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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의 순서는 의자에 앉은 다음 수의(壽衣) 같은 흰 천을 두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것을 두르기만 하면 갑자기 여기저기가 간지러운 증상이 나타났다. 이발이 끝날 때까지 가려움을 참는 것은 대단한 고역이었다.
정신병 환자에게 입히는 구속복 같았던 그것과 함께 몹시 두려웠던 것은 면도였다. 시퍼런 면도칼을 대역죄인을 고문하는 것 같은 가죽 혁대에 쓱쓱 문지른 다음 비누거품을 처덕처덕 바르고 뒷덜미와 구레나룻을 다듬을 때는 예리하고 서걱거리는 느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면도를 하다가 아저씨가 재채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이발이 끝나면 흰 천을 풀어주는데 그때의 상쾌함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흰 천을 풀고 나면 그토록 괴롭혔던 가려움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몹시 신기한 일이었다.
이발이 끝났으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야 했다. 나는 머리를 감겨주는 형에게 넘겨졌다. 스무 살 남짓 해 보이는 형은 떨어진 타일이 훨씬 많아 보이는 시멘트 개수대로 끌고 갔다. 거기에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화분에 물을 주는 도구처럼 생긴 것으로 물을 끼얹은 다음 머리카락이 그득 묻은 벌꿀 비누를 문질렀다. 손길이 어찌나 우악스러운지 이건 머리를 감기는 것인지 잡초를 뽑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나은 편이었다. 빡빡머리나 스포츠 머리의 중고생들을 감길 때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플라스틱 솔로 머리가죽이 벗겨지도록 문질러대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형이 처음 들어왔을 때 너무 뜨거운 물을 끼얹는 바람에 머리가 튀겨진 손님도 있었다고 할 정도여서 우리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효율이 가장 우선되었던 그 시대의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발소 같았다.
내가 첫 삭발을 경험하게 된 것도 그 이발소에서였다.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출가한 스님처럼 박박 밀게 되었는데 그때는 머리를 감겨주던 형이 이발기를 잡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반쯤은 뜯겨나간 머리에 뜨거운 물과 비누를 칠한 다음 그 공포스럽던 솔로 박박 문지르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인한 독립투사들도 그런 고문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진정한 의미를 체득할 수 있었다.
이발사 아저씨는 동네의 모든 일을 환하게 꿰고 있었다. 스포츠 머리를 깎으러 온 고교생들에게 딴 생각하지 말라며 따끔하게 꾸짖기도 했고 총각들은 물론,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과 친구처럼 잘 어울렸다. 이발소는 우리 동네의 사랑방과 같은 곳이었다. 가끔씩 이발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슬쩍 숙어들 때는 원가 중요한 정보가 거래되는 것 같았다.
이발소에 위기가 닥친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간 직후였다. 동네의 목 좋은 곳에 크고 번듯한 이발소가 문을 연 것이었다. 요금도 훨씬 비쌌는데도 어른들의 대부분이 그곳으로 가버렸다. 우리도 호기심으로 가보았는데 이발하는 자체는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거의 벗은 차림의 늘씬한 여자들이 요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달력이 곳곳에 걸려 있었고 아찔하도록 짧은 치마 차림의 아가씨들이 정성을 다해 면도를 해 주는 것이 달랐다. 차례를 기다리던 아저씨들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가씨들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훑었고 면도를 하면서 와 닿는 가슴과 그 아랫부분의 접촉에 아주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요금이 훨씬 비싸도 어른들이 찾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이발사 아저씨에게 오는 손님들은 나를 비롯한 학생들과 어린아이들뿐이었다. 문을 닫지는 않았지만 타격의 흔적은 여실했다. 머리를 감기다가 이발기를 잡게 된 형이 보이지 않게 된 것도 타격의 결과였다. 아저씨가 가게의 청소와 머리 감기는 것까지 도맡아도 손이 남을 지경이었다. 그대로 나가다가는 머지않아 문을 닫아야 할 것이 확실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아저씨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주름이 생길 무렵, 마침내 일이 벌어졌다. 평소에 독하다고 소문난 아줌마가 새로 생긴 이발소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섭게 생긴 그 아줌마가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나오더니 사정없이 짓밟았다.
갑자기 대판 벌어진 싸움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남편을 홀려서 붙어먹었다!"는 것이 가차없는 폭행의 이유였다. 물론 아가씨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아가씨들이 달려들어 그 아줌마를 휘어잡고 때리자 이번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우루루 덤벼들어 한바탕 패싸움으로 번졌다. 경찰이 출동해서 사태를 수습했지만 그때는 이발소가 박살난 다음이었다.
우리 동네의 아줌마들과 요상해 보이는 젊은 여자들이 난투를 벌이는 광경은 드물지 않았다. 동네로 들어오는 골목 입구에 술집이 즐비하다 보니 가끔 그런 소란이 벌어지곤 했었다. 지금 세상에서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때리고 기물을 파손했다가는 큰 코 다치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술집들 역시 그런 소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영업을 계속했지만 아가씨들의 이발소는 그렇지 못했다. 이발사 아저씨의 가게는 다시 예전의 문전성시를 회복하게 되었다. 필마단기로 쳐들어갔던 아줌마는 일등공신을 자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발사 아저씨가 그 아줌마의 아들들은 특별히 공짜로 깎아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 이발소는 내가 군대에 가기 직전(1985년)에 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거기서 머리를 깎고 입대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서운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덧 60에 들어선 지금까지 미장원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듬는 데는 미장원이 훨씬 저렴한 것 같지만 남자가 갈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이발소와 미장원은 남탕과 여탕만큼이나 출입자의 성적(性的) 구분이 분명한 곳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청년들이 들으면 조선시대 이야기로 여기겠지만,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는 그랬다. 구멍가게 같았던 이발소의 풍경과 거기서 풍기는 스킨 냄새가 무척이나 그립다. 오늘은 그런 곳을 찾아가 이발이나 할 까보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