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이있는시 - 고은 / 아직 가지 않은 길 외
영원한 인간사랑 ・ 1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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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아직 가지 않은 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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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8. 22:31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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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지 않은 길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천리 만리였건만
그동안 걸어온 길보다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행여 날 저물어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일지라도
어찌 그것이 외로움뿐이였으랴.
그것이야말로 세상이었고
아직 가지 않은 길
그것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바람이 분다.
이상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수많은 꿈이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의 난해
그 난해의 현대였다.
원(圓)보다
각도의 기수였다.
도시의 자식아
도시의 자식아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
할아버지도 뭣도
민족도
정절을 매운 아내 따위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1년에 한두 번 어머이였다.
제1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2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5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12의 아이가 달려간다.
제13의 아이가 달려간다.
달려가도 좋다. 달려가지 않아도 좋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새의 니힐
유리 또는 거울
거울 속의 자아란
난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병든 폐는
의식의 파편으로 푸르렀다.
푸른 절망
그러나 유일한 윤리인 날개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어깻죽지와 겨드랑이에 달리지 않았다.
슬픔 따위보다
홍소(哄笑)하라. 룸펜만이 최선이었다.
당연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식민지 수도 서울을 떠나
그를 모르는 제국의 수도 토오꾜오에 가서 죽었다.
레몬 향기가 맡고 싶다.
이것이 그의 죽은 얼굴에
흰 강보가 덮이기 전의 말이었다.
처음과 끝이 짜여져 있었다.
제15 제16의 아이가 달려가지 않았다.
문의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무엇을 덮겠느냐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 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 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커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성 묘
아버지, 남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西道)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 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낯선 곳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때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 주먹 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출처] 고은 / 아직 가지 않은 길 외|작성자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