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1학년 때 부산에 놀러 간 일화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한 해에 수많은 프로그램을 했다. 보육원에 입소한 것은 불운이 아닌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은 상상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주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그때 겪었던 경험들이 매우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늦은 저녁즈음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서야 그 진의를 깨닫곤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늦봄의 어느 날. 엄마 수녀님은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꺼내셨다.
"너희들 여름방학에 부산에 놀러 갈 거야. 그러니 주변에 애들 잘 챙기고 재미있게 갔다 오자~."
어딘가로 놀러 가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여행이란 말만 들으면 초등학생으로 돌아는 상상을 할 것이다. 어린이날에 둥둥 떠다니는 동방신기의 '빨간 풍선'처럼.
우리는 처음 경험하는 여행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벌써부터 머릿속에서는 자주 듣던 동요가 어렴풋이 재생되었고 나와 친구들은 이미 해외에 도착한 이방인처럼 하하 호호 기뻐했다. 열차표에 배정된 기차는 무궁화호와 새마을호뿐이었다. 무궁화호 표는 새마을호 표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고, 우리는 단체로 부산행 무궁화호 티켓을 받고 냅다 기차에 몸을 실었다.
【 부산여행 계획 일정표】
1) 서울 보육원 → 지하철 탑승 → 1호선 서울역 하차 → 서울역 도착
2)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 탑승 [약 5시간 소요]
3) 부산역 도착 → 시내버스 탑승 → 보육원 앞 하차 → 부산 보육원 도착 → 점심식사 및 낮잠 & 초등학교 졸업생 방문 및 조우 → 1박
4) 새벽 기상 → 도시락 준비 → 식당에서 아침식사 → 생활관에서 환복 후 관광버스 탑승 [약 2시간 소요]
5) 다대포 해수욕장 도착 → 점심 식사 및 갯벌 체험 (~05:00 PM) → 관광버스 탑승 → 부산 보육원 도착
→ 2박
6) 부산 보육원 내 강당 모임 → 공연 관람 → 오리 버스 탑승(시설 내 전용버스) → 서울 보육원 도착
■ 준비물
- 수영복, 수건, 도시락, 여벌 옷, 무궁화행 열차 티켓, 카스텔라 빵, 삶은 계란, 귤 3개, 과자, 검은 봉지
생활반 수녀님과 보육 선생님을 선두로 우리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 근처에는 누더기를 쓴 노인과 빈 술병을 장식 삼아 구겨진 라면박스 근처에 불규칙하게 놓고 누워있던 사람도 있었다.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실수로 꼬구라진 담배를 떨어뜨린 허연 잔수염의 나이 많은 아저씨가 옹기종기 모여 역계단을 올라타는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아이들의 눈을 작은 두 손으로 가릴 수 없었던 엄마 수녀님은 빤히 쳐다보는 아저씨의 귀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일렀다.
"엄머. 저 아저씨 좀 봐. 너흰 저렇게 힘들게 살면 안 된다. 알았지?"
우리는 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열차에 올라타 파란 포가 덮인 열차의자가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반원으로 돌렸다. 의자를 돌려야 서로를 마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친구들은 이미 이걸 알고 있었다. 서울 친구인 나와 소수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걸 보고 따라 배웠다. 덜컹거리는 것도 모자라 과자를 까고 히히덕거리는 아이들이 거슬렸는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회의 시선이었다.
내적 흥분을 감추지 못한 친구 덕택으로 입술 가운데에 검지만 갖다 댄 어른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당시 기차는 도서실처럼 정숙이 강조된 분위기라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 울음은 베이스 배경음으로 깔렸고 라디오는 약간의 틈조차 비는 일이 없었다. 소란스러운 듯 소란스럽지 않은 이상한 녹음실, 바다내음이 흘러드는 곳으로 줄행랑치는 부산행 무궁화호 기차는 우리 마음과 같은 길로 달려갔다.
부산까지 가는 데는 장장 다섯 시간이 걸렸다. 조용한 곳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이인 우리들은 그것을 지키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은 초등학생 아이들을 잠시 봐도 없던 기가 빼앗길 것 같았다. 어른들이 우리들에게서 기를 빼앗긴 것처럼. 이런 아이들을 스물넷씩이나 감당해 내기에 인솔하던 생활담당반 수녀님과 선생님이 정말 많이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몸 둘 바를 몰랐다.
기차를 오래 타다 보면 허허벌판에서 방황하는 승냥이처럼 허기가 졌다. 내가 재빨리 가방을 열면 주변 아이들의 눈빛도 학습현장 체험에 온 듯이 금세 똘똘해졌다. 노란 가방에 들어있는 검은 봉지를 꺼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끔 푹신한 카스텔라 빵과 구수하게 잘 삶은 계란도 함께 꺼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간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덤으로 차가운 귤 세 개도 꺼냈다. 피크닉이라고 쓰인 음료수가 마지막으로 가방을 빠져나왔다. 99%는 모두 어른들의 보이지 않은 도움이었다.
우리는 계란 껍데기를 까면서 처음 보는 창밖의 풍경을 얌전히 감상했다. 탱탱하고 반질한 삶은 계란과 보기만 해도 복스럽게 풍부한 카스텔라 빵은 정말이지 별미 중에 별미였다. 간식이 너무 맛있어서 허겁지겁 입 안으로 욱여넣다 보면 체한 빌런이 꼭 두세 명은 있었다. 그럴 땐 미리 까놓은 귤을 반으로 나누어 입에 밀어 넣어 과즙을 터뜨리도록 도와줬다. 폭죽처럼 새콤하게 터지는 과즙을 느끼면 잠재되어 있던 의식을 세상에 폭발시킨 것처럼 가문비나무의 청량함으로 입 안을 무한에 거의 가깝게 적셨다. 비록 한정된 간식이더라도.
밥을 먹고 나면 중간에 멀미가 심한 친구는 뜨끈하고 역한 위액을 쏟기 전에 미리 검은 봉지를 들어 턱에 받쳤다. 카스텔라 빵에서 풍기는 특유의 우윳내는 구토유발 증상의 원인이었다. 똑똑한 아이들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졸도하듯 도미노로 줄줄이 졸아버렸다. 몸이 피곤하면 잠이 자동으로 오기 마련이었지만 일찍 잠들지 못하면 멀미 마왕은 속 비우기를 시전 했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무당을 만나거나 점집에 들르지 않아도 엑토플라즈밍 시현하듯 박한 신음과 경박스러운 몸짓과 창백해진 얼굴은 꼭 신내림 받는 도밍게즈의 데칼코마니 같았다. 이상하게도 탈 것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멀미가 그렇게 심했다. 만화 <페어리테일>의 멸룡 마도사도 아닌데 억울함이 의식을 가진 영혼처럼도 육신과 함께 울렁거렸다.
건강 정보를 알리는 한 매체에서는 오래 살려면 과식하지 말라고 했다. 일차적 욕구 중 식욕에서 충동성이 결여되면, 그 피해가 다른 욕구에서도 미치기 때문이다. 절제는 정말 중요하다고 나는 어른에게서 배웠다. 절제하지 못하면 파멸로 가는 건 시간적인 문제임을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새로운 관점으로 습득한 것 같다. 과식은 되도록이면 금물. 정서적 허기는 독서와 글쓰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속 비우기는 음식뿐만 아니라 교양과 도덕, 배움에서 비롯된 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어른들이 누누이 알려준 배움 속 비움이었을까.
5시간 끝에 우리는 부산 보육시설에 도착했다. 시설 입구부터는 두 개의 언덕이 있었다. 하나는 골고타 언덕 또 다른 하나는 십자가 언덕. 당시 두 언덕은 포장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양무릎에 힘을 줄 때마다 무리가 갔다. 또한 두 언덕은 상당히 비탈졌고 험난했다. 도착 장소에 가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고민 없이 우리는 인솔자인 엄마 수녀님 뒤를 따라 십자가 언덕으로 올라갔다. 십자가 언덕은 골고타 언덕에 비해서 오르기가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우리는 기차에서 먹은 간식이 비워진 조금 가벼운 가방을 메고 굽이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측에 보였던 건 예수의 생애가 조각된 십자가의 길이었다. 무릎을 번갈아가며 짚은 언덕길은 마치 예수의 고행길 같았다. 시시때때로 세상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녹슨 못에 걸린 묵주아래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다음으로 못에 박힌 채로 양팔을 벌린 예수님께 질문한다.
'당신의 고행길은 무엇이었나요?'
'헤로데 왕이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서 시작된 비아 돌로도사,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이 당신을 힘들게 하셨나요? 오, 저 또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찾기 위해 홀로 세상이란 재판정 앞에서 무릎 하나를 제대로 펴지 않고 이렇게 삐딱하게 서 있습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품행을 단정히 유지하고 정숙하여 똑바른 자세로 당당하게 서야 한다는 것을요. 그렇지만 저는 주님께서 보시다시피 바르지 못한 미련한 검은 양입니다. 비천한 종의 신세를 세상 만천하에 드러냈으니 재판을 받아야겠지요.
이 세상은 마음의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뭐, 예를 들자면 이런 거겠죠.
혐오, 부정, 부정적인 방어기제, 시기, 질투, 미움, 배반, 방치, 방임, 폭력, 살인, 가학, 멸시, 적개심.
다양한 어둠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침침한 눈이 힘겹게 외칩니다.
'이 세상은 지옥이다!!!"
찬란, 긍정, 긍정적인 방어기제, 기대, 설렘, 만족, 기쁨, 환락, 극락, 경쾌함, 포옹, 호용, 덕목, 애덕, 애증, 애착, 바람. 다양한 빛의 호수로 세상을 바라보는 머리가 인간들의 곁눈질을 염려하며 다소 격양되게 말합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다!"
이 두 가지는 삶 속에서 수레바퀴처럼 돌아가기 때문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틀렸다기 보단 아닌 '경우'도 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저는 또 한 가지 다른 답을 제시해야겠습니다.
물아일체, 애착, 조율, 융화, 다양성, 동감, 동질감, 만용, 공유, 퓨전, 열정, 희망, 의지, 사랑, 웃음, 행복.
다양한 교집합이 한데 어우러져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는 고요한 마음이 소신 있게 말합니다.
'이 세상은 연옥이다.'
이 세상엔 영원이란 없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 물질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원은 존재할 테 죠. 만약 우리가 선과 악을 백색과 흑색으로 정한다면, 연옥은 회색으로 보이겠지만, 오히려 선과 악을 흑과 백으로 나누지 말고 적색과 청색, 혹은 노란색과 녹색으로 나눈다면... 연옥의 색은 두 가지 색이 섞여 나온 세상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뇌는 이처럼 참으로 희귀하고도 신기합니다. 한 인간이 어둠 속에서 나와 다양한 구도와 방면의 기점으로 바라본 시각과 사고로 세상을 응시하고 사랑하는 것. 그 자체를 자각하는 순간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의존대상이 자신이면 말에 날이 서고, 남이면 상대의 말에 무기를 쥐어주는 셈이 되며, 중간이면 자신과 타인에게 흔들리더라도 전쟁은 면할 것입니다. 당신이라면 세상의 가소로움과 비웃음을 없앨 거라고 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중간을 옽해 자애로웁고 자비로운 당신을 나는 따르렵니다.
저는 이제 깊은 수렁 안에 잠자고 있는 수많은 가시들을 차가운 흙으로 돌려놓는 중에 있습니다. 참 지독하고 비리지만 향수처럼 기억에 강하게 박혀버렸습니다. 그것마저 사랑해 버리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아 그러진 않겠습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소나무처럼 존재하심에 제게 주어진 찰나의 생애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답니다.
제 고행길은 실은 당신이 당신만을 바라보게 하는 초연한 길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 당신만을 바라보아도 싫지 않습니다. 부모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는 아이도 있는 반면, 되려 강한 애착으로 한시도 가만히 못 있고 불안함을 느끼는 아이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불안함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심리학의 행동법칙이 적힌 서적을 훑다 보면, 영유아기 시절부터 애착 불안이 형성되고 그것이 오랫동안 간직한 물건이나 곁에 머무는 다른 사람에게도 전이된다고 합니다.
저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신비한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물론, 신이 되고 싶은 욕심은 없고요. 이름 세 글자 만으로도 가치 있고 소중한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마 제가 당신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착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사이비 종교를 보면서 애착 분리불안에 일어난 심한 반동형성으로 정신이 붕괴된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이라 여겼는데요, 글쎄요. 그들에겐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더랍니다. 마치 산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런 사람이 아닌 분도 있더랍니다. 왜 우리가 청각 장애인과 일반인을 언뜻 보면 구별하지 못하잖아요? 주관적으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해석관의 차이는 지능지수와 공감지수, 즉 IQ+EQ의 결괏값으로 판명된다고 봅니다. 영화 촬영할 때 영화감독이 큐를 외치죠? 그 'Q'가 '내면 IE'의 신호에 맞게 떨어지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행동이 천국이자 지옥이자 연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고행길은 혹시 제가 만든 게 아닐까요? 지옥으로 세상을 바라봤으니까요. 당신께 질문한 답을 이것으로 결정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내면아이가 겪어온 세상과 의지에 따라 달리 보인다."
본시오 빌라도 왕이 묻더군요. "네가 지은 죄를 너 자신이 알렸다."라고요.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모두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묻는 제 질문은 돌림노래처럼 되받아지는 고고한 독백과도 같습니다.
군중들과 재판정에 참석한 많은 시민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이 모욕하고 미워할 것을 알아도 차분하고 순순하게 의견을 받아들일 수가 없더군요. 화살은 부메랑이 아니기에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거대한 태풍을 향해 쏘면 그대로 되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섣부른 권모술수는 그것으로 그쳐야겠지요. 세속 된 감정에 안주하고 있으면 안줏거리만 찾는 술꾼이 될까 봐요. 후후. 안중에도 없죠, 그런 사람은.
또한, 뱀으로 변한 악마의 속삭임에 당신이 늘 주의하셨던 보배로운 나무의 사과를 훔쳐먹고야 말았습니다. 그 사과를 베어무는 순간 악마가 심은 억척스러운 질투를 배웠고, 퇴색적이고 흉측한 색욕을 배웠으며, 한시 끝을 모를 것 같은 식욕과 추잡하고 경박스러운 탐욕을 배웠습니다. 푸른 불처럼 타오르는 영생의 분노를 배웠고, 우직한 열정을 석고재처럼 가볍게 무너뜨리는 나태를 배웠으며, 자신이 태초에 왕이라도 되는 양 허영심에 찌들어 경직된 판가름으로 상하만을 구분하는 오만을 배웠습니다.
원죄가 친 새끼들, 영속적으로 번복하는 수많은 죄들이 밤마다 기어들어와 목을 옥죕니다. 잠에 들 때마다 짐짓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까만 눈 사슴의 탈을 쓴 늑대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킬킬'거립니다. 밤마다 허공을 떠도는 무수한 영혼들이 어디에선가 찾아와 저를 어딘가로 이끌려고 합니다. 이 세상은 한낱 먼지 같은 종의 모자란 열변으로 도무지 모든 것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악으로 가득 찬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선이란 게 존재한 것이긴 할까요? 아, 전 물론 연옥에 살고 있습니다만. 당신도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