고 있다.
부장1 성주님, 아무래도 태봉군이 공격을 시작할 모양이옵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지훤 그럴 모양이다. 저들이 금성을 지키는 것은 용이하지만 공격은 상당한 무리수가 따르는 것인데, 왜 서두를꼬..? 나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겠어. 어쨌든 대비를 하라. 전군에 비상을 걸어라.
부장1 이미 모두 임전태세에 들어가 있사옵니다.
씬 8 동 성 밖(밤)
어둠 속에서 세 장군이 성 쪽을 보고 있다.
김언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아니됩니다. 소극적 공격이올시다. 석포 몇 방 날려보고, 또 활을 어느 정도 날려보고.... 무리한 공격은 아니됩니다.
윤신달 물론입니다, 허허허. 자, 이곳의 총관은 김장군이니 영을 내리시구료. 우리가 좌우익을 맡겠소이다.
김언 좋습니다. 석포 부대는 뭘 하느냐? 석포를 먼저 날라라.
부장 석포를 날리랍신다.
군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펑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돌덩이가 성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연이어 쉼없이
돌이 날아간다.
불화살이 날고, 피아간의 공방이 치열하다.
그러나, 성벽을 넘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원거리 전쟁인 것이다.
군사들이 여기저기서 움직이고, 김언, 윤신달, 전이갑들이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전이갑 가까이 접근하지 마라. 석포를 계속 날리고, 궁수부대는 활을 쏘아라.
윤신달 활을 쏘아라.
씬 9 동 성 안
불화살이 날아들고, 돌이 날아 들어와 이곳저곳을
부서뜨리며 뒹군다.
군사들이 혼비백산하고,
대응하느라 활을 날리고
있다.
지훤은 계속 생각에 잠겨 있다.
지훤 놈들이 가까이 접근하지를 않고 있다. 이건 분명히 뭔가 계획적인 도발이다. 정면전은 아니야. 크게 대응하지 마라. 굳게 성을 지키고만 있으면 된다. 알겠느냐?
부장 예, 성주님.
지훤은 그렇게 계속 날아드는 돌과 화살들을 보고 있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씬 10 철원 시가지(낮)
말 두 필이 전령기를 등에 꽂고 급히 카메라 앞을
스쳐 사라진다.
씬 11 철원 황궁 외경
원극유 (E) 나주에서 그예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오이다.
씬 12 동 궁 안 시중부
왕건이 관복 차림으로 앉아 있다.
원극유가 계속 보고 하고 있다.
원극유 시중어른, 대야성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나주에서도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왕건 그 때문에 이 사람을 보자고 하셨습니까?
원극유 급한 일들은 계속 보고가 들어오고 있는데, 시중께서 댁에만 앉아 계시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뵙자 하였습니다.
왕건 다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원극유 대야성이야 신라와 백제가 싸우는 것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나주는 지역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군사의 수도 뻔하고요. 별도의 대책을 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왕건 이 사람이 시중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그 전권을 폐하께서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 때문에 어떤 지시가 있으실 지 실은 저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올시다.
원극유 하긴 그렇습니다. 저도 내원어른과 폐하의 대전에 이러한 사실들을 올렸습니다. 허나, 아직 아무런 대답이 없으십시다. 허허, 이거 참...
씬 13 동 황궁 대전
궁예가 장계를 보고 있다. 그 옆에 종간과 은부, 최응이가 보고 있다.
궁예가 혀를 찬다.
궁예 견훤왕이 다시 대야성에서 전투를 벌리고 있고, 한편으로는 나주에서도 백제군이 정면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종간 그러하옵니다, 폐하. 벌써 여러 번째 급보가 올라오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궁예 그곳은 여러 장수들이 있지 아니한가?
종간 그렇기는 하오나, 저들은 계속 왕시중이 그곳으로 왔으면 하고 청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혀를 차며) 아주 왕건아우가 이제 나주사람이 다 되었구먼. 전장이야기만 나오면 그저 왕건이라는 이름이 함께 붙어다니니 말이야.
은부 지금 저렇게 시중의 자리에 있는 것보다는 전장터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옵니다. 특히나 나주는 더욱 그렇사옵니다. 왕시중이 그곳을 우리 태봉국의 영토로 만들지 않았사옵니까?
궁예 그러니까, 은장군은 왕시중을 그곳에 보내도 좋겠다 그런 말인 것 같구먼.
종간 생각해보실 필요는 있사옵니다. 우선, 왕시중은 시중으로써의 한계를 보인 사람이옵니다. 여러 곳에서 불경스러운 일들과 관련되어 있을 뿐더러 대역죄에 관련된 의심이 지워지지 않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거야 뭐... 아직 이렇다할 사실이 드러난 것은 없지 않소?
종간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계시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사옵니까?
궁예 ...........(한숨만)
최응 ..........
은부 일단 시중의 자리는 신료 중에 으뜸인지라, 왕시중으로써는 그 자격이 없사옵니다. 전선으로 가든 아니가든, 그 자리를 폐하시오소서.
궁예 허허,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결의를 한 형제야. 그건 말이 좀 지나치네 그려.
종간 깊이 생각하시오소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라의 앞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옵니다.
궁예 그 일은 잠시 더 생각해 보기로 하세. 그리고, (장계보며) 북벌군이 그 소임을 끝내고 회군하고 있다?
종간 예, 폐하. 폐허나 다름없는 평양성 일대를 모두 평정하고 그곳 호족들을 회유하고 돌아온다 하옵니다. 이번에는 성과가 아주 큰 것 같사옵니다.
궁예 암, 이제 시작이야. 그야말로 북벌이야. 북벌... 북쪽을 정벌한다는 뜻이야. 하하하,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인가? 나는 이 이야기만 들으면, 자다가도 절로 어깨춤이 추어집니다.
종간 모두가 폐하의 복이시옵니다.
궁예 암, 그렇다면 돌아오는 북벌군을 거하게 맞아주어야지. 전쟁도 하지 않고, 땅을 넓힌 사람들이야. 모두 큰 상급을 내리도록 해야겠어. 암, 허허허허... 언제쯤 온다고 하오?
종간 이틀 뒤면 황도에 도착한다 하옵니다.
궁예 잘되었구먼. 그렇다면, 그때 황후도 같이 가자고 하시오. 그래도 백성들 앞에는 황제부부가 나란히 정이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어. 왕시중도 황궁으로 오라해서,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오.
종간 예, 폐하. 하옵고, 황후마마를 많이 위로해주시오소서, 폐하. 지금 몹시 심기가 상해 계실 것이옵니다.
궁예 달래줄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소이다. 강장자의 죽음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소이다. 국가의 죄를 지으면 누구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오. 황후의 아버지든 황후든 아니면, 태자들까지도 말이오. 그 일에 인정이나 사정은 없소이다. 나라에 관한 일이란 말이오. 나라..!
궁예의 차갑고 냉랭한 표정에서...
씬 14 황궁 마당
중문이 소리나게 열리면서 내관 하나가 달려들어
온다.
그는 계속해 전각들 사이를 지나 다시 중문 하나를
열고 들어서면 거기 내군들과 장일이 보인다.
장일이 압박하듯 그 내관을 본다.
장일 무슨 일인가? 무슨 일로 그리 허둥지둥 하는가? 어디 소속 내관인가?
내관 예, 별당 내관이옵니다. 방금 전 황후마마의 사가에서 중요한 연통이 하나 올라왔기로.... 황후전으로 가옵니다.
장일 황후전에..? 도대체 무슨 연통인가?
내관 저... 잠깐만....
내관이 어두은 표정으로
뭔가를 짧게 장일에게 귀뜸해 준다.
장일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중얼거린다.
장일 뭐라고? 대부인께서 목을 매셔?
내관 예, 부장어른.
장일 어서 가보거라. (사이) 일이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허, 그거 참...
내관은 황후전 쪽으로
간다.
당황하고 급해 보이는 발걸음이다.
잠시 생각하던 장일도 급히 어디론가 간다.
씬 15 황후전 복도
연화 (E) 지금 그게 무슨 소린고?
씬 16 동 황후전
방금 들어온 내관과 진내관이 한쪽에 서 있고, 제조와
슬이가 그 옆에 서있다.
연화는 입을 벌린 채 차마 말을 못하고 있다.
연화 다시 말해보거라. 뭐라고? 어머님이.... 어머님이 돌아가셔?
내관 예, 황후마마. 방금 전 황후마마의 사저에서 그런 기별이 들어왔기로 전해 올리는 것이옵니다.
연화 (경련하며) 네가 지금 잘 못 듣고 온 것이 아니냐?
내관 사실이옵니다, 황후마마. 여기.... (유서를 건내고) 사저에서 보내오신 것이옵니다.
연화 사저에서...? 이게 무엇이라고 하던고?
내관 유....유서라 들었사옵니다.
연화 유서..? 유서... 그렇다면 정말로 돌아가셨단 말인가?
진내관 도대체 누가 그런 기별을 들고 왔던가?
내관 마마의 사저에 사는 집사장이라 했사옵니다.
진내관 사실인 모양이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뻥해서 말을 못하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다고 하더냐?
내관 대들보에... 목을... 매셨다 들었사옵니다.
연화 (기가 막혀서) 목을 매셔..? 목을...?
내관 예,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황후마마.
연화는 넋이 나간 듯 혼자 계속 “목을...”이라는 소리를 연발한다.
그러다가, 비로소 현실이 감지되는 듯 유서를 펼쳐 든다.
그리고, 본다.
백씨의 소리가 그 위로
들려온다.
백씨 (E) 황후마마, 용서하시오소서. 이 어미는 먼저 가신 나으리의 뒤를 따라가옵니다. 이미 집안이 기울어 회복하기 어려운 대역죄인의 낙인을 받았사옵니다. 생각컨대, 가문의 위기는 갈수록 커질 것으로 사료되옵고, 이제 희망은 요원하옵니다. 지금에 와서 누구를 탓하겠사옵니까? 한때의 영광과 오랜 복락을 구분하지 못하고 현실을 잘 보지 못하신 나으리의 잘못이 너무도 컸다는 것을 알고 있었사옵니다. 두 어리신 태자가 걱정이옵고, 또한 황후마마의 앞날이 심히 걱정이옵니다. 긴 앞을 보지 못하고, 오늘날 이리 된 것을 모두 가엾이 생각하시오소서. 이 어미는 나으리께서 형을 받으신 후 불면의 날을 거듭하다가 더 이상 참기 어려워 먼저 이승을 떠나옵니다. 부디 일신을 잘 보존하시오소서.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이 글을 남기옵니다.
연화가 읽기를 마치자,
유서를 떨어뜨리며 비명소리를 길게 내지른다.
제조와 슬이가 부축한다.
제조 마마, 황후마마....?
연화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어머님이 목을 매셨구나. 어머니가...어머니가.... (통곡한다) 어머니가.......
진내관 ........ (눈을 감으며 어쩔 줄 모른다)
연화 어이할꼬... 이 일을 어이할꼬.... 그예.... 그예.... 일이 천파만파로 번지기 시작했구나. 아버님에 이어서 어머님마저 자진을 하셔....? (한참 생각하다가) 이게 그 다 미치광이 때문이다. 저 미치광이... 미륵도 아니고 황제도 아닌 저 미치광이가...
진내관 (다급하다) 마마... 고정하시오소서, 마마.. 누가 듣사옵니다. 마마...
제조 고정하시오소서, 마마. 제발....
연화 (퍼렇게 독이 오르며) 아니다.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일이 아니다. 더 이상 눈치 볼 게 뭐 있느냐? 대전으로 갈 것이다. 앞서라.
슬이 황후마마, 아니되시옵니다. 고정하시오소서.
연화 길을 열라 하였다.
제조 마마....
연화 어서, 가자. 폐하인지 인간 백정인지 내가 가서 보아야겠다.
이미 연화가 앞을 서자,
눈치를 보며 진내관과 제조상궁들이 따라 나선다.
그들은 황후전을 나가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가고 있다. 연화가 가면서 중얼거린다.
연화 이렇게는 아니된다. 그래... 어머님도 태자들을 걱정하셨다. 이대로 있으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게야. 아무도...
씬 17 인서트/ 강장자 집
외경
하인들과 하녀들이 두엇
오가고 있고, 썰렁하다.
대문에는 조등이 걸려
있다.
씬 18 동 집 안채 방
백씨가 시체로 누워 있다. 양자가 그 옆에 앉아 오열하고 있다.
씬 19 황궁 대전 복도
궁예 (E) 그게 무슨 소린고? 누가 죽어?
씬 20 동 대전
장일이 보고하고 있고,
최응이 보고 있다.
궁예 누구라고?
장일 황후마마의 어머님이신 대부인마님께서 자진을 하셨다 하옵니다.
궁예 대부인이.. ? 우리 장모님이 아니신가? 언제..? 어디서..?
장일 사저에서 바로 오늘 새벽에 그리 되셨다 하옵니다.
궁예 아니, 왜? 왜 죽었단 말인가?
모두들 .......
궁예 하긴 살다보면 더러는 그만 살고 싶을 때가 있느니라.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허망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거 참 안되었구나. 황후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장일 예, 폐하. 신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내관이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궁예 허허, 안되었다. 안되었어... 해당 관부에 전하여 장래를 후히 치를 수 있도록 도와 주라 하라. 최응이 니가 전해주어라.
최응 예, 폐하.
궁예 그거 참... 성미들도 급하단 말이야. 살만큼 산 사람들이 기껏해야 얼마나 더 남았다고 그걸 못 참아 목숨을 끊어..? 아무튼, 최응아, 그래도 이 나라 국모의 어머니가 아니더냐. 예를 소홀히 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라.
최응 예, 폐하.
바로 그때다.
대전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전내관 (E) 폐하, 황후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궁예 황후가..?
궁예는 잠시 찌푸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대전내관이 반복한다.
대전내관 (E) 폐하, 황후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궁예 뫼시어라. (장일에게) 장부장은 그만 가보거라.
장일이 대답하며 나가는
사이, 연화가 들어섰다.
연화의 얼굴엔 독기가 펄펄 끓고 있다. 궁예가 웃으며 보다가 표정이 굳어진다.
궁예 허허허, 오서오시오, 황후. 한동안 적조하였소이다.
연화 ......... (증오와 분노)
궁예 아, 이리와 앉으시오. 뭘 그렇게 보고 계시오? (사이) 아, 방금 나도 장모님 소식을 들었소이다. 거 참 안되었소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연화 어떻게냐고 하셨사옵니까?
궁예 왜 그러시오, 황후?
연화 폐하께서도 사람이시오이까?
궁예 뭐라?
최응 .........
연화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렇게 독하실 수가 있사옵니까? 내 아버지를 죽이셨사옵니다. 그리고, 내 어머니까지도 죽게 하셨사옵니다. 도대체 누구의 폐하이시옵니까?
궁예 어, 허.. 황후..? 매사에 침착하던 황후가, 이게 무슨 고얀 말씀이신가..?
연화 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장인을 때려죽이신 폐하이시옵니다. 세상 천지에 어느 사위가 그렇게 백정처럼 마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단 말이옵니까? 폐하께서 과연 미륵이시옵니까? 어떤 미륵이 그렇게 사람을 마구 때려죽이는 법이 있단 말이옵니까?
궁예 그만 하시오, 황후.
연화 신첩도 죽이시오소서. 죽여보시오소서, 폐하.
궁예 그만 하지 못할까..?
연화 .........?
궁예 나는 황후와 부부이기는 하나 이 나라의 황제이고, 법이오. 법을 그르치는 자 있으면, 누구라도 그 죄를 받게 되어 있소이다. 나를 죽이려 하였어. 나는 곧 이 나라이고, 국가야. 나라를 뒤집으려한 대역죄인에게 벌을 내린 것이오. 아시겠소이까, 황후? 역적을 처형한 것이란 말이오.
연화 폐하께서 올바로 하셨더라면 주변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였겠사옵니까? 수없는 사람을 죽이신 폐하이시옵니다. 오로지 매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폐하이시니, 사람들이 어찌 제 살길을 찾지 않겠사옵니까?
궁예 닥치지 못할까?
궁예는 있는 그 자리에서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친다. 최응은 여전히 아무 표정없이 보고 있다.
궁예 실성을 하였구먼. 황후가 실성을 하였어. 썩 돌아가오. 내 들으니 다시 회임을 하셨다지? 황실의 핏줄이오. 소중히 하시구료. 장모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나, 내 탓은 아니야. 나는 후히 장사를 지내주라 일렀어. 오늘의 일은 가서 반성하시오. 썩 돌아가오. 썩 돌아가!
연화 그래도, 아이 생각을 하시옵니까? 저주스럽사옵니다. 이러실 수는 없사옵니다. 폐하는 미륵이 아니시옵니다. 악마의 탈을 쓴 저승야차이시옵니다. 지옥에 야차도 폐하보다는 나을 것이옵니다.
궁예 실성하였구먼... 아주 실성을 해버렸어. 대전내관은 무엇 하는가? 어서 황후를 썩 뫼셔가라.
대답소리와 함께 대전내관과 내관들이 우하고 들어온다. 진내관, 제조, 슬이도 들어온다.
대전내관 황후마마, 돌아가시오소서.
연화 못 간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느니라. 나는 못 간다.
제조 마마... 돌아가시오소서, 마마.
연화 못 간다. 나는 못 간다.
궁예 어서 썩 끌어내지 못하고 뭣들 하느냐?
슬이와 제조가 부축한다. 연화가 발버둥친다.
연화 놓아라. 놓치 못하겠느냐? 놓아라...
슬이 가시오소서, 마마. 고정하시오소서, 마마.
그렇게 연화는 끌려나간다. 내관들도 다 따라 나간다. 최응이만 남는다. 궁예가 한숨을 내쉰다.
혼이 난 것이다.
궁예 허허, 참... 아주 돌아버리지 않았는가? 돌아버렸어. 사가로 치면 황제는 황후의 남편이고, 황후는 나의 안해야. 헌데, 제 남편의 걱정은 털끝만큼도 없고 제 부모 죽은 것만 원망을 해? 이런 괘씸한... 최응아, 아니다. 장례를 치르는 그 일도 놓아두어라. 저희들끼리 하던가 말던가 그냥 다 놓아둬.
최응 예, 폐하.
궁예 고얀...이런 고얀.... 내 체신과 위엄을 아주 송두리째 밟아 놓았어. 이런 고연...
씬 21 왕건의 집 외경(밤)
씬 22 동 집 사랑
왕건이 생각에 잠겨 있다. 두 유씨가 보고 있다.
태평, 능산도 함께 해
있다.
유씨 세상에... 대부인마님께서 자진을 하셨단 말이옵니까?
수인 그래도, 황후마마의 어머님이시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돌아가실 수가 있사옵니까?
왕건 그러게 말이오. 나도 조금전에야 들었소이다.
태평 폐하께오서는 황실에 인척이 없으시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외척이라고 하여 황후마마의 일가가 계시온데... 그렇게 비참하게 가문이 몰락되었사옵니다.
능산 결국은 따지고보면 폐하께서 그리 만드신 게지요.
수인 사실이옵니다. 황후마마의 아버님을 그렇게 벌하시는 법이 어디있사옵니까?
태평 그러나, 폐하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운 일이었사옵니다. 또한, 환후도 깊으셨던 데다가, 의심은 늘어나고...
왕건 세상사 참으로 무상하네 그려. 그분들은 신천 일대를 다스려온 참으로 유서 깊은 가문이었네. 우리 집안과는 너무도 가까웠어.
유씨 ..........?
왕건 그렇게들 끝을 보다니... 너무도 답답하네. 답답해.... 집안의 대를 이으려고 양자를 들였다고 들었는데... 그나마 크게 신통한 것 같지도 않고... 황후마마께서 참으로 심적 고통이 크시겠구먼.
수인 왜 아니 그러시겠사옵니까?
태평 하옵고, 주군, 황궁에서 저녁무렵에 사람이 나왔었사옵니다. 북벌군 마중을 함께 가시자고 말이옵니다.
왕건 음... (끄떡인다)
태평 아마도 황궁에서 함께 만나시어, 도성 밖으로 가실 요량이신 것 같사옵니다.
왕건 북벌군 마중은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폐하께서 납시셔야지. 그건 그렇게 준비하기로 하고, 어,허... 그걸 어찌한다..? 황후마마의 일은 참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 않는가? 너무도 가슴이 아파....
왕건의 그런 답답한 표정에서...
씬 23 박지윤의 집 사랑
박지윤 부자와 박질, 원극유, 복지겸 들이 모여
있다.
복지겸 강장자 댁의 일로 하여 온 조정이 시끄러운 것 같사옵니다. 모두들 눈치를 보며 쉬쉬하는 것이....
박지윤 참으로 안되었소이다. 그래도, 그 신천의 강장자는 세상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너무 약게 살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되었지만은, 허허, 그거 참.... 대부인까지도 목숨을 끊다니..?
박질 (조심스럽게) 죽은 사람들이야 기왕에 죽은 것이고, 황후마마가 더 걱정이올시다.
원극유 아니, 왜요?
박질 소문을 듣자하니 황후마마께서 대전으로 달려가시어 폐하께 상당한 결례를 하셨다 하더이다.
박수경 결례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박질 나도 들은 이야기이지만은 마구 독설을 퍼부으셨다는 겝니다. 욕설을 섞어가면서 말이올시다. 아주 대단했답니다.
모두들 (놀라서).....
박지윤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그토록 조용하시고 평소 침착하신 황후께서 독설을.... 그것도 폐하께 말입니까?
박질 글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참... 아무리 황후마마라고 해도 그러하시지, 폐하가 누구십니까? 그 앞에서 고함과 독설을 계속 퍼부으셨다는 거예요.
복지겸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는 그럴 수도 있으시겠지요. 졸지에 집안이 줄초상이 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원망스러우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는 하지만....허허, 그거 참...
원극유 황후마마도 그러하시지만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왕시중이 또한 걱정이 됩니다. 그토록 폐하와 가까웠던 분입니다. 허지만, 지금은 사정이 아주 많이 달라졌어요.
박지윤 그건 그렇소이다. 아주 노골적으로 공격을 받기 시작했어요. 이미 폐하께서도 상당부분 예전 같지 않으시고, 내원 그 사람이 다시 또 칼을 빼어 들었소이다.
박질 어디 그뿐입니까? 왕시중 덕분에 살아 남은 그 순군부의 임춘길이까지 내원과 한편이 되어서 왕시중을 해치려 하고 있소이다.
박지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왕시중 한사람만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 패서인들 모두의 위기올시다. 임춘길이가 누굽니까? 그야말로 아지태의 수족 같았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청주인입니다. 그 자가 목숨을 구걸하고자 내원에게 붙어 가지고, 지금 왕시중을 공격하고 있소이다. 예삿일이 아니지요.
복지겸 그렇습니다. 이대로 계속해 가다가는 분명코 왕시중은 곤란에 빠질 것입니다.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인데...
박지윤 아무튼 예사롭지가 않아요. 이 나라 돌아가는 모든 것이 예사롭지가 않아요. 여러 가지로 아주 불안한 예감이 듭니다.
씬 24 임춘길의 집 외경
씬 25 동 집 사랑
임춘길과 도우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웃고 있다.
도우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아주 재미있사옵니다. 한때는 이 나라의 국모인 황후의 집안이라 하여 얼마나 대단했사옵니까? 허나, 지금은 지리멸렬했사옵니다.
임춘길 그러게 말이올시다. 아, 나는 어떻소이까? 꼼짝없이 죽었던 목숨이 대사덕분에 살아서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소이다.
도우 이걸로 다는 아니올습니다. 하실 일이 많사옵니다, 장군.
임춘길 뭐, 하기는 그렇겠지요. 아직 내 나이 그리 많지 않으니, 분명 할 일은 많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 또한 어디 뜻대로 되야 말이지요.
도우 잘 들으시오소서. 무릇 현명한 통치자는 한쪽의 힘을 실어주는 법이 없사옵니다. 늘 견제세력을 양쪽에 갖고 있고 싶어하옵니다. 그래서, 서로가 충성을 경쟁하게 하고 그 사이에서 양쪽의 단점을 꺼집어 내 알게 되고 누가 잘하고 못하는가를 저울질 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임춘길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대사?
도우 보시오소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왕건시중이었사옵니다. 지금은 한쪽 날개가 꺾였사옵니다. 왕시중은 북쪽 세력인 패서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옵니다. 그 반대라면 죽은 아지태 그 사람일 것이옵니다. 그 사람은 청주세력을 이곳 철원으로 이주시켜서 큰 힘을 형성하고 나라까지 뒤엎으려고 했던 사람이옵니다. 이제 그 사람은 죽었사옵니다. 명실공히 장군께서 청주세력을 대표하시는 분이 되셨사옵니다.
임춘길 (도리질하며) 아니오, 아니오. 나는 이미 그 아지태를 따라 다니다가 폐하께 크게 한 번 낙인이 찍힌 몸이오.
도우 그것을 이번 기회에 벗으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저 왕시중의 자리를 빼앗으셔야하옵니다.
임춘길 어떻게 말이오?
도우 왕시중에 대한 압박을 늦추셔서는 아니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아보지 않았사옵니까? 왕시중은 그 스스로는 다른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냥 두지 않는 인물이옵니다. 죽은 아지태도 그러하지 않았사옵니까? 황제의 자리, 왕시중을 얻으려고 여러번 시도를 했었사옵니다.
임춘길 그건 그래요.
도우 왕시중은 여러 가지로 징조가 좋지 않사옵니다. 그리고, 함정에 걸려들 여지가 아주 많은 사람이옵니다. 도선비기도 그러하고, 황후마마의 정혼사실도 그러하고, 지금 우리가 집요하게 쫓고 있는 석총스님과의 일도 또한 그러하옵니다.
임춘길 음.... (끄떡인다)
도우 이 사람이 오래 절집을 떠돌다보니, 들은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석총스님도 법상종의 법제자로써 진표 율사께서 내리신 간자를 보관해온 사람이옵니다. 헌데, 그 간자의 행방이 오리무중이옵니다. 간자란 바로 부처님의 상징으로써 미륵을 뜻하는 것이지요.
임춘길 오, 그렇소이까?
도우 우리가 그것만 알아내고 밝혀낼 수 있다면, 왕건시중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옵니다. 그 자체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반역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옵니다.
임춘길 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구료.
도우 소생이 계속 알아보고 있사옵니다. 절집 소문은 크게 감출 수가 없는 법이옵니다. 자꾸 캐어들어가다보면 뭔가 나오게 되어 있사옵니다.
임춘길 역시 대사시오. 대사는 하늘이 나를 위해 내려보낸 사람같소이다.
도우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듣기 민망하옵니다. 소승은 오로지 장군께서 폐하의 신임을 회복하시고 큰 출세를 하시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 안남은 인생의 낙이올습니다.
임춘길 고맙습니다, 대사. 정말 고맙소이다, 대사.
씬 26 황궁 외경(낮)
씬 27 동 대전
궁예가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법봉을 몇 번 만지다가 놓는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
궁예 생각할수록 괘씸하지 않는가? 날보고 뭐라고..? 내가 올바로 세상을 다스렸다면 왜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겠느냐고? 그런 일.... (사이) 그러니까, 대역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그런 뜻이겠다. 그리고, 뭐 저승야차..? 백정..? 나를 보고 백정..?
궁예는 손을 부들부들 떤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린다.
궁예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들을 죽였어. 그리고, 장모의 죽음은 나의 잘못이 아니야. 실성을 한 것이야. 황후가 실성을 한 것이야. 감히 내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나라 이 제국 그 자체야. 헌데, 감히 내 위엄에 구정물을 끼얹어? 저들이 뭘 잘했단 말인가? 다시 보아야겠어. 지금까지 내가 본 황후가 아니야. (사이) 바로 그것이야.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잘 못 보아 온 것이야. 속은 것일 수도 있어. 그래, 내 사형인 내원도 어쩌면 겉만 보고 속았을지 몰라. 마음이 순결한 황후라면 저런 독사 같은 일이 있을 수가 없어. 그래, 이건 분명히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야. 암, 넘길 문제가 아니야.
뭔가 깊이 생각하는 궁예의 그런 표정에서...
씬 28 동 내원
종간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도리질을 한다. 은부가 말한다.
은부 참으로 뜻밖의 일이 아니옵니까? 대부인이 자진을 하셨다는 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황후마마께서 폐하를 그리 욕보이실 수가 있사옵니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하였사옵니다. 이미 궁안이 다 알고 있사옵니다.
종간 (혀를 찬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아녀자들의 일은 건드려서는 아니된다고 그랬는데... 폐하께서 좀 지나치셨어.
은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폐하께....
종간 좋은 조짐은 아닐세. 황후께서는 폐하의 또 다른 핏줄을 잉태하셨네. 그런데, 감정은 골이 깊어지고 두 분 사이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어. 아주 나쁜 일이야.
은부 폐하의 위엄에 손상이 갔사옵니다. 그냥 계시겠사옵니까?
종간 그게 문제일세. 이제 간신히 원기를 회복하시고 총기를 되찾아가시는 폐하이실세. 헌데, 황궁 안의 이런 소소한 일에 덜미를 잡히시면 어찌되겠는가? 막아야지. 빨리 불을 끄고, 수습을 해야지.
은부 그게 그리 잘 될 것 같지가 않사옵니다. 이미 황후마마께서는 양친을 다 잃으셨사옵니다. 결과적으로는 폐하 때문에 말이옵니다. 그 한이나 원망이 쉽게 가라 앉겠사옵니까?
종간 그러니까, 답답하다는 것이야. 우리가 나서봐야지. 어찌하겠는가? 더 이상 일이 진전되서는 아니되네. 폐하께서는 지금 긴장을 놓지 못하고 계신다네. 모든 것을 의심하시고, 모든 것을 다시 보시고 계시는 중일세. 환후에서 깨어나시면서 그리 되셨어.
은부 소인도 느끼옵니다.
종간 이때가 아주 중요한 때인데, 일이 자꾸 엉뚱한 곳으로 꼬이고 있지 않는가? 이 중요한 시기에 말일세. 그것도 황후마마 때문에... 허, 이런....
씬 29 황후전
태자들이 눈물을 닦으며
화장기 없이 앉아 있는
연화를 보고 있다.
연화는 중증 환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슬이, 제조, 진내관이 보고 있다.
청광 어마마마, 말씀들었사옵니다. 얼마나 애통하시옵니까?
신광 어마마마, 얼마나 슬프시옵니까?
연화 ........ (눈물만 흘린다)
청광 아바마마는 무서운 분이시옵니다. 미륵님을 화나게 하지 마시오소서. 어마마마가 걱정되옵니다.
연화 미륵이라고..? 그래, 폐하께서는 스스로 미륵이 되신 분이시오. 스스로 말이오. 인간이 하늘에 사는 미륵에 대들 수는 없지. 허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태자?
진내관 .......
연화 태자들은 잘 들으세요. 할마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태자들의 아바마마이신 폐하의 손에 죽는 것이 두려워 미리 가셨습니다.
진내관 (보다 못해) 황후마마..?
연화 (계속) 할마님께서는 이 에미의 목숨과 태자들의 목숨도 걱정이 된다 하셨습니다. 사실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죽인지 아십니까? 폐하가 말씀입니다. 이제 그 악마의 손길이 우리들 모자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화가 다시 우리에게 미칠 것입니다. 이 에미 곁을 떠나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태자들?
두태자 예, 어마마마.
연화 진내관은 듣게.
진내관 예, 황후마마.
연화 어찌되었든 어머님의 장례는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사가로 나갈 것이니 준비를 해주게.
진내관 예, 마마. 하오나, 출궁을 하시는 일은 일단 폐하께 아뢰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허락을 받아보겠사옵니다.
연화 자식이 어미가 죽어서 가보는 길이야. 그것까지도 허락을 맞고 아니 맞고할 것이 있는가?
진내관 내일 바로 북벌군이 돌아오는 날이옵니다. 장례까지는 기일이 좀 있으니 참아주시오소서, 황후마마.
연화 딱한 일이로구나. 내 신세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는고..? 이게 어디 사람 사는 모습이란 말이냐.
씬 30 왕건의 집 사랑
왕건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두 유씨는 보이지 않고,
왕신과 태평, 능산이 함께 해 있다.
태평이 놀라서 묻고 있다.
태평 지금 문상을 가신다 하셨사옵니까?
왕건 그렇게 말을 했네. 헌데 왜 그리 놀라는가?
왕신 형님, 그것은 아니되옵니다. 폐하께서 벌을 내리신 대역죄인의 집안이옵니다.
능산 아무래도 조심을 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왕건 오랜 이웃이었네. 황후마마를 떠나서 그 댁은 우리 집안과 평생 인연을 맺었던 사이야. 문상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태평 소인이 알기로는 지난 번 형을 받고 죽은 강장자의 장례 때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조문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들었사옵니다.
왕건 왜 나를 남과 비교하는가? 두 집 사이는 특별할 정도로 가까웠어. 지난번에는 강장자가 죄인으로 형을 받아 죽었다기에, 가지 못했네. 그러나, 지금은 달라.
태평 그렇지 않아도 황후마마와 관련하여 무언가 누명을 씌우려 드는 자들이 곳곳에 있사옵니다. 강장자 사건과 관련하여 폐하께서 주군을 몹시 불편해하고 계시옵니다. 그런데도 가시려고 하시옵니까?
왕건 그것 또한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는 변명일세. 인간이 돼서 자신이 취해야 할 도리를 외면한다면 그 얼마나 딱한 노릇인가? 나는 갈 것이니, 안에다 그렇게 기별을 넣게.
능산 언제... 가시려하시옵니까?
왕건 내일은 북벌군이 돌아온다하니, 그 모임을 갖고 나서 가볼 참이네.
태평 모르긴 몰라도 황후마마께서도 오실 것이옵니다. 이렇게 되면 세간에서는 더욱 더 이상한 눈으로 주군을 보실 우려가 있사옵니다. 피하시오소서, 주군. 잠시만 한 생각 돌리시오소서.
왕건 태평이 답지 않은 소리. 세간의 눈이 무섭고 폐하의 의심이 두려워서 이 왕건이가 해야 할 일을 못한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눈치만 보며 숨어 다니며 살았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 왕건이는 왕건이가 사는 방법대로 사는 것이야. 알겠는가? 군자대로라 하였어. 가야 할 길을 돌아간다면 이미 군자가 아니야.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야. 알겠는가? 나대로 말이야!!
< 110회 끝 >
(03.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