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 {사상의 꽃들} 15에서
낫
김기택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같다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라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에서
낫이란 무엇일까? 낫이란 풀과 나무와 곡식을 벨 때 쓰는 ‘ㄱ’자 모양의 도구이며, 농경민인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도구라고 할 수가 있다. 낫이란 칼의 한 종류이며, 농업용으로 쓰일 때는 매우 유익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타인들과 동물들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흉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김기택 시인은 인간을 사물화시키거나 사물을 인간화시키는 제일급의 대가이며, 그는 극사실적인 시선으로 어떤 인간과 사물의 전모를 꿰뚫어 보고, 그 대상의 특징을 잡아내 아주 우스꽝스럽게 희화화시킨다. 낫이라는 칼은 천하제일의 명검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살생을 일삼는 조직폭력배나 ‘포정의 칼’도 아니다. 김기택 시인의 ‘낫이라는 칼’은 “안쪽으로” 휘어져 있고,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낫이라는 칼은 매우 소심하고 우스꽝스러운 바보와도 같으며, 따라서 그 공격성을 무화시킨 채, 자기 자신을 향해 웅크러 들고 있는 것이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같다/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라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라는 시구가 그것이며, 낫은 낫이라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며, 무언가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낫은 칼이고, 칼이란 그 무엇인가를 단번에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임전무퇴이며,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웅크러 들어서는 안 되며, 낫의 가치와 사명을 완수하고 낫의 명예를 위해서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낫이 낫이기를 멈추고 그 공격성을 무화시킨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그 무슨 영웅과 그 문화가 필요하단 말인가?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가 아니라 수많은 타인과 적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
나는 낫이라는 칼을 들고 일제식 암기교육과 수많은 입시학원과 사교육비의 목을 베고, 모든 족집게 과외와 맞춤형 교사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릴 것이다. 첫 번째도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고, 두 번째도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원생까지, 회사원에서부터 우리 학자들과 늙은 노인들까지 전인류의 스승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기 자신을 높이 높이 끌어올릴 수 있는 일등국가의 일등국민의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일제청산을 외치지 않아도 일등국가가 될 것이고, 남북통일을 외치지 않아도 남북통일을 이룩해낼 것이다. 낫이라는 칼로 모든 잡초와 독초들을 다 베어버리고, 우리 한국정신과 우리 한국문화의 힘으로 전세계인들의 끊임없는 존경과 찬양을 이끌어낼 것이다.
낫이라는 칼, 대범하고 천하무적의 상승장군의 낫이라는 칼, 늦가을 황금들판에서 쌀을 수확하듯이 ‘지혜라는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낫이라는 칼----.
낫이여, 낫이여!
천하제일의 최고급의 사상가의 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