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트, 상처를 꿰매다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2012)
전다형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만에 묶은 시집, 함량미달 미숙아 낳고 부끄럽다. 나를 낳은 어머니의 노산을 속절없이 물려받았다. 내가 부끄러워한 어머니보다 십 년 더 늦은 어미가 되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시집은 이 늙은 어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나는 ‘늦’자와 인연이 많다. 아버지 마흔아홉 어머니 마흔셋 막내로 태어났다. 무엇이든 ‘늦’되었다. 초경도 늦었고 사춘기도 늦었으며 철도 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늘 더디게 자랐다. 세상 문리도 터지지 않아 등단도 늦었다. 2002년 칠전팔기 끝에 찾아온 등단, 세상을 다 얻었다, 기쁨도 잠시 내 시살이도 이런저런 우여곡절 다 겪느라 늦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트라우마가 많다. 내 마음 저 밑바닥을 가만히 짚어보니 늘 배가 고팠다. 울음이 가득 고여있다. 젖배 고파 우는 떼울음이 시도때도없이 쏟아졌다. 눈두덩은 자주 짓물렸다. 노산의 엄마는 무쇠솥에 밥을 지을 때 밥솥 안에 빈 그릇을 복판에 넣고 밥을 지었다고 미안해했다. 넉넉하게 부은 밥물이 끓어 넘쳐 고인 물로 밤죽을 만들어 어린 젖배을 채웠다고 했다. 빈 젖 무덤가를 울며 보채는 그 아득한 허기의 공간, 내 시의 근간을 이루는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법, 나는 아직 그걸 모른다. 모든 영양을 다 갖춘 어머니 초유 한 방울 먹지 못한 나는 늘 잔병을 앓았다. 나는 부모님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자랐다. 나는 그런 늙은 부모님을 부끄러워했다. 친구들을 엄마를 할머니라 놀렸다. 옷도 늘 무채색만 입으셨다. 그런 부모님이 싫었다. 맏이로 태어난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나 났다. 곱슬 파마에 꽃무늬 치마저고리를 입고 학교에 찾아오는 친구 엄마를 보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언니 손을 잡고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 여린 가슴에 대못을 쳤다. 왜 늦게 낳았느냐고…… 언니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떼를 쓰고 우는 딸을 안고 어머니도 많이 우셨다. 참 철이 없었다. 출석보다 결석이 잦았던 잔병치레 막둥이 등하굣길 목말을 태워주셨던 아버지, 그 든든한 목말, 아버지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아버지 죽음이 내 꿈의 어린 싹을 모질게 꺾어버렸다. 소나기로 퍼붓던 사랑은 짧았다. 소꿉친구와 뒷동산과 감나무에 맨 그네를 두고 이사를 했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나는 학교근처 자취집에 끈 떨어진 연처럼 어처구니없는 맷돌처럼 남겨졌다. 웃음이 많던 소녀는 사랑보다 슬픔을 먼저 배웠고 기쁨보다 아픔을 먼저 배웠다. 학습 없이도 어린 나에게 아버지 빈자리, 죽음의 능선은 너무 높았다. 도둑과 같이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 늘 불안을 내 머리끝까지 덮어 쓰고 잠이 들곤 했다. 쓰러져 눕던 가문을 일으켜 세울 그 어떤 칠 채도 없었다. 온 세상이 정전이었고 하늘이 빙빙 돌았다.
무서움이 많았던 엄마는 집이 무섭다고 무작정 고향을 떴다. 그 무서운 고향 근처, 혼자 떼어놓은 어린 막내딸을 만나러 오는 길이 얼마나 아득했을까. 사별과 생이별의 길목에서 서성이는 엄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 이별이 너무 컸고 내 상처가 너무 깊어 어머니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상황이 싫었다. 늙고 초라한 엄마가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조차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간 완행버스를 타고 오던 엄마를 날마다 울며 기다렸다. 자주 오지는 못했다. 엄마가 깜짝 자취집에 온 날은 온 세상이 켜졌다. 내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엄마도 그랬으리라. 오랜만에 엄마가 온 날이었다. 자취집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얼른 어린 막내딸이 보고 싶은 마음에 교문 앞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셨다. 멀리서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늙고 초라한 엄마를 볼까 봐 나는 교실에 숨어 다른 친구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 해가 다 기울고 교문을 나왔다. 애간장을 다 녹인 못된 내 행동을 눈치챈 엄마는 원망 대신 딸을 안고 풀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날 밤 아버지 서둘러 간 원망이 참 길었던 것 같다. 어머니 쉰일곱이었다. 대못만 치던 어린 나를 참 많이 의지하셨던 것 같다. 늘 앓는 생손가락이었던 막내딸 겨우 철들자 어머니 떠나셨다.
내 첫 시집 『수선집 근처』는 생의 수선물로 북새통을 이룬다. 규격에서 잘리고 자격에서 밀린 자투리 천들을 이어 붙이거나 덧대고 박음질한 퀼트와 닮았다. 내 울어본 날과 웃어본 날을 덧대고 그리움과 슬픔을 이어 붙이고 한 땀 한 땀 박음질로 꿰매는 동안 내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시간만 나면 포목점을 기웃거린다. 알록달록 꽃무늬 자투리 천들을 싸게 끊어다 꽃무늬를 따라 오려내기도 하고 별이나 달이나 해를 만들기도 한다. 퀼트는 내 소꿉놀이의 연장이다. 그 소꿉놀이 속에 내 시 쓰기의 근간은 이룬 어머니의 금기가 있다.
어느 날 앞집에서 제사 음식을 덮은 하늘색 체크 면 보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 보자기로 운동회 때 입었던 고무줄 팬티를 만들고야 말았다. 살그랑, 살그랑 가위질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평면적인 사각 천을 펼쳐놓고 입체적인 재단을 했다. 허리 고무줄을 넣고 두 다리 고무줄을 넣었더니 딱 맞는 운동회 체크 팬티가 만들어졌다. 세상을 다 가지는 듯 기뻤다. 내 첫 예술작품이 태어났다. 교복 치마 안에 입고 학교에 가 치마를 걷고 자랑을 했다. 신기해하는 친구들의 그 눈빛을 아직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의상디자이너가 된 듯 참 뿌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 집안 난리가 났다. 음식을 먹고 돌려줘야 하는 보자기가 어머니 밭일 같다 돌아온 사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몰래 훔쳐 만든 팬티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며칠을 조마조마 갈등하다 사실을 털어놓았다. 엄청 혼이 났다. 어머니는 오일장에 가 새 천을 사 보자기를 만들어 돌려드렸다.
그 후 나를 반짇고리 근처도 가지 못하게 했다. 바늘귀를 통과한 외줄 실이 지나가고 나면 평면이 입체적으로 변했다. 그 반짇고리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혼자 놀 때는 늘 반짇고리를 몰래 꺼내 무엇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내 창작의 기미가 시작 되었는지 모른다. 결혼이 어머니 금기를 풀었다. 키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둔 어머니 반짇고리를 뛰어넘는 반짇고리가 생겼다. 총천연색 실과 크고 작은 굵기의 바늘과 스텐 가위로 퀼트를 시작했다. 자르고 남은 자투리 천들을 잇대고 덧대어 지갑을 만들고 가방을 만들었다. 내 첫 시집 『수선집 근처』도 그러하다. 상처를 꿰맨 치유의 흔적들로 북적인다. 삶이 그린 등고선을 따라 한 땀 한 땀 시어(詩語)가 걸은 흔적,
한 통의 편지가 헤엄쳐 왔다//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 속에 잠긴//그대 깊고 넓은 마음의 바다//그리고 청어 한 마리//“세파를 거스르는 일은 상처투성이//그러나 상처도 무늬로 남아//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청어를 굽는다//아픈 상처들이 따뜻하게 익는다
―「청어를 굽다 3」 전문
「청어를 굽다」연작시 여섯 편이 쏟아졌다. 내 안에 상처들이 꽃으로 피기 시작했다. 시를 쓰는 일이 내 치유의 시작이었다. 어두운 바늘귀에 어눌한 언어를 끼우고 상처를 기웠다. 나침반이 없는 생의 바늘땀은 바른 길을 자주 놓쳤다. 갈팡질팡 에둘러온 가장자리가 미어터지기도 했다. 상처가 상처를 껴안는다는 것과 나와 너와 당신을 잇고 서로 스미고 스며들게 한다는 것을 퀼트를 통해 배웠다. 내 첫 시집 『수선집 근처』도 그런 맥락에 닿아있다. 반듯하고 온전한 것들보다 소외되고 버려진 것들의 상처를 꿰매는 시 쓰기에 생을 걸 것이다.
—계간 『시에』 2013년 봄호
전다형
경남 의령 출생.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