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흑백시대 설날 풍경>
195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나는 우리의 마지막 전통사회 모습을 엿보고 나온 50대 후반기 사람으로 그 시대를 돌아보면 마음이 푸근하다. 흘러간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된다고 했던가. 6.25의 상흔이 아직도 아물지 않고 남았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척박한 산골 마을 충청도 내고향 넘벌<넓은 들(광평(廣坪)이란 한자식 지명을 씀), 지금도 고향 사람들은 그곳 사투리로 <늠불>이라 부름>, 성인이 되어 돌아보면 그렇게 넓지도 않은 곳을 왜 넘벌이라 했을까 이해되지 않지만,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상 그래도 넓은 평지로 보여 그리 이름지었나 보다. 마을 주변에 파헤쳐진 고분에서 출토된 숟가락이나 고려장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걸 보면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임에 틀림없다. 우리 하동정씨 족보에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들어왔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정씨가 정착한 것은 400여년이 넘은 것 같다.
내 고향은 동네 입구에 국민학교가 있을 정도로 약 1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조금 큰 시골 마을이었다. 지금 고향의 모습과 대비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지만 인구와 가구수가 반 이상 줄어들어 학교가 폐교된지도 꽤 오래 되었다. 이곳도 전통적인 씨족마을로 함양 여(呂)씨와 우리 하동 정(鄭)씨가 비슷한 가구수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동산을 등진 양지담은 하동정씨가 그리고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내를 건너 너른 들가의 음지담엔 함양 여씨(나 어릴 때 해명 여씨라 했다. 충청도 억양으로 ㅓ를 ㅡ 로 발음하는 현상이 있음)들이 모여 살았다.
시골에서 명절이라야 설(슬)과 추석이다. 그래서 준비해야할 명절 음식도 평소에 비해 많다. 설이 가까이 오면 먼저 제사에 쓸 술을 담근다. 요즘 말로 가양주(家釀酒)이다. 시루에 물에 불린 쌀로 꼬두밥을 쪄 식힌다음, 밀기울을 물에 불려 가공한 누룩으로 버무려 맑은 물과 함께 큰 독에 넣어 웃방 따뜻한 아랫묵에 놓으면 자연 발효되어 막걸리가 되고 약주가 된다. 그런데 한 때 관청에서 밀주(密酒)를 단속한다고 하여 술 빚는 일을 숨기기도 하였다. 그 때 맛본 꼬둘꼬둘한 덜 익은 듯한 꼬두밥 조각이 어찌나 맛있던지... 아마 군겆질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더 맛있었는지도 모른다.
동네 남자 어른들은 모처럼 맞는 명절이기에 동물성 담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동네의 큰 돼지를 골라 잡는다. 그 잡는 모습이 궁금해 어린 꼬마들인 우리들은 졸졸 따라다니며 그 신기한 모습을 살핀다. 네 다리를 묶어 꽥꽥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돼지를 시퍼렇게 잘 갈아 날카로와진 칼로 목을 따(아마 목 부위의 동맥을 끊는 듯) 피를 받는다. 그 피에 갖가지 양념을 넣어 창자를 깨끗이 손질 한 다음 넣어 만든 피창(오늘날 순대라는 것)을 만드는데 야외 솥에 푹 쌂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를 맛보는 그 맛이란...뜨끈뜨끈한 물로 튀겨 돼지의 털을 뽑고 배를 갈라 제일 먼저 콩팥을 떼어내어 날것으로 도살 작업에 참여한 분들이 맛을 본다. 지금 생각하면 기생충에 감염은 안되는지... 하여튼 그렇게 잡아 뼈가 있는채로 필요한 사람들이 저울에 달아 나눠 가진다. 물론 고기 값은 돈으로 셈하지만 곡식으로 하기도 했다.
(현대식 차례상)
떡국을 준비하기 위해 쌀을 물에 불려 디딜방아에 빻아 물을 약간 섞어 버무린 후 시루에 찐다. 쪄서 뜨거운 가루떡을 다시 방아로 쳐서 으깬 후 손으로 말아 가래떡을 만든다. 그 가래떡이 굳어지면 칼로 썰어 떡점을 만드는데 그 복잡한 단계에 일손이 어찌나 많이 드는지 명절이 되면 그 옛날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 후 기계식 도정공장인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아 주어 그런 수고로움이 줄어 들게 되었다.
내 집엔 자수성가하시어 성실한 노력으로 부를 축적하여 동네에 존경을 받고 있는 할아버지의 솜씨가 좋으셔서인지 디딜 방아도 있고 맷돌도 있어 명절 전부터 이웃의 많은 집들이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맷돌에 갈기도 하고 쌀을 디딜방아에 빻아 가는 등 바쁘게 돌아갔다.
또 작은 설날은 전을 붙인다. 우린 어릴 때 적을 붙인다라고 했는데 오늘날 붙인개 또는 빈대떡이라고도 한다. 밀가루를 묽게 풀어 부추(우린 정구지라 함)를 넣어 버무린 것을 넓은 철판 밑에 불을 때어 달 군 위에 참기름을 칠한 후 붙인 적이 음식 준비에 바뻐 차리지 못한 끼니를 대신하기도 한다. 저녁엔 다식판에 다식을 박아 만들기도 하고 남자들은 물에 불린 밤을 치기도(껍질을 벗겨 예쁘게 깎는일) 한다.
지금 생각하니 이렇게 제사상을 준비하기가 복잡하여 많은 손길에 무척 바쁘기도 했으니 그 시절 종가집 며느리나 여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술도 걸러 놓아야 하고 떡국에 넣을 꾸미(고명을 그렇게 얘기함)도 만드는 데 옛날에는 꿩고기를 썼다지만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대개 닭고기를 썼다. 또 일부 잘 사는 집에선 소고기를 썼는데 모처럼 먹는 소고기에 누룩내(노린내의 사투리)가 너무 나 먹지 못했던 기억도 난다. 아마 그 냄새를 제거하는 조리법을 몰랐던듯하다.
우리 꼬마들은 평소에 옷을 사입지 않다가 설이나 추석이 가까워 오면 10리(약 4km)나 떨어진 학산장(鶴山場)에 가 설빔으로 양복을 사 주셔서 입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깨끗이 빨아 다려논 옷으로 갈아입기도 한고...
설날 아침이 되면 아직 미명(未明)인데도 세배꾼들이 기침을 하며 찾아든다. 늦잠을 잘 수도 없어 얼른 일어나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며 세수를 끝내고 새옷으로 갈아입는다. 우리 마을엔 제사 전에 동네 어른을 찾아 세배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동네에선 제사 후 세배를 다녔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동네 고유의 풍습이었나 보다. 하옇튼 우리 동네에선 먼 친척까지 나이든 어른들은 꼭 집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세배를 안오면 서운해 할 정도로 같은 씨족끼리 가깝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제사가 끝나면 성이 다른 이웃 여씨네 어른에게도 세배를 다녔다.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리면 대개 앉아서 받기도 하지만 어떤 어른은 함께 반절로 받아주시며 절이 끝난 후 손을 잡고 덕담을 해 주신다. 오늘날처럼 세배돈이 없어도 서운하지 않았던 그런 훈훈한 정이 넘치는 그런 세월도 있었다.
얼추 세배가 끝나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큰집으로 향한다. 돗자리로 북쪽 뒷문을 가리고 큰 상도 없어 정갈한 돛자리를 펴고 그위에 4대인 고조부까지 책이나 판에 지방을 써 붙인다.그 지방을 보면서 할머니들을 본관으로 구분을 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이상했다. 이제 막 한자를 익힌 우리에게 지방에 쓰인 한자는 자연 관심의 대상이었다. 고조할머니는 해평길씨(海平吉氏)요, 증조할아버지는 지방이 석 줄인 걸 보면 장가를 두 번 드신 것으로 옥천전씨(沃川全氏)와 백천조씨(白川趙氏)이시다. 옥천 전씨 할머니가 결혼 후 일찍 돌아가셔서 그리 되었단다. 나중엔 안 일이지만 할머니들의 성씨는 멀지 않은 마을의 집성촌 성씨와 같은 것으로 보아 멀지 않은 이웃마을에서 시집오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정성들여 장만한 제수 음식을 웃방에서 아랫방으로 내려 놓으면 고조부부터 차레로 제사 음식을 차린다. 그 땐 홍동백서(紅東白西)는 몰랐어도 조율시이(棗栗枾梨)는 알아 대추가 제일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알았지만 차릴 때만 기억되고 다시 제사지낼 땐 왜 기억나지 않던지...그래서 지금도 음식 진설은 어림짐작으로 올리지만 구분하기 참으로 어렵다. 큰 집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우리 일가에 대사(大事 큰 잔치)가 있으면 음식 만들기를 진두 지휘하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진설(陳設)한 음식을 살핀 후 큰 집 할아버지가 제관(祭官)이 되어 차례를 지낸다. 제관은 순서에 따라 여러번 절하나 우린 초헌(初獻)과 종헌(終獻) 후 두 번의 절로 끝이 난다. 우리 가족의 제사에서 축문(祝文)을 읽은 기억은 없다. 이 때 절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아주 정성을 다해 품위 있는 동작으로 정성을 다해 절을 하는 분도 있지만 촐싹대며 빨리 해치우는 아이들도 있다. 절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행동 법도(法度)를 읽을 수 있겠다 싶다. 제사가 끝나면 제사에 올린 술을 음복(飮福)하라며 한잔 씩 권한다. 물론 어른에 한해서다. 그리고 삥 둘러 앉아 먹는 떡꾹맛은 일미(一味)이다. 배를 불린 후 서둘러 두 번째 제사를 지내는 우리 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차례로 작은집까지 3번의 제사로 끝을 맺는데 세 번째 지내는 작은집에선 배가 불러 음식이 많이 남는다.
점심때가 얼추 되어 제사가 끝나면 아직 세배를 못드린 집을 찾아 마저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모처럼 외지에서 온 친척들과 음식을 나누며 정담(情談)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동네의 씨족간 암묵적인 갈등이 이중과세(二重過歲)로 나타났다. 한 동네 살면서 함양 여씨는 음력설을, 우리 하동정씨는 양력설을 쇤다. 어른들이 자세한 이유를 말해주시지 않았으나 하동정씨들은 일제시대부터 당국의 권에 순종하여 양력설을 쇠다가 광복 후에도 외지에 있는 후손들이 휴일로 된 양력 설날 고향을 찾아 함께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어졌다. 함양여씨들은 우리의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음력 설을 쇠었는데 가까운 이웃끼리는 음식을 여유있게 하여 떡국을 끓여 돌리기도 하며 나누어 먹어 한 동네에서 2번의 설을 쇠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여씨들이 양력 설날 아침 마을 골목길에 똥장군을 지고 지나가며 냄새를 품긴다고 푸념하는 어른들의 소리를 들을 때 두 집안간의 암묵적인 갈등의 이면이 보이는듯 했다..
그래서 가형(家兄)께서는 양력설날 오셨던 조상님들 혼령을 어찌 음력설날 모실 수 있냐며 양력설을 고집해 우리 집은 지금도 양력설을 쇠고 있다. 요즘은 설날이 연휴가 되어 여유있게 지내지만 그 시절엔 음력설이 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서둘러 차레를 지내고 등교해야 하기에 여씨 성을 가진 친구들은 설날 지각하기 일쑤였다.
이 때쯤이면 멀리서 풍물소리가 난다. 마을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괭과리 등 풍물악기를 꺼내 조율(調律)을 시작한다. 그러면 마음은 벌써 풍물패에게로 가 있다. 눈이라도 풀풀내리면 제격이다. 각자 맡은 악기로 조율을 마친다음 대오를 맞춰 연주가 시작되면 마을 사람들도 꾸역꾸역 몰려든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예쁜 아가씨들도 총각들도 나와 곁눈질도 설레인 마음을 달랜다.(그러나 두 씨족간의 갈등이 심해 젊은이들은 집안의 반대로 연애도 못했고 만약 연애를 한다해도 외지로 도망가 둘이 살 수 밖에 없었다) 집집이 돌며 지신(地神)을 밟는데 마당을 빙빙 돌기도 하고 집안에 있는 우물(샘터) 주위와 부엌에도 들어가고 신주단지가 모셔진 집뒤를 돌며 신나게 풍악을 울려 준다. 올 한 해 악귀를 쫒아주고 좋은 일만 가득하고 풍년들게 하는 바램을 섞어 신나게 풍물을 연주한다. 그러면 집 주인은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고 돈이나 쌀을 내놓아 마을 공동 기금으로 쓰기도 하였다. 또 구경꾼중에는 흥에 못이겨 대오에 뛰어들어 덩실덩실 춤을 추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었다.
짧은 해가 서쪽으로 너머가 어둠이 내리면 차츰 축제의 열기도 시들어 풍물패가 마지막 들른 집에서 내논 음식으로 피로를 풀고 헤어진다. 우리들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데 소복히 쌓인 눈을 밟으며 허허로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마음이란...
그 시절 물질적으로 풍족하진 못했으나 높지 않은 담과 구멍이 숭숭 뚫린 울타리처럼 마을 사람들 모두 마음을 터놓고 정답게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워 진다. 누구의 집에 들른들 반겨 아니 맞아주는이 없고 넉넉지 않은 음식이나마 있는 그대로 나눠 먹었던 그 시절 인심이 그립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떠난 훈훈한 마음을 가졌던 그 시절 어른들이 그립다. 아! 나도 지금 그옛날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들처럼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 돌아볼 일이다. 설날 허허로운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완)
첫댓글 옛 정감어린 명절 정취 잘 감상했습니다. 정말 그리운 부분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작년에 쓴 글을 옮겨 보았습니다. 이제 고향은 반의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를 위시하여 다들 대처로 떠나고...
시골에서 태어나지를 못해서 흙내음 나는 추억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 貴農이 아닌 移農을 하였지요.그러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시골에도 이런 전통적인 명절 풍습이 점차 사라져 가고있는 듯하여 아쉬움이 큽니다.한 마을의 전통과 가풍을 잘 보았습니다.
선우님, 박수를 보냅니다. 농촌에도 좀 더 과학적인 영농을 한다면 발전 가능성도 있더군요. 그러나 농사짓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을 어릴 때 부모님을 도와드리며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아무나 도전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요. 선우님 힘내시고 멋진 가풍 가꿔 나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향님,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운 가득하시기 빕니다.
자상하신 무림선생님...정겨운 마음으로 잘보았습니다 저역시 시골에서자라 시골에서 살고있지만 가끔 지나간 정다움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지금은 많이편해졌습니다 그쵸~~~늘 한생각의 작용으로 편안하십시요...
시골에서 정답게 살아가던 그 정신만은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합니다. 아직도 푸근한 인정은 살아있습니다만 조금은 삭막함을 느끼기도 하지요. 생활은 좀 부족했지만 그런 넉넉했던 인심들이 그리워 지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오래전의 설 풍경을 보는 듯 해요. 바쁜일상에 쫓겨 차례지내고 친정으로 여행지로 떠났던 일들 잠깐 뒤로 미루고 설을 제대로 만끽해보픈 마음 생기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960년대 후반 고향을 떠난 후 70년대 중반부터 명절을 도회에서 쇠기에 이젠 아련한 추억을 되돌아 보기만 합니다. 특히 제사 후 풍물을 치면 가슴설레며 따라다니던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연아님도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제 가슴이 다 훈훈합니다. 살구꽃 늘어선 흙벽돌 담장...내고향의 설날 풍경이 그립습니다. 풍물패들이 우리집 윗켠 마당에서 신명나는 놀이마당을 펼치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푸른 저고리 입고 여러 음식을 내어오시던 내 엄니는 이제...백발만 무성...............!
지리한 제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격려의 말씀감사합니다. 이제 잃어버린 옛모습의 한자락을 돌아보았습니다. 고향도 변해 이런 축제가 지금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고향에 계시는 의식이 흐려지시는 고령의 어머니가 늘 걱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올려 주셔서 날마다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삼도헌님 늘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