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만파(一波萬波)
하나의 물결이 연쇄적으로 많은 물결을 만든다는 뜻으로, 한 사건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잇달아 많은 사건으로 번지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一 : 한 일(一/0)
波 : 물결 파(氵/5)
萬 : 일만 만(艹/9)
波 : 물결 파(氵/5)
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다. 물결이 일어나 점점 번진다. 바다의 파도가 바람이 없을 때는 고요하다가도 한 곳이 일렁일 때는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강풍을 받아 나중에는 큰 배를 집어 삼킬 듯한 큰 파도로 커진다. 그야말로 태산같이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도 부숴버린다.
하나의 물결(一波)이 연쇄적으로 많은 물결을 일으킨다(萬波)는 이 성어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만 그치지 않고 잇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 때 많이 쓴다.
연이어 파도가 일어난다는 이 성어는 당(唐)나라 고승 선자화상(船子和尙)의 선시에서 유래한다. 성(性)은 알 수 없고 생애(生涯)도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약산(藥山)에 들어가 유엄(惟儼) 스님의 불법을 계승하여 법명을 덕성(德誠)이라 했다.
이후 화정(華亭)의 오강(吳江)에서 배 한 척을 띄워놓고 노를 두드리며 유유자적 사람들을 건네주면서 인연 따라 설법했다. 그래서 뱃사공이란 뜻의 선자(船子)화상으로 불렸다. 선지식을 깨우친 뒤 홀연히 배를 엎고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전등록(傳燈錄)에 화정선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자화상이 하루는 강가에 배를 대고 한가하게 앉았는데, 어떤 관인이 물었다. '당신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오?' 선사가 노를 꼿꼿이 세우고 '알겠소?'라고 하였으나, 관원은 '모르겠소'라고 하였다. 노를 저어 맑은 파도를 파 뒤집어 보아도 비단잉어를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라고 하고, 다시 게송을 지어 읊었다. '30년을 낚시터에 눌러앉아 있었건만, 낚싯바늘 끝에는 이따금 작은 물고기만 걸려들 뿐이로세. 비단잉어는 잡지도 못하고 헛수고만 하였으니, 낚싯줄 거두어 돌아가리.'
화정선자는 30여 년 뱃사공 노릇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편편(片片)을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큰 법을 온전히 전할 사람[비단 잉어]은 만나지 못했나 봅니다. 그는 제자 한 사람을 지도하였고 종내에는 강 한복판에서 배를 뒤집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그 극단적인 죽음의 방법 또한 선사의 큰 가르침으로 연출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화정선자는 뱃사공이라는 독특한 방편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며 깨달음의 자리를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그의 삶이 낳은 시가 바로 여기 보인‘천 척 낚싯줄 곧게 드리우니[千尺絲綸直下垂]’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한 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무욕(無慾)의 세계, 텅 빈 충만의 세계로 통하는 것입니다.
시의 전반부 두 구는 세속 삶의 일상을 묘사합니다. 긴 낚싯줄을 곧장 아래로 드리운다는 것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욕망의 표현이고 물결이 일렁이는 것은 욕망을 따라오는 번민과 갈등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긴 낚싯줄은 큰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니, 깊은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수행자의 의지로 읽는 것이 보다 의미 있습니다.
그래서 선사의 마음은 물고기[욕심]를 잡는 데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선정의 세계 즉 고요한 밤 그것도 고기가 입질도 하지 않는 고요한 밤으로 장면을 전환시킵니다. 그리하여 결국 텅 빈 배에 밝은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 경지를 드러냅니다.
당연히 텅 빈 배는 무욕의 극치이고 밝은 달빛은 깨달음의 세계이며 고요한 밤은 선정수행이 극에 달한 경지일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시정은 매우 서정적인 듯하지만 그 안에 펄떡이는 깨달음의 활구가 이 시의 매력이라 하겠습니다.
千尺絲綸直下垂(천척사륜직하수)
一波纔動萬波隨(일파재동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야정수한어불식)
滿船空載月明歸(만선공재월명귀)
천척의 낚싯줄을 아래로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어나자 만 물결이 뒤따른다
고요한 밤 물 차가와 고기 물지 않으니
빈배에 달빛만 가득싣고 돌아오도다
천척(千尺)이나 되는 욕심의 낚시줄을 드리우니, 한 가지 욕심이 만가지 욕심을 일으킵니다.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인연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룬 것이 없어도 한 생각 돌이키면 빈배에 달빛이 가득하고 마음은 풍요롭기 그지없습니다.
纔(재주 재)는 '기본, 겨우'라는 뜻이 있고 간체자로 쓰는 才(재)로 나오는 곳도 있다. 스님이 낚시하러 배를 띄웠을 리는 없고 마음을 비우고 비워야 하는 법을 깨우쳐 가득 싣고 오는 것이다.
이 한 편의 선시(禪詩)는 선(禪)의 대의(大義)를 밝힌 입문서라 하는 보제(普濟)의 오등회원(五燈會圓)에도 전하는데, 품격이 남달라 후대의 수많은 시인들에게 애송되었고 또 차운(次韻)되었다.
특히 이규보(李奎報)와 진각국사 혜심(慧諶)에 이어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李承休), 그리고 조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지금의 망원동 망원정 앞 한강에서 시를 읊으며 소일을 할 때 지은 시가 있는데, 바로 이 화정선자의 시를 번안한 것입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이 시 역시 가을밤의 정취를 무욕의 삶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월산대군은 원래 왕이 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명회 등 권신들의 정치적 계교로 왕위를 받지 못하고 왕의 형이라는 아주 불편한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월산대군은 권력에 대해 아무런 욕심이 없는 일상을 유지해야 했으므로 자연을 즐기고 풍월을 읊으며 지냈습니다.
그런 정황 속에 지어진 월산대군의 시는 화정선자의 시상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월산대군의 '추강'은 화정선자의 선취가 듬뿍 묻어나는 '야정(夜靜)'과는 많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一波纔動萬波隨(일파재동만파수)는 원호문(元好問)의 논시(論詩)에도 인용되었는데, 여기서 일파만파(一波萬波)라는 성어가 유래한다. 뜻을 좀 더 부연하자면 '한 물결이 가냘프게 움직여도 천만 물결이 이에 따라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즉, 사소한 원인이나 계기일지라도 그 미치는 바 영향이 매우 커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에 이런 표현을 쓴다.
어떤 일을 사소하다고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나중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그마한 원인이나 계기일지라도 그 미치는바 영향이 매우 커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때 만파가 되는 것이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기상이론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도 마찬가지다.
▶ 一(일)은 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 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백 년 동안을 일세기(一世紀), 한 사람을 일인(一人), 전적으로 맡김을 일임(一任), 하나의 보기를 일례(一例),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 한 사람이 두 가지 구실을 맡음을 일인이역(一人二役), 매우 짧은 시간이 삼 년 같다는 일각삼추(一刻三秋),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일구이언(一口二言) 등에 쓰인다.
▶ 波(파)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皮(피, 파)로 이루어졌가. 皮(피, 파)는 동물로 부터 벗긴 껍질을, 波(파)는 강이나 바다 등의 물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움직이다의 뜻을 나타낸다. 전(轉)하여 파도, 파도가 일다, 움직이다의 뜻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결 랑/낭(浪), 물결 련/연(漣), 물결 도(濤), 물결 란/난(瀾)이다. 용례로는 어떤한 일의 여파나 영향이 미치는 범위가 차차 넓어짐을 파급(波及), 물결의 움직임을 파동(波動), 작은 물결과 큰 물결을 파랑(波浪), 큰 물결을 파도(波濤), 생활이나 일을 진행함에 있어 많은 곤란과 변화를 겪음을 파란곡절(波瀾曲折), 일의 진행에 변화가 심함을 비유하는 파란만장(波瀾萬丈), 물결 위에 물결이 일다라는 파란중첩(波瀾重疊), 물결이 끝없이 흘러가고 차차로 변천한다는 파류제미(波流弟靡), 물결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듯이 한 공격 대상에 대하여 단속적으로 하는 공격을 이르는 파상공격(波狀攻擊) 등에 쓰인다.
▶ 萬(만)은 상형문자로 万(만)의 본자(本字)이다. 가위나 꼬리를 번쩍 든 전갈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전갈이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하여‘일 만’을 뜻한다. 천(千)의 열 곱절, 9천999보다 1이 더 많은 수이다. 용례로는 아주 멀고 오랜 세대를 만대(萬代), 온갖 일을 만사(萬事),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만일(萬一), 세계 각 나라의 국기를 만국기(萬國旗),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잘 됨을 만사여의(萬事如意), 모든 일이 잘 되어서 험난함이 없음을 만사태평(萬事太平),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잘 이루어짐을 만사형통(萬事亨通), 영원히 변하지 아니함을 만세불변(萬世不變), 아주 안전하거나 완전한 계책을 만전지책(萬全之策), 장수하기를 비는 말 만수무강(萬壽無疆)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