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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트라우마를 해체하라! - 모세 이야기 / 김지철 목사
본문: 출 3:4~5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성공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열심히 노력해서 결실을 맺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복된 측면이 있는 반면 위험성도 내포돼 있습니다.
성공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성공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또한 큰 축복입니다. 반면, 성공의 축복에만 안주하면 삶 전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실패의 나락에 빠져 드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몇 해 전 사울 왕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버드대학교 심리학자 스티븐 버글래스(Steven Berglas)의 저서 『성공증후군』에 나온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들이 네 가지 A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를 ‘4A’로 표현했습니다.
첫 번째는 Arrogance입니다. 교만, 오만방자라는 뜻입니다. 즉, 성공한 사람들이 교만하고 오만방자해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Aloneness, 외로움입니다. 성공만을 추구하다 고립주의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대화를 기피하고 자기 안에 함몰됩니다. 세 번째는 Adventure seeking. 즉, 파괴적인 모험만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Adultery, 간음입니다. 성적인 쾌락에 자기를 매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이 네 가지 바이러스 중 세 가지에 감염되었습니다. 처음 왕위에 오를 때만 해도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오만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무시할 정도로 방자해졌습니다. 그러자 대화 나눌 참모들도 그의 곁을 떠나갑니다. 왕위에 있던 내내 다윗이라는 청년에게 시기심이 발동해 모든 권력을 이용해 그를 없애 버리려고도 했습니다. 추풍낙엽처럼 몰락의 길에 들어선 사울입니다.
그의 뒤를 이은 다윗 왕은 어땠을까요? 다윗은 이 세 가지 A, 즉 교만, 외로움, 파괴적인 모험을 잘 극복한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네 번째, 간음이라는 부분에서는 실패했습니다. 본래 그는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장 신실한 부하 중의 하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맙니다. 이후 다윗의 집안과 왕권도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일들이 과거 왕들만의 이야기일까요? 혹시 지금도 힘을 가졌다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까요? 재력을 가진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까?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의 광야 체험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갖고 있던 위험성을 철저히 막아내고 씻겨내십니다. 모세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길, 그릇된 길을 잘 극복해 나가길 바라셨습니다. 때때로 모세는 교만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을 해체시키길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공주의 아들로서 모세가 가졌던 교만을 꺾으십니다. 40년 동안 광야로 내몰아 그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모세 혼자 품은 꿈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비전이란 너 홀로 꾸는 꿈이 아니라 내가 네게 주는 것이란다. 내가 네게 주는 진정한 비전과 사명을 받기를 원한다.” 또, 하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멸시하지도 말라고 부탁하면서 그의 독선적인 인간관계 태도를 변화시키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은 모세,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으로 이끌며 섬기는 지도자 모세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지닌 트라우마를 벗겨내십니다. 첫 번째 트라우마는 자기 정체성에 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출생의 비밀이 그 안에 있습니다. ‘내가 히브리인일까, 애굽인일까?’ 하는 정체성 혼돈의 트라우마입니다. 두 번째 트라우마는 자신을 외면한 동족에 대한 트라우마였습니다. 자신이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자처했는데, 동족이 자신을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배반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광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의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는 자리로 삼으셨습니다. 고독의 훈련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야 체험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광야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을 낮추게 하셨습니다. 겸손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단련하셨습니다. 광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광야란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시며,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1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신명기 32:10)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눈동자처럼 백성을 지키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하셨습니다. 광야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교회에 돈과 재물이 많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지식도 많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오셨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그분들과 대화해 보면, 그분들에게도 광야 체험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참 작은 존재구나. 그동안 내가 참 교만했구나. 이 무상한 세상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붙잡아야 할 게 무엇이겠는가?’라고 고뇌하며,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경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능력과 힘이 바로 광야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야 새 삶이 열립니다.
광야란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불붙은 떨기나무를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반복해서 그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를 마음에 두고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가까이 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을 부르시면서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분을 눈으로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자신 앞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러면서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신을 벗으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익숙해 있던 삶에서 탈출하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방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열등감에 빠져 있었고, 때로는 자기 연민에 취해 있었던 너의 삶에서 빠져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 신을 과감하게 벗고 새로운 도전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모세의 삶에 딱 달라붙어 있던 죄책감, 열등감, 미움과 분노, 모세를 억압했던 악령과도 같은 트라우마에서 이제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산산조각 내고 해체시키란 것입니다. 그 트라우마가 지속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지도자가 되면, 혼자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면,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으로 뒤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거짓 지도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네 안에 있는 교만, 열등감, 감정의 찌꺼기들과 응어리들을 해체시키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거듭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함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모세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내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나와는 다른 분이구나. 하나님은 절대자시구나.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왜 이렇게 거룩함을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을까요? 거룩함을 깨달아야 인간이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알아야 인간이 외로움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깨달아야 성적인 유혹도 넘어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했습니다. 이젠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내 이름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가 나를 몰라줘도 괜찮고, 홀로 있어도 견뎌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시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 남을 정성껏 섬겨도 비굴해지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세에게 권력과 힘을 맡겨도 내 욕심만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모세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요? 더욱이 겸손한 지도자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늘 나보다 더 큰 힘과 능력, 권세를 지닌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입 사원은 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임원진들은 사장이 어떤 비전을 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서 생깁니까? 자기가 그 분야의 정점에 올랐을 때입니다.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직장의 대표가 되고, 공동체의 장이 되고, 국가의 장관과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엔 항상 내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결정한 후에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길은 외롭습니다. 책임도 막중합니다. 동시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히 그 길을 걸어 나가야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도자가 될 때는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업가 즉 CEO가 되면 가장 두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비자입니다. 소비자가 외면하면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는 국민이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들을 외면하면, 기업도 정치가도 그 어떤 권력자도 아무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귀하고 두려운 분이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바라보고 계시며 지켜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내가 가진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도 하나의 권력을 가진 것입니다. 가장이 하나의 권력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권력입니까? 가족과 가정을 위한 권력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권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오만하고 교만한 지도자가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중)
그런데 이 말씀은 뒤바꿔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밟는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모세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거룩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씀 드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니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이 내게 있으면 내가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네가 밟는 땅이 거룩해진다.” 내가 만지는 것이 거룩해지고, 내가 꿈꾸는 꿈이 거룩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내게 말씀 주실 때, 나를 만지실 때,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터치하실 때, 우리에게 사명감이 생기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신을 벗고, 하나님의 거룩한 꿈으로 나아갑시다.
지금 우리를 억압하는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해체해야 합니다. 분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트라우마를 깨뜨려야 합니다. 성령님의 이름으로 악령과도 같은 내 교만과 열등감을 해체시켜야 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트라우마가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교만해질 수 없고, 더 이상 열등감과 자기 연민에 우리 인생을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분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도 그분께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저를 얽어맸던 모든 신을 벗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나가겠습니다. 내가 밟는 땅이 거룩하게 되고 내가 꾸는 꿈이 거룩한 꿈이 되도록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맡겨진 일들을 책임 있게 감당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또한 그 지도자 역할을 우리가 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주의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함께 고백하면서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믿은 것이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는 조금 있으면 교만하고, 조금 없으면 열등감에 빠져 스스로 보기에도 참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인해 가진 것이 있어도 겸손하게 하시고, 모자란 것이 있어도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네가 서 있는 그 자리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옛것을 다 벗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새롭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소망교회)
▣ 참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 죄악과 허물을 아룁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성공, 성공 소리치면서, 그렇게 성공만을 향하여 달려왔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돈과 재물에 대한 성취도, 지식에 대한 터득도, 심지어는 권력에 대한 성공까지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으로 대우받기도 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세상 지위가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우리 마음에 허무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깔렸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를 유혹하는 병적인 바이러스들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성공한 자가 느끼는 기쁨보다 더 큰 책임감과 외로움이 마치 산 같이 다가왔습니다. 그러하니, 때로는 더 독선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잠재해 있었던 교만함이 독사의 머리처럼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소중한 자존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는 오만함이었습니다. 때로는 분에 넘치는 파괴적인 모험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그것도 잘 안되면, 때로는 성적인 쾌락으로 외로움을 달래 보려 했습니다.
돈과 재물, 지식, 힘과 권력은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선물인 것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시여,
모세를 향해 하듯이, 이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옵소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발을 벗으라’고!
세상에서 더럽고 누추한 것들의 때가 묻은 신발을 벗게 하옵소서!
우리 속에 우릴 억누르고 있는 악령과도 같은 트라우마의 신발을 내팽개치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 밟는 땅, 만지는 것, 우리가 꿈꾸는 것이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광복운동
출 3: 4-10
출애굽기 성경 전체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해방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초로 정립된 신학이 있습니다. 바로 “해방신학”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고통 받는 백성의 해방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애굽 나라의 상황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의 왕을 “바로”라고 부릅니다. “큰 집”이라는 뜻입니다. 대대로 바로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BC 2166년 사람인데 그때부터 왕성하던 나라로 로마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최대 강국으로 역사에서 살아왔습니다. 피라미드가 세계 두 번째 불가사이가 된 것만 보아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바로왕의 위치는 백성 가운데 존재하는 신이라 사람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어서 가장 튼튼한 왕정 통치 국가요 가장 신뢰받는 통치자의 나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갔다가 식량이 없어 구하러 애굽에 갔을 때 그의 아내 사라가 너무 예쁘다는 소문이 나서 바로가 첩으로 데려간 역사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강대국이었습니다. 요셉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힌 것도 바로 왕입니다. 보통 역사가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던 시기는 “람세스 2세가 바로왕의 이름으로 통치하던 때다.” 이렇게 분석을 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많이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그의 남편 안토니우스 장군 모두 바로 거기 이집트를 무대로 등장했던 역사 인물들입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에게 망할 때까지 절대 권력을 누리던 그런 지역의 권세가들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쓰러트린 후에 성경에 나오는 아우구스투스 왕가의 1세가 되는 것도 우리가 역사에서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던 나라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절대 강자의 나라 문화에서 지금 유대 백성은 절대 약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은 애굽으로 이민을 간 데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시절 요셉이 가족 초청을 해서 70명의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갔는데 외국에 가서 나그네 생활을 가장 많이 경험한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떠돌이 민족, 집시 민족, 방랑 민족이었던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신명기에 “우리 민족은 유리하는 아람인이라. 떠돌이 백성이라.”
그런데 요셉이 애굽 총리로 있을 때는 유대 민족의 애굽 이민은 그 나라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인구 증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대인데 유대 여인들은 건강해서 어린이들을 많이 낳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인구가 증가하니까 자연히 노동력이 증가하게 되고 경제력이 발전하고 피차 아주 살기 좋은 나라로 점점 더 강성해 졌습니다. 가끔 보면 선진국들은 어느 나라나 이민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기들이 피땀 흘려 건설한 나라에 다른 나라 사람,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 여기 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야 자기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들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다 똑같은 경제 논리를 폅니다. 이민정책이 자국에 해로운가, 이로운가? 이롭다는 겁니다. 많이 올 수 있게 할수록 좋다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외국인 노동자를 다 빼버리면 노동계가 큰일 납니다. 올수록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이민정책을 써서 우리나라에 와서 살라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고센 땅에 와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센 땅은 그때부터 기름진 들판이 되어서 식량 생산이 아주 풍성하게 나오고 주택가는 날로 날로 아름다워지고 얼마나 강성한 나라가 되는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 가서 많아졌습니다. 국민성에 따라서, 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차이는 나지만 어떤 환경이 닥쳤을 때 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뛰어납니다. 자생능력이 얼마나 강인한지 지금까지 역사에 나타난 대로 말하면 가장 강인한 민족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몰려간 나라들은 유대인들 차지가 됩니다.
대한민국에는 유대인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멀고 와봤지 얻어먹을 것이 없어서 안 왔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안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경험한 것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유대인들이 몰려가면 얼마 안가서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출애굽 시절부터 그랬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근래 역사를 보시면 더 확실해집니다. 유대인들이 유럽에 흩어졌는데 얼마나 강성하고 강인하게 성장하는지 유럽 나라에서 유대인 반감이 생겼습니다.
“이러다가는 유럽 전체가 유대인들의 나라가 되겠다.” 그래서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 명령을 내리고 다 죽여야 된다고 하는 일까지 벌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찾아간 곳이 미국입니다.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나중에 찾아간 나라가 미국이지만 지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미국의 400명 재벌 명단에 23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대한민국은 노벨수상자가 1명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조그만 나라가 대한민국의 절반도 안 되는 나라인데 노벨 수상자만 50명입니다. 한분도 놀라지 않으시지만 사실입니다.
세계 교육의 중심지가 뉴욕인데 뉴욕 중고등학교 선생님 50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그 유명한 하버드 법과 대학의 교수 50퍼센트가 유대인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신문이라고 하는 뉴욕타임스 사장이 유대인입니다. 워싱턴포스트, NBC방송, CBS방송 사장이 모두 다 유대인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얼마 안가서 유대인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처럼 강인한 민족, 강성하는 백성이 유대인인 것입니다.
애굽에 가서도 그렇게 되니까 이민 정책이 바뀌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이 나라가 유대인 나라가 되겠다. 큰일 나겠다. 어떡하느냐?” “막아야 된다.” “어떻게 막느냐?” 두 가지 정책을 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어린 아이 학살입니다. 태어난 어린 남자 아이는 모조리 다 죽여 버렸습니다. 실제로 죽였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은 이 땅에서 번성하지 못하게 하자.” 그 다음에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은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게 함으로 삶의 의욕을 잃게 하고 건강에 막대한 손해를 보게 하라.”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법의 정신이나 인권이나 재판이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엔 인권이 없던 시절입니다. 임금님이 하라면 그대로 하던 시절입니다. 때리면 맞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고 죽인다면 빨리 죽는 것이 훨씬 행복한, 고통의 절대 약자의 괴로운 삶을 유대인들이 그때부터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십계”라는 영화를 다 보셨지요? 벌거벗은 몸으로 그 뜨거운 사막 기후에서 말할 수 없이 빈약한 식사를 제공 받으면서 진흙 속으로 들어가서 당해낼 수 없는 노동을 강요당할 때 조금이라도 꾀를 내는 듯 하면 그 가죽 채찍으로 등을 때려서 피가 줄줄 흘러내립니다. 이때가 되면 유대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올까? 구원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일까?’ 세상에는 그들을 구원할 만한 아무런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은 비로소 한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조상이 가르쳐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오늘 여기 6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너희가 조상으로부터 말만 들어온 하나님이 곧 나이니라.” 2장 2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욕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조상의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새로운 신앙문화가 그들에게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의 첫 번째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에서부터 출애굽 광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부르짖었는가? 그들에게는 아주 분명한 이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세상의 모든 역사는 지배자와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두 그룹을 연결하는 것이 법이라는 것입니다. 법에 의해서 지배자가 지배를 받는 사람을 조절하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법에는 공정한 법이 있는가하면 악법이 있습니다. 악법을 만들어놓으면 지배자 그룹은 아주 행복합니다. 그러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악법에 시달렸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았는데 죽여 버리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가 명령을 했습니다. “이게 명령이니까 그대로 했습니다. 무조건 남자 아기는 다 죽여 버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한테 이 나라는 다 빼앗기는 거야! 알았지?” 다 죽였습니다. 가정생활을 인정하지 않고 남녀를 따로따로 기숙시키면서 오직 노동에만 집착하게 하는 것은 사람을 인격대우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기계의 부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주 최악의 인간 이하의 생활을 유대인들이 하게 되었으므로 부르짖은 것입니다.
악법 중의 악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됨의 고귀성을 무시하는 일이요 잘된 법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법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나라의 법이고 바로고 어떤 것도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방법이 없나? 조상이 가르쳐준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찾으라 하지 않았는가? 그 길 밖에 없으니 우리가 그 길을 가자.” 그래서 그들은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첫 번째 스텝이었습니다. 이것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시각을 잘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을 이렇게 부르짖음으로부터 뭐든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지 않습니까? “한 가정에 한 사람은 부르짖으라.”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한 교회 안에 항상 기도하는 교인이 전체 교인의 10분의 1은 되어야 합니다. 한 나라 안에 기도하는 사람이 절대의 수를 유지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성경이 어디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 심판하실 때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의인 50명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나이까?” “안한다.” 점점 내려가서 “만약 이 성에 의인 10명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그래도 나는 심판 안하겠다.” 이것이 굉장히 보이지 않는 영적 파워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 소수의 부르짖음을 듣고 심판 안하겠다.”
그러면 우리가 갈 길이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네 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만 있다면, 너의 교회 기도하는 사람 10명만 있어도” 이렇게 우리가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의 교회들이 어느 때 성장했고 어느 때 쇠퇴했는가? 교인들이 기도 열심히 할 때, 그리고 기도를 안 할 때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말은 “평면의 세계에 아무리 보아도 나를 구원할 힘이 없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주만 바라보나이다.” 전능자를 향한 기도의 표현들을 성경에 이렇게 남겼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끊어지고 나면 마귀가 교제하자고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그 인간의 탄식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인간 역사 안에 참여하시겠다는 선언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다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원대로 되지 아니하는 인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참여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출애굽기의 중요한 신학이 되고 시작이 됩니다.
어떤 때는 우리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대단히 구질구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구질구질한 인간 역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구체적으로 동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킵니다. 오늘 말씀 7~8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나님의 인간 역사의 참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하러 세상에 오시는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형상의 고귀성을 회복시키려는데 하나님의 인간 참여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답지 못한 모든 억압의 굴레에서 인간을 자유스럽게 하려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확실한 증거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무슨 의미입니까? 본래 인간은 죄인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인간을 본래 모습대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 하나님 자녀의 자리에 회복을 주시는 것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부활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죽음에서의 해방입니다. 본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죽지 않게 되어 있잖아요? 죄로 인하여 죽음이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본래의 모습대로 인간을 회복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그래서 부활하심으로 그 영생의 진리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선물해 주신 거 아닙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그렇게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병자들도 많이 고치셨습니다. 본래 인간은 병이 없습니다. 죄로 인한 병이 인간을 괴롭힐 때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를 만나도 본래 모습대로 회복시키셔서 건강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아 잘 살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굶주리거나 가난하게 살라고 절대로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역 가운데 가난에서의 해방도 있습니다.
오늘과 같은 이 출애굽의 사건은 정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고통의 자리에서 자유와 해방을 선물해주시는 이 작업을 내가 지금부터 할 터이니까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르라. 너희들의 부르짖음을 내가 들었다.” 오늘 8절에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가끔 신문에 문제가 되는데 우리가 식민지로 살 때 이 나라의 젊은 처녀들을 무조건 위안부로 잡아갔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금도 그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서 데모를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의 편이 되어서 마침내 너희를 자유와 평안이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역사한 것이 오늘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유와 해방의 나라가 되었는가 하면 세계의 200개 국가 가운데 무엇을 하든지 10위권입니다. 경제력도 10위권이 되고 올림픽을 해도 10위권에 들어가고 K-POP이 10위권에 넉넉히 들어가고 교회는 1위권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식민지 백성의 처녀들을 끌고가서 변한 이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너희의 손을 잡고 젖과 꿀이 흐르는 광대한 자유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줄 것이다.”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영적 시각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신 역사, 이것이 광복절입니다. 때로 우리는 많은 고난스러운 삶의 과정을 거치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고 살아계시다고 하는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을 갖는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마침내 저 아름다운 땅, 눈물이나 아픈 것이나 통곡하는 것이 없는 평안의 세계로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 아름다운 땅에서 너는 나와 똑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약속은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세세토록 네가 왕 노릇 할 것이다. 지금은 밤의 한 경점 같고 아침이슬 방울 같은 이 짧은 세상의 출애굽 역사를 조금은 고난스러워도 나와 함께 가자. 마침내 나는 그 땅으로 너를 인도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라.”
내일은 우리 대한민국의 최고의 국경일 광복절입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이 민족의 독립은 계산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두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그 고난스러운 과정에서도 생명을 걸고 독립투쟁을 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분들의 투쟁에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능치 아니하기 때문에 외부의 힘을 이 땅에 심어주어서 마침내 이 땅에 외부의 힘에 의해 자유와 해방의 선물이 찾아온 지가 66년이 된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 민족이 받은 선물인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이 지구상의 어떤 종족도 타 종족에 의해서 자유와 희망을 구속당하고 사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참여하여 주어서 억울한 백성을 해방시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조금 길게 말하면 로마가 지배했던 세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성경에 유대 나라도 로마에서 팔레스타인 거리가 얼마인데 예루살렘에 로마 사람 빌라도가 총독으로 와 있었지 않습니까?
유럽의 모든 땅을 로마가 다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독립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칭기즈칸이 지배했던 나라가 당시 44개국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독립했습니다. 지금은 몽골이 모래사막 위에 빈민국 하나로 초라하게 남아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영제국에 해가 질 날이 없다던 영국이나 동남아 일대를 침략했던 일본도 지금은 본토 하나 지키기로 되돌아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근래 소련의 위성국가는 15개국이 독립을 했습니다. 어떻게 소련에서 독립을 합니까? 무슨 힘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앞으로도 분명한 세계 역사가 있습니다. 민족 분쟁이 있는 나라들은 마침내 독립합니다.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빨리 독립시켜 주어야 합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의 광복 운동입니다. 어떤 국가도 어떤 힘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너희가 왜 약한 민족을 괴롭히고 있느냐? 나는 약한 민족의 편에서 일을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간 역사에 참여하시고 “너희들 출애굽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내가 바로의 이 억압으로부터 너희를 빼내겠다.” “어디로 데려가실 겁니까?”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사 진행 과정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절대 교훈하나를 남겨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외국인이나 나그네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이제는 너희가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너희들도 똑같이 학대하면 나는 너희들을 향해서 싸울 것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거하는 나그네나 식민지 백성 누구든지 너희와 똑같이 살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한 표시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대한민국이 지금 이곳에 와있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학대하면 하나님은 “나는 대한민국과 싸우겠다. 너희들도 과거에 식민지였잖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축복받으려면 나그네와 외국인에게 너희와 똑같은 권리를 보장하라.” 성경에 철저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버스를 타고 아이다호를 구경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구경하러 갔느냐? 감자밭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추수를 할 때 마지막 고랑의 추수는 하지 마라. 남겨두어라. 왜? 너희 중에 나그네나 가난한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 먹게 하여라.” 이것이 성경 말씀에 있지 않습니까? 아이다호는 끝없는 감자밭인데 성경말씀그대로 마지막 한 고랑은 감자를 안 캤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 나그네 된 사람은 호미를 가져와서 그것을 캐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다호 감자가 세계에서 제일 맛있어졌습니다. 전 세계 맥도널드 후렌치후라이 아이다호 감자가 아니면 맛이 안 납니다. 그래서 아이다호 감자 농장주들이 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서 지금도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놔두어도 다 부자가 되어서 캐가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너희도 식민지로 살았지 않느냐? 너희들도 경험했지 않느냐? 그러면 너희들도 이제 베풀어야지!” 이런 절대 교훈을 남겨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 광복 운동가였으며 그 싸움은 승리했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옳지 않은 침략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은 대한민국과 싸우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베푼 은혜를 잊어버렸어? 너희가 똑같이 해?” 광복의 기쁨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인류 역사의 주인은 지금도 고통 받는 자를 보고 내려오셔서 그들의 편에서 전쟁을 하시면서 “걱정 마! 마침내 나는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저 세계로 인도할 것이야.”
그러면 북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걱정 마! 내가 내려가서 너희들의 고통을 보고 마침내 너희들을 자유와 해방, 그리고 식탁이 풍요한 그 세계로 너희들을 인도해 줄 거야. 가만히 있어.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거야.” 인류 세계 어떤 강한 힘도 하나님 앞에 다 굴복했습니다. 오늘 광복절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대한민국 만세!”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출 3: 4-12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진실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태도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기를 원합니다.
Ⅰ.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4절).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듣고 보셨습니다(7절). 애굽 사람의 학대도 보셨습니다(9절).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분입니다. 인류의 역사의 시종, 문명의 흥망성쇠, 한 가문의 부침을 보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당신의 백성을 살펴보십니다. 눈을 지으신 하나님이 어찌 보시지 않겠습니까? 정확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갚아주십니다. 계시록4:6에는 보좌 주위의 네 생물에 대한 환상이 나옵니다. 이 생물들은 앞뒤에 눈이 가득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보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죄인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면 반드시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슬프고 괴로워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보시는 분입니다.
Ⅱ. 들으시는 하나님
또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정녕 들으십니다. 남몰래 내쉬는 한숨소리도 들으십니다. 가족도 모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강자들의 억압 때문에 부르짖는 약자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의 원성이 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해악을 끼쳐서는 안됩니다. 땅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소리 지르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일꾼들이 받지 못한 품삯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도 들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즐겨 들으십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애통해하며 눈물 흘리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무슨 원통하고 기막힌 사정이든지, 무슨 죄와 허물이든지 들으시는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귀를 만드신 하나님이 들으실 것입니다.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Ⅲ. 건지시는 하나님
또 하나님은 “내가 내려와서 내 백성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라.”(8절)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시고, 들으실 뿐만 아니라 ‘건져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애굽인은 누구입니까? 애굽의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에 짓눌리고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누구에 의한 것이든, 어떤 내용이든,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건져내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허물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영원한 사망과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이 세상의 환란과 고통으로부터 건져내십니다. 모세를 나일강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요셉을 감옥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히스기야를 중병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절대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건져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Ⅳ. 인도하시는 하나님
또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8절)고 약속하십니다. 그분은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인도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갈 수 없는 길을 함께 가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설령 그에게 죄와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변함없이 함께 하셨습니다. 20년 동안 타향살이하던 야곱을 도우시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광야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광야교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천성을 향해 순례길을 가는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너희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으리라.”(사58:11) 할렐루야! 정녕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자세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첫째, 겸손한 모습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그 백성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고 탄식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만난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서 복종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로운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함이 우리의 강함보다 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대로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로,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자세입니다. 모세는 광야로 가서 오랜 고생 끝에 가정을 이루고 이제 막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자신을 도구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모습이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보시고, 우리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기와 절망 가운데서 건지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디입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분명히 이 땅에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믿고 의지하는 자는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 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족함 없게 하실 것입니다. 오직 겸손하게 복종하고 헌신하시면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