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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어떤 웃픈 결혼식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이오시프 비사리노비치 스탈린 동지께서 어젯밤 돌아가셨다. 당 위원회에서는 앞으로 7일 동안을 국제 애도기간으로 공포하는 바이다. 앞으로 이 기간 동안 애도집회 이외의 모든 집회는 절대 불허한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누구든 반역죄로 처단할 것이다. 위대한 인민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흩뜨리는 어떠한 행동도 절대 불허한다. 웃음도 안 되고 축구 경기, 결혼식은 물론 장례식도 안 된다.
1953년 루마니아의 어느 농촌 마을.
떠들썩하게 진행되던 결혼식 축제 분위기는 소련 장교의 살벌한 이 명령 하나로 돌연 얼어붙고 말았다. 결국 신랑 신부 집안의 친인척과 주민들은 압제자 소련 당국에 들키지 않도록 비밀리에 침묵의 피로연을 열기로 한다. 모든 대화와 축가는 립싱크! 사람들은 마치 무언극을 하듯 연회를 이어갔다. 소리가 난는 이유로 포크와 나이프도 치우고 음식도 손으로 먹는다. 집시 악사들은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시늉만 하며, 신랑 신부는 들리지도 않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박수는 당연히 나이롱 박수. 결혼식을 망친 신부는 결국 눈물을 흘리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신부 아버지의 큰 고함 소리!
“오늘은 결혼식 날이잖아!!!”
이 외침과 함께 ‘조용한 결혼식 연회’는 끝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누르고 있던 흥겨움을 표출하면서 연회는 다시 이전의 활기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신부 아버지의 그 한마디 외침이 거대한 비극의 신호탄이 될 줄 연회에 참석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벽을 뚫고 들어오는 소련군 탱크! 이 연회에 있던 모든 남자들은 소련군에게 끌려가고, 이후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호라티우 말라엘 감독의 영화 [사일런트 웨딩(Silent wedding)]의 줄거리다. 이 이야기가 비극적인 것은 저 코미디 같은 결혼식 이야기가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루마니아에서 일어났던 어느 마을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때문이다.
[사진] 2009년 개봉된 영화 [사일런트 웨딩]의 포스터. 비극적인 결혼식 이야기를 통해 소련 압제하의 루마니아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도 정치적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일이다. 인류 역사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큰 줄기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역사의 거대한 본류이고 정치적 사건들은 오히려 지류 같은 것이어서, 남녀의 사랑·결혼·출산 같은 일들이 정치와는 비교적 무관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은 그가 살아가는 시대의 산물이고 그 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시대의 다양한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특하고도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만들어왔다. 그러므로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정을 이루는 이런 사적인 일들조차 절대 사적인 영역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결국 문화라는 것도 들여다보면 순수하게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었다.
지금이야 결혼과 출산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지만, 그것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연인으로서의 남자와 여자가 순수하게 애정에 기초하여 결합하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매우 사적인 사랑·결혼·출산 등의 일들도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정책과 통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예를 들어보자. 중세 유럽의 영주는 ‘프리마 녹테(Primae Noctis)’라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자기 장원에 속한 농노의 딸이 시집을 가는 경우에 먼저 첫날밤을 치룰 수 있는 영주의 권리, 즉 초야권을 말하는데, 실제로 초야권을 행사했는지 아니면 그냥 그 명목으로 세금을 걷기 위해 사용했는지는 논란이 남아있지만, 영주의 농노에 대한 인신적 지배가 결혼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민족과 문화의 통합을 위해 이민족과의 결혼을 장려 혹은 강요한 일도 역사에 비일비재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서 융합을 위해 그리스 사람과 피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결혼시켰다. 그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페르시아 여성들과 수사에서 합동 결혼식을 거행했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군주이자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했다. 또한 당시 자신의 병사들 중 페르시아 여인과 동거하는 자는 빠짐없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신고한 자에게는 두둑한 결혼 수당을 지급하는 한편 지금까지 첩실 정도로 대우하던 그녀들을 당장 정실로 격상시키라고 강요하였다. 그 병사들 대부분이 마케도니아 본국에 아내가 있는 기혼자였으나 그건 큰 고려사항이 되지 못하였다.
우리 역사에서도 일제 강점기 일본 민족과의 결혼이 권장된 적이 있다. 1940년대 일제는 민족말살통치의 일환으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결혼을 ‘내선결혼’이라 하여 장려하고 표창하였다. 1940년 미나미 총독은 내선결혼한 부부 137쌍에게 ‘내선일체’라고 쓴 족자 한 점씩을 기념품으로 증정하기도 하였다. 당시 내선결혼한 부부 137쌍은 조선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경우가 106건, 조선인 여자와 일본인 남자가 결혼한 경우가 31건이었다.
결혼이 그러했듯이 출산도 개인의 의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출산이 사회 문제가 될 때 흔히 정부는 결혼과 출산을 권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강요하기도 했다. 역사에서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마련한 독신세라는 세금이 있었는데, 멀리 그리스와 로마까지 역사가 올라간다. 로마의 경우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미혼 남녀에게 수입의 1%를 독신세로 과세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 상속권한이나 선거권까지 빼앗았다. 혼자 사는 것도 자신의 온전한 자유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히틀러 통치 하의 독일도 독신세를 부과했다. 독일의 인종정책부처는 당시 “당신이 독일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순수 독일 혈통과 결혼해 최소한 4명 이상의 아이를 낳아라. 아이들을 조국의 미래 자산으로 만드는 게 독일인의 의무다”라는 결혼 관련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순수 독일계 혈통의 아이들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독신세를 부과했다. 25∼30세의 미혼의 남녀에게 연간 3파운드, 30세 이상은 2파운드를 부과했다. (우리나라의 연말정산제도도 일종의 독신세로 보는 사람도 있다. 결혼해서 부양가족을 많이 거느리면 세금 혜택을 주는데, 그렇지 않으면 세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내기 때문이다.)
이 방면으로 최악의 인물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였다. 1965년부터 89년까지 루마니아를 통치했던 그는 “태아는 사회의 재산”이라며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은 국가의 영속성에 반기를 드는 배신자”라고 규정하며 낙태와 피임은 물론 성교육까지 금지시켰다. 또한 자녀 할당제를 두어 한 가정 당 4명 이상 자녀를 출산하게 했으며, 이혼이 출산율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이혼 금지령을 내렸다. 심지어 일명 ‘월경(月經) 경찰’로 불리는 공무원들이 직장을 돌며 피임과 임신 여부를 검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만약 여성이 임신에 두세 번 실패하면 그 부부에게 ‘금욕세’라는 황당한 세금을 매겼는데 연 소득의 25%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던 1989년 루마니아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차우셰스쿠를 총살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라는 영화를 권한다.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2007년 영화로 1987년 당시의 루마니아를 그리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대생이 정부의 낙태 금지 정책을 피해 극비리에 불법 낙태 수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낙태 수술하는 것이 무슨 독립운동 하듯이 목숨을 걸고 해야만 했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 현실을 담은 영화이다.
[사진] 왼쪽은 문화혁명기 중국의 결혼식 모습으로 영화 [인생]의 한 장면이다. 오른쪽은 결혼식 후 만수대 동상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 앞에 꽃을 헌화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부부의 모습이다.
결혼과 출산 정책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결혼식만 해도 그렇다. 결혼식은 두 부부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사적인 행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혼하여 형성되는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가 되는 것이므로 전체주의, 국가주의 또는 독재를 지향하는 권력자 혹은 정부 입장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놔두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국가권력은 새로운 부부와 가정에 대해 권력이 지향하는 새로운 인간형(人間形)을 길러내는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결혼식은 매우 공적인 행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국가들의 결혼식에는 국가주의가 깊숙이 침윤되어 있다. 문화혁명기(1967∼76년) 중국의 결혼식 풍경을 들여다보자. 그 시기 중국에서는 ‘혁명화된 결혼식’을 통해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졌다. ‘혁명화된 결혼식’이란 신랑 신부가 마오쩌둥 사진에 절하고 피로연에서 마오쩌둥 어록을 예물로 주고받고 암송하거나 하객과 함께 마오쩌둥 저작을 학습한 소감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반동으로 몰리게 된다. 북한의 결혼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식 후 북한에서는 반드시 가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만수대 언덕이다. 새로 부부가 된 두 사람은 그곳에 있는 김일성·김정일의 동상에 꽃을 바치고 절을 한 후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일종의 신고식인 셈인데 결혼이 당과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충성하는 새로운 ‘세포조직’이 만들어졌음을 공인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혼식 풍경을 종합해 본다면 결혼식에서 특정 국기, 특정 인물의 어록이나 동상이 어른거리면 그 나라는 독재국가이거나 전체주의 국가임이 틀림없다.
출산과 결혼에 개입된 국가주의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필자가 수집한 일련의 결혼사진들 때문이다. 결혼 기념사진들을 보면 시기별로 약간씩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그 시대 나름의 유행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식 때 입는 복장의 변화를 살피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지만,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결혼 기념사진들이었다. 한 장만 우연히 그랬다면 잘 몰랐을 터인데, 이런 유의 사진을 여럿 수집해 모아놓으니 분명히 뚜렷한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특정 시기 태극기를 배경으로 결혼식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오늘 이야기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결혼 기념사진에 대한 것이다.
[사진] 왼쪽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결혼식 사진이다. 태극기가 워낙 커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슨 관공서 행사 기념 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다. 오른쪽은 결혼식 피로연 장면으로 심지어 피로연 장소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박건호 수집 사진)
태극기 숭배의 시대
2019년 10월 어느 날 초대 받아서 간 결혼식장 가운데 만약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결혼식 시작할 때 국기에 대한 경례까지 한다면……..
다소 황당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실제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결혼식장을 배경으로 찍은 결혼 사진을 여럿 수집하였다. 다 합치면 20장이 넘을 것이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런 사진들이 한 두 장이 아니라 계속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는 궁금증이 생겼다.
언제 적 사진들일까?
먼저 1970년대 사진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국기에 대한 시책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태극기에 대한 숭배가 절정이었던 시기는 확실히 1970년대였다. 그때로 돌아가 보자.
1971년 3월 15일자 경향신문의 [돋보기]란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서울동부서는 15일 서모군(20. 서울 성동구 하일동)을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즉심에 넘겼는데. 장갑 행상인 서군은 14일 하오 5시쯤 천호동 문화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국가가 울려 나올 때 그대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것. 서군은 지날 1일부터 시작된 애국가 연주 시 지켜야할 기립예의를 어긴 첫 케이스가 된 것으로 국기 국가에 대한 예의를 모두 지켜야.
얼핏 보면 극장 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경범죄 처벌을 받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극장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그 당시 죄가 아니었다. 대신 애국가가 연주될 때 일어서지 않고 앉아 있다가 즉심에 넘겨진 것이다. 이 기사의 제목도 ‘애국가 연주 때 앉아있다 즉심’이었다. 서군이 즉심에 넘겨진 것은 1971년 3월 1일부터 시행된 정부 정책 때문이었다. 7대 대선을 두 달 앞둔 상황에서 정부는 ‘애국가의 올바른 보급과 국가에 대한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3월 1일부터 서울을 비롯해 전국 시 소재 380여 개 극장 등 공연장에서 ‘애국가 영화’를 상영토록 지시했다. 애국가 영화 상영시간은 1분 40초로 1절만 수록되었는데 상영 시에는 관객이 기립토록 했다. 이 조치가 취해진 지 보름 만에 서군은 즉심에 넘겨진 1호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즈음 박정희 대통령은 “국기(國旗)를 존중하는 일이 바로 애국이며 우리는 국기를 통해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곧 이어 문교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해 모든 행사에서 학생과 교원들이 암송해 국기에 대한 존경심을 높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박정희 정부의 국가주의·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국민들은 국가의 신민으로 국가와 국기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강요당하였다.
[사진] 국기 하강식 장면이다. 오후 6시 애국가와 함께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면 국민들은 가는 길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이러한 정부 시책이 적극 추진되면서 애국가가 나오면 바로 부동자세를 취하는 일은 극장 안뿐만 아니라 극장 바깥으로 확산되면서 ‘국기와 국가에 대한 숭배’는 일상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후 6시(동절기에는 5시)의 국기 하강식과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차렷 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 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애국가 연주를 들어야 했으며, 길을 가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부동자세로 서서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짐해야 했다. 국가 하강식 행사는 1976년 10월 4일부터 시작되었다. 최상천은 당시의 국기 하강식 풍경을 다음과 같이 신랄히 비판하였다.
이 날부터 오후 다섯 시만 되면 3천만 한국 사람이 일시에 태극기를 바라보는 석고상으로 변했다. 한 사람만 빼고……. 3천만 국민 전체 차렷! 3천만 국민 일동 국기에 대하여 경례! 인류 최대 규모의 행동 통일! 조선(북한)의 10만 집단 체조와 100만 군중대회는 여기에 비하면 초보 수준이다. 3천만이 부동자세로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우러러 보아야 했다. ‘조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면서. 안서거나 우러러 보지 않으면 역적 아니면 간첩이다……. 박정희의 국가 숭배는 국가주의의 차원을 서너 단계 높였다. 그는 고작 군대 안에서 맴돌던 일본식 국가주의를 전 국민의 일상생활 속까지 파고 들게 한 최고의 국가주의자였다.
-최상천, [알몸 박정희](사람나라, 2001) 중에서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애국가가 울리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웃지 못 할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런 코미디 같은 장면이 1970년대 이후 실제로 우리 사회의 일상 풍경 중 하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장면에 대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평이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이 장면을 단지 한번 웃어넘기는 코미디로 받아들인 것과 달리, 박 대통령은 이를 무척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2015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니까 국기배례(拜禮)를 하더라”며 “그렇게 해야 이 나라라는 소중한 우리의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애국가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런 가사가 있지 않느냐. 즐거우나 괴로우나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나온 직후 정부는 1989년에 이미 폐지된 국기 하강식 부활을 추진했으니,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1970년대 유신시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회귀하고 싶어 했던 이상향이었다. 국기 하강식 부활 추진이나 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유신 헌법의 핵심 설계자 중 한명이었던 김기춘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도 그저 이루어진 일이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럿을 모아서 보면 그것들이 결코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뚜렷한 경향성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세계가 197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2010년대 국기 하강식이라니 이것이야말로 희극, 즉 코미디 아닌가.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런 명문장을 남긴 적이 있다. 이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이다.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다음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태극기가 있는 결혼식 사진은 1970년대 찍은 것일까?
정황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70년대 찍은 것이 확실한 결혼사진들 어디에도 태극기가 보이지 않는다. 1970년대에는 적어도 결혼식장에 태극기를 달고 기념사진을 찍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진]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결혼 기념사진들이다. (박건호 수집 사진)
그렇다면 태극기 결혼기념사진은 언제 적 사진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1950년대의 사진들이다. 왜냐하면 수집한 태극기 결혼식 사진들에 다행히도 결혼식 날짜가 적혀있는 것들이 꽤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면 이 사진들 거의 대부분이 1950년대 날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태극기 결혼식’이 박정희 시대의 국기 숭배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결혼식장의 태극기는 결국 50년대 이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태극기 앞 결혼식 풍경은 일제 강점기 말기의 국가주의·전체주의 또는 군국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필자가 수집한 일제 말기의 결혼사진들에 일장기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숱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결혼식장에서 신식 결혼식을 하지 않았다.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서양식으로 거행하고 남긴 결혼사진들, 그 중 특히 일제 강점기 말기의 결혼사진에는 어김없이 일장기가 등장한다. 심지어 나치 깃발이 같이 걸린 경우, 어떤 경우에는 아예 만국기가 걸린 것도 있다. 일제 강점기 황국신민화 교육의 일환으로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 강요와 함께 ‘히노마루’에 대한 배례가 함께 강요되었는데, 그것이 결혼식장에 일장기를 걸게 한 배경일 것이다.
이런 일제강점기의 ‘일장기에 대한 배례’가 해방 이후 ‘태극기에 대한 배례’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문화와 관습은 어떻게든 그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해방 직후의 열기 속에서 태극기의 소중한 의미는 지금보다 더 했을 것이고, 게다가 갓 해방되고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국기로 제정한 것이었기에 태극기에 대한 숭배는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리라. 게다가 이승만 정부는 북쪽에 들어선 적대적인 정부에 대한 체제 대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태극기는 국민 결속의 상징으로 더더욱 강조되었을 것이다.
[사진] 왼쪽은 일제 강점기 수신 교과서의 일부다. 국기에 대한 배례를 통해 제국의 충량한 신민을 양성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오른쪽은 일제 강점기 말기의 결혼사진들이다. 위는 일장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고, 아래는 만국기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다. 일장기와 함께 나치깃발도 보인다. (박건호 수집 사진)
고천문을 아십니까?
이제 1950년대 결혼 기념사진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1950년대 결혼식 풍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950년대 우리나라 결혼식장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아예 벽화처럼 벽에 그려놓은 것도 있다. 그런데 수집한 사진 한 장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식장 정면 위에 태극기가 걸려있는 것은 여타의 50년대 기념사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사진 왼쪽에 ‘결혼식 식순’이 붙어 있다. 희미하긴 하지만 그 식순의 세 번째에 ‘국기배례(國旗拜禮)’가 보인다.
놀랍지 않은가?
결혼식에서 ‘국기배례’라니…….
태극기 때문에 국기배례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국기배례 때문에 태극기가 필요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태극기가 꼭 필요했던 이유는 국기배례 자체가 당시 예식장에서 거행되는 결혼식 식순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신부 집에서 하는 결혼식이라면 국기배례 없이 전통혼례 방식으로 결혼식을 진행했겠지만, 예식장에서 하는 신식 결혼식에는 공식적으로 국기배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일정 정도 정부 시책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싶다.
[사진]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결혼 기념사진으로 사진의 왼쪽 가운데(붉은 테두리 부분)에 당시 결혼식 식순이 있다. 아래 사진은 그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결혼식 식순을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박건호 수집 사진)
그럼 식순을 살펴보자. 희미해서 사진 속 식순을 정확히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후에 별도로 식순을 인쇄한 종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로써 당시 결혼식 식순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는데, 식순이 인쇄된 별지에 적힌 결혼식순과 사진 속 벽에 걸려있는 식순은 정확히 일치하였다. 당시 결혼식 순서는 이렇다.
‘개회식 → 신랑신부 입장 → 국기배례 → 신랑신부 상견례 → 고천문(告天文) 낭독 → 신랑신부 예물교환 → 주례사 → 내빈 축사 → 축전문 낭독 → 양가 대표 인사 → 신랑신부 내빈에게 인사 → 신랑신부 퇴장 → 퇴식’
대략 결혼식 풍경이 머리에 그려지실 것이다. 국기배례가 결혼식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식전 의례가 아니라 결혼식의 세 번째 정식 행사였던 점도 재미있지만, 신랑 신부가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지금과 비교해보면 국기배례도 그렇지만, 내빈 축사 뒤에 나오는 ‘축전문 낭독’도 생소하다. 통신의 발달로 지금은 축하의 뜻을 이메일이나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쉽게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굳이 전보문 낭독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런데 축전문 낭송 보다 더욱 생소한 것이 있다. 바로 5번째 순서인 ‘고천문 낭독(告天文 朗讀)’이다.
고천문!
하늘에 고하는 글이라…..
선남 선녀가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이 결합을 하늘에 고한다는 것이다. 이때 하늘은 전통적 의미의 신, 굳이 다르게 표현하자면 천지신명께 고한다는 개념에 더 가까워 보인다. 큰 일이 있으면 하늘에 고하고 맹세하는 것은 한국인의 오랜 전통이었다. 신라 젊은이들이 유교 경전에 대한 맹렬한 학습을 하늘 앞에서 서약하고 그 내용을 돌에 새긴 임신서기석을 아실 것이다. 이 임신서기석의 앞 부분에 ‘天前誓’, 즉 ‘하늘 앞에 서약한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이어서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만약 이 약속을 어길시 하늘에 큰 죄를 받을 것임을 맹세한다고 적어 그 약속의 굳은 실천을 약속하고 있다. 고천문 낭독은 절대자 하늘 앞에서 약속을 알리고 약속의 실천을 맹세하는 예전의 전통을 결혼식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치러진 [주자가례]에 근거한 유교적 혼례를 보면 따로 고천문을 낭독하는 절차는 보이지 않는다. 이 고천문 낭독은 언제부터 시작된 풍습일까?
우리나라에서 신식결혼은 1888년 3월 정동교회에서 아펜젤러의 주례 아래 기독교식으로 치러진 결혼식이 기원이다. 이때부터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신식 결혼식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불식화혼법(佛式花婚法)’이라는 이름으로, 천도교도 ‘천도교식 신식 혼례’가 행해진다. 그러다가 종교계를 벗어나 결혼식을 위한 전문 예식장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이런 신식 결혼식을 당시 사람들은 ‘사회결혼(社會結婚)’이라 불렀다. 이런 사회결혼이 확산되면서 지식인들 중심으로 전통혼례의 금전과 시간낭비, 허례허식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유교적 관혼상제의 타파와 풍속개량을 주장하게 된다. 그중 최남선, 박승빈, 오세창, 이은화 등의 계명구락부 회원들이 제안한 것이 ‘고천식 개량 결혼식’이었다. 하늘에 고하는 고천문을 읽은 것으로 결혼식의 대부분의 절차가 끝나는 매우 간략한 결혼 방법이었다. 여기에서 유래된 고천문 낭독이 당시 확산되던 ‘사회결혼’에 결합하여 정착된 후 해방 이후 1950년대 즈음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고천문 낭독은 인간의 결합인 결혼에 대해 천신(天神)까지 끌어들임으로써 결혼의 의미를 훨씬 경건하게 또 숭고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로 기능하였다. 그러므로 부부로서 잘 사는 것은 인간의 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까지 미치는 의무 실행이 되는 것이고, 부부 관계를 파탄 내는 것 역시 인간의 일이 아니라 신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는 일로 만들어놓음으로써 부부로서의 도덕적 의무에 서로 최선을 다하도록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천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필자는 이 고천문도 여러 점 수집해 소장하고 있다. 그 내용은 큰 틀에서는 비슷하나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고천문을 읽는 사람은 주례였다. 일부 고천문은 천지신명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게 고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고천문이라는 전통 의례의 틀 속에서 고하는 대상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문화의 융통성이자 변용성 아니겠는가?
고천문 하나의 내용을 살펴보자. 1955년 3월 15일의 결혼식에서 사용된 고천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천문
근고상천(謹告上天: 경건하게 상천에 고합니다.)
신랑 정00군
신부 신00양
양인은 하늘의 뜻을 받고 어버이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 어른을 모신 자리에서
부부의 뜻을 맺으옵고 평생 해로하는 굳은 맹서를 드리오니 상천은 조감하사
길이 흥복을 받게 하소서.
단기 4288년 3월 15일
주례 김00
[사진] 1955년 3월 15일 어느 결혼식에서 사용된 고천문이다. (박건호 소장)
이런 고천문을 살피다 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예전의 결혼식 풍습에서 이 고천문 낭독은 지금 우리 시대에 되살려보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즐겁고 흥겨운 결혼식을 추구하는 최근의 결혼식 풍토에 다소 경건함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혼율이 무척 높은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 결혼과 남녀 관계에 대해 쉽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우리가 계승할 점은 이 고천문 행사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 계명구락부 지식인들이 이 고천식 개량 결혼식을 제창했을 당시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던가? 간소하고 검소한 결혼식을 위해 제안한 것 아니었던가? 현재 우리 시대의 결혼식은 정치적인 영향은 거의 받지 않고 있지만, 자본주의 물신의 거대한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형식은 최소화하고, 경건한 의미를 부각시킨 ‘고천식 개량 결혼식’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어쨌거나 고천문 낭독,
되살릴만한 꽤 괜찮은 이벤트이지 않은가?
[사진] 이 결혼식 기념 사진에서 태극기는 가운데 자리에서 벗어나 왼쪽 귀퉁이에 걸려있다 (붉은 테두리 부분). 1950년대 식장 가운데 걸려있던 태극기는 60년대 이렇게 구석으로 밀려났다가 곧 사라지게 된다. 이 사진은 그런 변화의 과도기를 보여주고 있다. 시대 변화는 결혼식장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박건호 수집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