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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묵상글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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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성모성월 5월에 이어지는 예수성심성월 6월도 참 아름답습니다. 날로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이요 일년중 가장 꽃들이 많이 피어나는 계절이기도합니다. 요즘은 ‘밤꽃’향기가 그윽하고 얼마전에는 ‘메꽃’들을, 엊그제는 올해 처음으로 ‘달맞이꽃’을 발견했고 예전 써놨던 글도 떠올랐습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좋은 만남이 있으랴
꼬박 일 년 기다렸다 피어난 꽃이다
꼭 일 년만의 만남이다
밤꽃, 붓꽃, 메꽃, 달맞이꽃...
모든 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이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5.20.
샛노란 달맞이꽃이 참 청초하고 아름다워 병마病魔와 투쟁중인 분에게도 위로와 치유의 은총을 청하며 사진을 보냈고 반가운 답신도 받았습니다.
“올해 첫 만남의 달맞이꽃! 싱그럽고 상큼하고 예쁩니다. 정신이 번쩍듭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신부님, 달맞이꽃 위로와 축복속에 평화롭게 지내겠습니다. 살아 있음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꼭 일년 만에 때되니 피어나는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입니다. 어제 피정지도때도 반가운 꽃같은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 15명의 오전 피정 미사가 있었습니다. 휴대폰마다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드리고 베네딕도회 수도영성에 대해 말씀드렸고, 함께 행복기도문도 읽었습니다. 미사 강론중 덕담이 생각납니다.
“글로리아 ‘천사’ 성가대같습니다. 모두 흰셔츠를 입으니 천사들 같아 눈이 부십니다. 제일 아름다운 6월 예수성심성월에, 가장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러 온 여러분은 참 행복한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오늘은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의 요셉수도원 방문 축일같습니다.”
역시 젊음은 아름답습니다. 활짝 웃는 젊은 분들의 모습이 꽃처럼 예뻤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전례의 궁극적 목적이,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일년만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에도 수차례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사기도 일부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수없이 반복하여 나눈 기도문이지만 늘 새롭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사두가이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황당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받습니다.
후사가 없이 일곱 형제의 맞이가 죽자 그의 아내는 동생 여섯의 아내가 되었는데 부활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참 무례하고 불손한, 모욕적인 궤변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친절히 부활에 대해 귀한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중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는 부활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사두가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을 근거로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살았던 이들이 부활의 삶을 산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이름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니 사람눈에 죽은 형제자매들이지 주님을 믿다가 죽은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다 살아 있음을 믿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참희망이자 참기쁨임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믿고 만나는 이들에게 절망이나 원망, 실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토빗서의 토빗의 살아 계신 주님을 향한 간절하고 진솔한 참회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아내 안나에게 시달리다 탄식하며 울다가 바치기 시작한 토빗의 기도 시작부분이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토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때 정말 너무나 부끄러워 저절로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토빗입니다. 토빗의 입에 담아 참회기도를 바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토빗에 이어 불운했던 라구엘의 딸 사라에 대한 일화가 계속됩니다.
사라역시 최측근인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심한 모욕을 듣자 슬픔이 북바쳐 울면서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생략되었지만 ‘사라의 기도’도 ‘토빗의 기도’만큼이나 감동적입니다. 역시 사라의 첫 기도 말마디가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하느님 찬미의 사랑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행복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 갔던 ‘찬미의 백성들’ 이스라엘처럼, 수도자는 물론 믿는 우리들 역시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주님의 응답을 받으니 해피엔드로 끝나는 토빗과 사라의 기도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평생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죽는 그날까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계속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시편2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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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탄식이 기도가 되는 <2023.06.07. 05:19>
어제 저의 강론을 오늘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어제 토빗을 완성형 인간으로 그리고
참되고 완전한 선행의 본보기와 행복한 선행의 본보기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요지부동의 선행과 요지부동의 행복이었지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란 흔들어대도 부동 곧 끄떡없음을 말함이지요.
이것은 안빈낙도安貧樂道처럼 수행을 통해 도사 또는 완전의 경지에
올라 아무리 누가 흔들어대도 그 사랑과 행복이 끄떡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돌아보니 거기에 하느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으로 제가 토빗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토빗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욕에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께 울며 탄식하는 사람입니다.
선행의 대가가 이런 거라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탄식이 독백이 아니라는 점이고
탄식이 향하는 곳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이 인간에게 모욕당하고 저 인간에게 하소연하는 식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탄식하고 그래서 탄식이 기도가 되는 그런 식입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은 여인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부인이 될 것인지 사두가이들이 묻고 주님께서 답하시는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와 같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토빗기와 주님의 대답을 연결하여 묵상하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천사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 인간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계의 재편이 저세상에서는 있게 되고,
완전히 하느님 중심의 관계로 재편될 것이며,
그래서 다시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지금부터 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초인으로 살지 않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천사처럼,
탄식이 기도가 되는 천사처럼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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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지혜’의 자유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왜곡된 믿음)를 두 가지로 지적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입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에 있어서,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기에,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지고 듭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하느님 능력에 대한 무지’는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생각’(왜곡된 신앙)에 갇혀 속박된 영적무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며,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시고,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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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무엇보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유식한 무지를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주제를 알고 살리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은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는 예수님의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희망에로 이끄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의 삶은 이 세상의 산고를 겪으며 기쁨과 평화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온갖 세상 것에 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늘을 인내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기쁨 속에 산 이들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빕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분을 죽음까지도 극복하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12,27)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손희송).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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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억울(抑鬱)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통이 안 되고 꽉 막힌다는 의미입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없는 한자입니다. 영어로도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이 억울함이 쌓이면 병이 되는데 ‘화병(火病)’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한국에만 있는 표현입니다. 성서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의 질투 때문에 죽었던 아벨의 ‘피’가 있습니다. 엄마와 동생의 계략으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사오도 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이집트로 팔려갔던 요셉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였지만 파라오의 명령으로 죽어야 했던 히브리인들의 남자아기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만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도 있습니다. 다윗의 욕망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었던 우리야도 있습니다. 아합왕의 욕심 때문에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었던 나봇도 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갖은 고난과 고통을 당해야 했던 욥도 있습니다. 성실하게 살았지만 눈이 멀었던 토빗과 열심히 살았지만 조롱을 받아야 했던 사라도 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모욕을 당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억울함을 아시고, 풀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억울함 때문에 화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억울함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잘못과 허물을 성찰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실 메시아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메시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는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풀어 주셨습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직선의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환하는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함께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정점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마른 잎 다시 살아나”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 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벗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땅 위를 기어 다녀야 했던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듯이 언젠가 우리는 오욕과 시기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좌절과 절망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믿음과 희망의 날개를 펴서 사랑의 나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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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성당, 피정의 집, 성지, 성체 조배실…. 이런 곳을 우리는 기도하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곳으로 떠올립니다. 실제로 이런 곳이 도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더 쉽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런 곳에서만 계실까요?
우리가 많이 바치는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성당에만 계신 분도 아니고, 피정의 집이나 성지, 성체 조배실에만 계신 분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에는 안 계신다는 것일까요?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있습니까? 물론 실내에 있으면 자기 눈에 하늘이 보일 리 없겠지만, 이 건물 위에도 하늘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가 잘 보입니다. 나의 시력 때문에 잘 안 보일 뿐이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서도 계신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려면,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두가이들은 스스로 이런 함정에 빠져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지상의 삶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맺은 살아 있는 관계에 속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람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을 세상의 논리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세상의 판단 아래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한 원하는 참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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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행운의 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그 별이 있다. 불행은 자신의 별을 알지 못하기에 찾아온다(발타사르 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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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같은 질문을 하는 사두가이를 제가 만났다면 저는 그들과 대판 싸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두가이의 질문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곱 남자와 삶을 살았던 그 여인은 무슨 죄야! 원하지 않는 사람과 삶을 살라고 했다면 그것 자체로 지탄받아야 하는 사회법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한 여인의 삶을 이렇게 하찮게 여길 수 있지?
자유도 존중도 없는 것인가?
이렇게 말하며 그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주요 내용은 예수님 시대의 ‘여인의 삶’이 아닙니다.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다른 나라의 장례미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로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장례미사 안에서 그들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기뻐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하늘나라로 들어감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장례미사 안에서 춤을 추고 기뻐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이 가진 신심은 이것입니다. ‘이곳도 하느님이 만드신 하느님 나라이고, 저곳도 하느님이 만드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곳의 삶이 끝나고 내 가족은 다른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라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이곳 하느님 나라에서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저곳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우리에게도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사회적 동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알고 계시지요.
이 말을 풀어보면,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어떤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이란 뜻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보면,
그래서 인간은 그 집단을 위해 자가를 포기할 줄 아는 동물이란 뜻입니다. 즉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새겨져 있는 내적 생활양식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보와 배려입니다.
인간으로 동물로 태어난 모든 사람 안에는 이것이 들어있습니다.
양보와 배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은 양보와 배려라는 내적 힘으로 함께 살아갑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양보와 배려가 늘 우리가 속한 집단을 행복과 기쁨으로 인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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