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22일(수)■
(누가복음 22장)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묵상/눅 22:47-54)
◆ 유다의 배신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유다는 무리들과 미리 약속하기를 자기가 입 맞추는 자가 예수라는 자니 그를 잡으라고 했다(마 26:48).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수님께 인사하고 입 맞추려고 가까이 왔다. 조금 전까지 함께 식사하였는데, 이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 율법에 의하면 은 삼십은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는 가격이다(출 21:32). 자기를 사랑하고 가르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선생님을 노예의 가격으로 팔아넘긴 셈이다.
살면서 가끔 친한 사람에게 배신당한다. 배신의 상처는 무척 크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함께 두터운 우정을 나누며, 하나님의 집을 사람들과 어울려 드나들던 너라니! (시 55:12-14. 표준새번역)
과연 가롯 유다는 양심이 없는 사이코패스였을까?
후에 그는 예수님께서 그대로 잡혀서 유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고 가책을 느껴 돈을 성전에 던져넣고 자살했다(마 27:3-5).
그것을 보면 유다는 사이코패스는 아닌 듯하다. 그는 무언가 착각했던 것 같다. 아마도 예수님은 죄가 없으니 무혐의로 풀려나거나, 혹은 능력이 많으니 잡히지 않을 것이거나 혹은 이번 기회에 메시아의 전쟁이 시작됨으로써 이스라엘의 회복이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예수님은 절대로 잡혀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는 별문제 없이 돈만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멋진 생각이고, 완벽한 계획인가?
그러나 상황은 자기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고, 뒤늦게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가롯 유다는 제 딴에는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마귀의 보이스피싱에 당한 셈이다.
마귀는 보이스피싱의 원조다. 역사를 보면 수많은 천재가 마귀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머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가롯 유다의 배신과 위선에 치를 떨지만, 사실 우리도 생활 속에서 우리 유익을 위해 주님을 외면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비록 큰 배신은 아닐지라도 뻔한 우리의 속셈을 감추고 가롯 유다처럼 행동할 적이 얼마나 많은가?
◆ 이것까지 참으라
당시에 예수님을 잡기 위해 칼 찬 군인들과 종들이 동원되었다. 칼이 두 자루밖에 없는 제자들이 상대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전투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제자 중의 하나가 덤비고 칼을 휘두른 것을 보면 대단한 용기처럼 보인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제자가 베드로임을 밝힌다(요 18:10). 베드로의 칼에 대제사장 종의 오른쪽 귀가 떨어져 나갔다.
어떻게 베드로는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을까?
정말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된 사람 아닌가?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아주 특이한 내용이 있다.
잡으러 온 무리가 나사렛 예수를 찾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내가 그다'라고 하시자, 무리가 모두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요 18:6). 압도하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여기에 용기를 얻은 듯하다.
이렇게 사람들을 꼬꾸라뜨릴 수 있는 분이시고, 무화과나무를 말 한마디로 단숨에 말려 죽일 수 있는 분이시다. 무엇이 무서우랴.
그러나 베드로의 용기는 진정한 용기라기보다는 객기에 불과한 것 같다. 진짜 용기를 내어야 할 때 그는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 객기인 것이 많았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잘난 체였을 뿐이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말리시고,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대제사장 종의 귀를 즉시 낫게 하셨다.
'이것까지'라는 말에 주목하자.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 대해 베드로의 분노는 정당하다. 오히려 모두가 움츠러들 때 용기 있게 나서는 베드로가 고마울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에게 원인을 돌리며,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가 나를 화나게 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까지(헤오스 후투)' 참으라고 하신다. '이것까지'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이것까지 참으라.''는 주님 말씀을 생각하자.
대제사장의 종은 방금 귀가 떨어져 나갔는데, 주님께서 다시 붙여주신 것에 심하게 놀랬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이 대제사장 종의 이름이 '말고'(요 18:10)라고 밝혔는데, 요한이 100세나 되어서도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후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꽤 유명해졌음이 틀림없다.
예수님이 잡혀갈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고(막 14:50),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고 멀찍이 따라갔다. 여전히 베드로는 의리가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자가 과연 예수님을 부인할까?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베드로와 동행하는 다른 제자도 있었다(요 18:15).
그리고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르는 또 다른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몰래 따르다가 사람들에게 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다(막 14:52). 해프닝처럼 보이는 이런 기록이 오로지 마가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청년은 아마도 마가가 아닐까 추측한다. 겟세마네 동산 집 아들인 마가가 잠옷 바람으로 급하게 나섰다가 일을 당한 것으로 상상해본다.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은 정말로 갑자기 잡히셨고, 아주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말씀해오신 것이었다.
주님,
차라리 죽을지언정, 내 평생에 유다처럼 주님을 배신하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이것까지 참으라는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용기와 객기를 잘 구분하게 하시고, 진정으로 용기있는 성도로 살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