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6
1월20일[연중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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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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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KL4EbH-Epc (이창영 이레네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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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제자로 뽑으시는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이 며칠 저희 집에 며칠 묵어갈 때였습니다. 연령대가 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 그야말로 대가족이었습니다. 손이 두 개여서 일일이 다 품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 원장님를 돕기 위해 형들과 누나들은 꼬마들 한 명씩 도맡아 돌봐주는 모습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대여섯 살 꼬마들도 절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꼬마가 우리가 하니 괜찮다고 극구 말려도, 밀걸레를 손에 꼭 쥐고 열심히 바닥을 닦았습니다.
사실 크게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 없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에 별 도움 안 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일이 지속하도록 확실한 조처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 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 되는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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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보이지 않는 감옥>
모히니는 워싱턴 D.C. 국립동물원에 몇 년 동안 살았던 제왕 백호였습니다. 거기 있는 동안 모히니는 쇠창살과 시멘트 바닥으로 이루어진 가로세로 4미터의 전형적인 오래된 사자 우리에서 대부분을 살았습니다. 모히니는 비좁은 우리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생물학자들과 직원들은 모히니를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기로 하고 함께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수천 제곱미터에 걸쳐서 언덕, 나무, 연못과 여러 초목이 조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흥분과 기대에 차 모히니를 새롭고 넓은 환경에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은 듯했습니다. 호랑이는 즉각 울안의 구석에서 은신처를 찾았고, 거기서 나머지 생을 살았습니다. 모히니는 그 구석에서 가로세로 4미터 영역의 잔디가 다 벗겨질 때까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출처: 타라 브랙, 받아들임, 2013, 53]
숲의 왕 백호 모히니가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에 나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넓은 세상에서 호랑이에게 해를 입힐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호랑이를 아주 작은 공간에서만 평생을 머물게 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넓은 인생을 탐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히니처럼 아주 적은 사람들만 간신히 만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선택은 자유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은 아주 깊고 아주 넓은 인간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옆에 두려는 마음이 가장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고 고민하여 열두 제자를 뽑아 그들을 특별히 ‘사도’라 불렀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리옷 유다가 들어있는 것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나와 함께 나의 일을 해 나갈 사람으로 당신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뽑아 항상 함께 다니고 먹고 자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바로 밤새 기도하고 얻은 결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게 되니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까지도 기꺼이 옆에 두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런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백호 모히니였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엄청난 모험과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세상에서 고립되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뽑아주셨으니 당연히 그분의 사도로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은 없었고, 그저 자신이 좋은 사람들과만 선택적으로 함께 있으려 했습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서도 배신을 당하고 맙니다. 관계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정해주셨으니 아무리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도 기꺼이 견디어 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사도들의 이름을 보면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리옷 유다가 맨 마지막 이름으로 나오고, 베드로가 맨 첫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릅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같은 날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 배반하고 유다는 한 번 배반합니다.
이 죄를 범한 이후 베드로와 유다 모두 사도로 뽑힘을 받은 것에 대해 자신들이 그 부르심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베드로는 그래도 사도로 남아 있었고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베드로가 염치가 없었던 것일까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믿음’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뽑아주셨다면 뽑아주신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겠고, 유다는 예수님이 뽑아주신 것보다 관계를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했습니다.
즉 자신은 뽑혔음에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일단 뽑힘을 당했으면 합당하기에 뽑아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에 부당하다고 끝까지 버티셨다면 우리 구원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끝까지 합당하지 않다고 버티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뽑아주셨으면 합당하기에 뽑아주셨다고 믿는 것이 더 겸손입니다.
그런데 왜 본당에서는 봉사를 하라고 사제가 뽑아주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뒤로 빼는 것일까요? 모든 관계는 하느님께서 뽑아서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견디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작은 울타리 속에서 감옥살이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물론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리옷 유다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게 하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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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습니다. 3명이 같이 있으면 그 중에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고 합니다. 후배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지내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식탁에 예쁜 식탁보를 깔았습니다. 벽에는 좋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식탁보와 그림이 있으니 사제관 주방이 밝아졌습니다. 이번에 갔더니 거실에 화초들이 가득 반겨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집에 있는데 시들어가는 화초가 있다면, 바빠서 물을 주기가 어려운 화초가 있다면 사제관으로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교우들이 하나 둘 화초를 가져다주었답니다. 신부님은 늘어나는 화초를 보관하기 위해서 선반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거실 안 선반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화초를 보니 거실이 정원이 되었습니다. 쌀을 씻을 물을 화초에 주니 화초가 더욱 생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만나니 교우들도 신부님을 아끼고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삼인행필유아사’ 이야기를 하나 더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일하는 분이 그만 고속도로에서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한분 나타났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어머니가 오기에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중에 타이어가 펑크 난 차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천사는 1시간가량 시간을 들여서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해 주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피부색도 다른 사람입니다. 다만 고속도로 위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돈을 주려고 했더니 받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주려면 이번 성탄에 카드를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주세요.” 그리고 전화번호를 주면서 집에 무사히 도착하면 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고속도로 위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연극으로 했었습니다. 예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해서 출발한 사람은 원래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번째 동방박사는 오는 길에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가지고 간 선물을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만났을 때도 가지고 간 선물을 드렸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는 여관에 데려다 주었고, 남은 돈을 여관 주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이제 가진 것이 없어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30년 시간이 흐른 뒤에 네 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박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가 가난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병들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네 번째 박사는 예수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3번째 제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네 번째 동방박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제가 13번째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펑크 난 타이어를 교체해준 천사가 네 번째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1달이 되어갑니다. 2023년에는 나의 이름이 13번째 제자의 이름으로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이름이 네 번째 박사의 이름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께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르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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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시며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의 모든 제자 가운데 그들에게만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대로(1,34.39)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고, 세관원도 있으며, 혁명당원 즉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는 투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마치 구약에서 성조들이 시련을 이겨냈을 때,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과 같이,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마태오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라고 한 것은 그 회개의 표시로 자신의 이름에 세리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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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1)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
이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그다음에는 그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예수님의 부르심은) ‘모든 신앙인’에게도 해당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3-6)
신앙인은 누구나 다 ‘뽑힌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배반자 유다도 해당되는가?” 물론 당연히 배반자 유다도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뽑으시고 부르신 사람입니다. 그러나 배반하라고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뽑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나중에 배반자가 된다는 것을 모르셨을까? 아시면서도 뽑으셨을까?” 그 부분은 미스터리입니다.
2)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부르심’은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사도들은, 그리고 모든 신앙인은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배반자 유다도 처음에는 ‘응답한 사람’이었고, 적어도 처음 한동안은 자신이 응답한 대로 충실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응답’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끝까지’, 즉 죽을 때까지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배반자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3)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이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예수님 안에, 또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생활은 그렇게 예수님 안에, 또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생활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중간에 마음이 떠나면서 몸만 예수님 곁에 있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몸만 함께 있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몸이 모두 함께 있어야 함께 있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또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을 수 있고, 그 힘을 온전히 받는 사람만이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4,47-48)
‘복음’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 복음을 전해주는 일은, 사도들과 신앙인들의 사명입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신 것은,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임무를 주신 것입니다. 이 임무는 넓은 뜻으로는, 세상의 악에 맞서 싸우고, 악을 물리쳐 없애라는 임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그 일을 하다 보면,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마태 10,16) 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고, 많은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악을 없애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 3,17)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또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또 그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은 결코 ‘헛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다는 말은, 심판받고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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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성경에서 ‘산’은 지형적으로 평지보다 높은 곳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산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느님과 가까운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고, 산은 그분께 다가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은 모세가 하느님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나이산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이 사건은 하느님의 뜻이 직접 전해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져 성경 전반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모세의 예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하느님의 뜻이 계시된 장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마르 6,46 참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이미 이런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산에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온전히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시고 제자들은 응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분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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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열둘’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유다 사회는 그 숫자를 ‘민족’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이룬 통일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 ‘열둘’이었고,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곧추세울 때 사용한 숫자가 ‘열둘’이었습니다.
곧 ‘열둘’은 참된 신앙을 지닌 하느님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파견하신다고 하여서, 요즘의 ‘경쟁 의식’을 염두에 둔 해석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열둘은 다른 이들과 달리 능력 있는 이들로 뭉친 특정 계급이 아니라, 모든 이가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다는 무한한 초대의 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예수님 곁에 머물며, 모든 이에게 파견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열둘의 참된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곁의 또 다른 열둘을 생각합니다.
이웃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 자신이 ‘열둘’의 범주 안에 함께하는지 되돌아봅니다. ‘열둘’이기 위하여 스스로를 가두어 놓는 일이 없는지, 나는 진정 자유로운지 되물어 봅니다.
예수님의 ‘열둘’은 너무나 다른 사상과 삶의 방식을 지닌,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들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서도 너무나 다른 생각들이 부딪치고 갈라지고 있을 테지요.
그런 나를 진정 사랑하고 또한 그런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열둘’의 자리는 무한한 우주처럼 유연하고 여유로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제자여야 해!’라는 독선은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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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선택받은 사람>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어 그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시려고 온갖 권한을 주셨다고 합니다. 열두 제자의 선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 나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저는 사제 족보에 의하면 안드레아 대건 성인으로 시작한 사제 순위는 400번을 조금 넘는 숫자에 속하여 사제가 되어 선택받은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집과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선택이란 말처럼 이미 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분의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가 주님의 뜻을 죽기까지 실천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선택받고 선택받은 자로 살지 못하여 스스로 주님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창조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선택받았으며 그 모상을 잃은 사람은 다시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겸손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잘못 가는 길을 유턴하여 길을 찾는 사람처럼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로 향하여 나가는 회두의 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길을 알고 실천하여 제자 중에 가장 성실한 제자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받은 신자들은 자신을 선택한 분의 뜻을 받아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 어머니로 자녀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선택의 의미를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사람의 삶은 섬기는 사람, 나누는 사람, 원수까지도 친구로 만드는 사람은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자기희생의 삶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가 모두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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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심>
마르코 3,13-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부르심>
내가 원하는 이여
나에게 오시게나
내가 되러
내가 원하는 이여
나에게 머무시게나
내가 되게
내가 원하는 이여
나에게서 떠나시게나
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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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고 적혀있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 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서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집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살아납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 9,28-29)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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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라고 부탁만 한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제 이름도 모르고, 저의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까지 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아주 간단한 것이라면 해 줄 수도 있겠지만,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것이라면 거절할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지금 너무 어렵습니다. 돈 좀 주세요.”라면서 제게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꽤 큰 금액이었기에 제게 그런 부탁을 한다면 저를 잘 아는 사람인가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저의 이름도 몰랐고, 새벽 묵상 글을 통해 저를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신부’라는 이유로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교구 사회복지회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잖아요.”라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돈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분과의 만남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께서는 얼마나 더 어이가 없으실까 싶더군요. 기도도 잘 하지 않고, 주님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자기 부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화를 내고, 하느님께서 안 계신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왜 자기 뜻이 이루어져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먼저 하느님을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뜻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3,15 참조)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박해 속에서 고통과 시련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주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순교까지 하십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만의 사랑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사랑을 봐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만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으로 갚아주십니다.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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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응석받이가 아니라 사도로>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오늘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주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새 법을 새겨주실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처음에는 모세를 통해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는 그것을 계약의 판에 새겨 간직하고 다녔는데 이제는 모세 대신 주님께서 친히, 그리고 계약의 판 대신 마음에 새로운 계약을 새기게 하셨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우리말에 명심이라는 말이 있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또는 어른이 젊은이에게 중요한 일을 당부한 다음에 ‘이것을 꼭 명심하라’하고 하는데 그 뜻이 바로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지요.
명심이란 말이 바로 새길 銘자에 마음 心자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중요한 말씀일수록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종이에 적어, 잊지 않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런데 그 종이가 바람에 날아갈 수도 있고 그 종이를 우리가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더 좋은 방법, 제일 좋은 방법은 마음에 새겨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의 관행과 조금 다릅니다.
우리의 명심의 경우 어른들은 말만 하고 그 말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젊은이의 몫인 데 반해 신적 명심의 경우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주님께서 몸소 새겨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의 계약을 새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불만이 없도록 쌍방의 이해관계를 잘 고려하여 계약서에 기입을 한 다음 도장을 찍게 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이해관계를 잘 중개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주님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중개자시고, 하느님은 우리 임금이 되시고 우리는 그 백성이 되도록 중매를 서는 중개자십니다.
이에 대해 아쉽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되도록 중매를 서고,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되도록 중매를 서는 중개자시면 좋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고 가르치심으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 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오늘 히브리서가 하느님과 우리 관계가 임금과 백성의 관계라고 굳이 얘기하는 뜻은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건설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얘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삼으십니다. 이 부르심은 제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여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기둥들이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은 우리도 이제는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사랑에 안주하는 응석받이가 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책임감 있는 백성이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각과 함께 자부심도 느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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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聖人)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 “성소(聖召)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 -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바쿡 3,19)
아침 성무일도중 하바쿡 찬미가 마지막 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제 저는 1시간 54분 9.1km를 걸었고 열량 소비는 384칼로리라는 만보기의 기록이었니다. 또 휴대폰 만보기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당신 최고의 날”이라는 말마디가 나왔습니다. 정말 어제는 걷기의 기쁨과 행복을 실감했던 제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2016년부터 8년째 무릎 연골 파열로 하늘병원에서 받은 치료 효과와 더불어 끊임없이 매일 걸었던 효과인 듯싶습니다.
어제 별내 신도시에 소재한 피부과 병원에 마지막 치료차 왕복 80분 걸으면서 제 최고의 운동이자 취미활동은 ‘걷기’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걸으면서 걷기의 유익함에 대해, 또 얼마전 수도회를 퇴회한 형제를 생각하며 성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수도자 신분의, 사제 신분의 옷이, 삶이 그렇게 불편하고 그 짐이 무거웠나 많이 생각했습니다.
삶은 100m 단거리 전력 질주의 경주가 아니라 평생 장거리 걷기입니다. 성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도중하차 하지 말고, 자기 페이스대로 목표 지점까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무슨 형태의 삶이든 자유롭고 행복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행복하게, 찬미하고 감사하며, 평화롭고 기쁘게, 자발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자문해봐야 할 물음입니다. 과연 내 성소는 선물인가 짐인가? 선물이라 믿고 생각할 때는 찬미 감사와 더불어 자발적 분투의 노력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무겁고 불편한 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자발적 기도와 사랑의 수행이 절대 필수 조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되기가, 성인되기가, 하느님의 자녀되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인간답게 너무 막연합니다. 존엄한 품위의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아주 분명합니다. 인생 광야 여정 살다 보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성인, 괴물, 폐인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나 괴물이 됩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본인은 폐인인지 괴물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괴물같은, 폐인같은 사람들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생각없이 막살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괴물이자 폐인입니다. 특히 정치권을 보면 이런 눈살 찌푸리게 하는 괴물같은 이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참으로 참나의 참사람이 되어 성인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평생과제인지 깊이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어제 격정(激情)에 싸여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라는 기도하듯 단숨에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다
옛날에도 성인과 악인이 있었고
오늘날도 그렇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아니 역사의 퇴행이다
1회용 소모품처럼 소모품처럼 된 사람들
쓰레기들과 더불어 날로 늘어나는 쓰레기같은 사람들
너무나 자기를 돌볼 줄 모른다
날마다 일간신문 일별할 때마다 깨닫는 사실
아,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고 위로는 괴물들, 아래로는 폐인들뿐이네
이렇게 먹고 쓰고 살면
지속가능한 삶은 불가능한데
의식없이, 생각없이, 영혼없이, 자기를 잃고 사는
무수한 무지의 사람들
사람이 희망이라는데
참 사람 찾아보기 힘드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모르는 참 뻔뻔한 무지의 후안무치의 사람들
정신 바짝 차릴 일이다
답답할 때 마다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전사로서
각오를 새로이 한다
존엄한 인간 품위를 새로이 한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절박한 영적 전투의 삶이다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자!”-2023.1.19. 아침
오늘 복음에 연관하여 성소에 관해, 또 성인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뿐 아니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가 넓은 의미로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라고 부름받은 우리들입니다. 복음 서두 말씀은 열두 사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거룩한 미사분위기가 이 장면과 흡사합니다. 바로 주님 앞에서 우리의 성소를 새로이 하는 참 고마운 미사시간입니다. 새삼 우리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요 평생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하루의 시작에 앞서, 사도로 파견되기에 앞서 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친교를 깊이하는 관상의 미사시간이 우리의 성소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열두 사도의 면면이 다양하듯 우리 또한 참 다양한 성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성소의 신비요, 평생 언제 어디서나 서로 존중과 배려해야 할 각자 고유의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성소의 완성이 아니라 자발적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생 끊임없이 돌보고 가꿔가야할 성소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우리에게는 경종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 제자중에 괴물같은 유다가 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입니다. 유다의 신비, 악의 신비입니다. 참으로 성소를 가꾸고 돌보는데 태만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바로 배신자 유다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자살에 앞서 베드로처럼 철저한 회개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참 큽니다. 우리의 성소에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유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데 복음의 열두 사도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새계약의 중재자 대사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례미야가 예언한 새계약이 대사제 예수님 덕분에 우리를 통해 실현됩니다. 그대로 우리를 두고 하는 예레미아서를 인용한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새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들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깨닫는, 실현된 진리입니다. 대사제 파스카 예수님의 중재로 인해 실현된 새계약의 은총이 차고 넘칩니다. 복음의 열두 사도가 누리지 못한 우리들의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성소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넘치도록 주십니다. 끝으로 다음 기도문을 들으며 성소를 새로이 하시기 바랍니다.
-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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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마르 3,14)
<제자에서 사도로!>
오늘 복음(마르 3,13-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使徒. Apostle)'라 이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듯이(3,14 참조),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권한을 지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단순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 8,6)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것"(마태 5,23)이었습니다.
'제자에서 사도로!'
'갈릴래아'는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우리의 갈릴래아에서 당신께서 하셨던 바로 그 일들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수동적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에서, 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일치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의 본질이요, 완덕에 이르는 길입니다.
요즘과 같은 치열한 삶 속에서, 그리고 돈과 권력과 명예가 하느님 위에 자리 잡은 우상숭배가 만연한 시대 속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사도가 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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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PqW-ENqNh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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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마르 3, 14)
우리가
놓쳐버린
마음이란
주님과 함께
머무는
마음입니다.
머무름은 짧고
지나침은
빠르고
깁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고
주님과 함께
지내는 행복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머무름 안에
길이 있습니다.
내어주어야
서로를 살리는
머무름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자연스레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부르심과
머무름의
목적지는
같습니다.
가야할 곳이
하느님 사랑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열려있기에
머무를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머무름의 여정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함께 지내는
가장 좋은 사랑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머무름이
사는 곳이
공동체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나누는
사랑이
머무름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주님과 함께
지내는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먼저 머무르는
사랑의 관계
사랑의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머무름 안에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그냥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가장 좋은 길이
열립니다.
가장 좋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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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생명을 불어넣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싱싱한 삶의 현장에서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잡은 것을 우리가 놓는 것입니다. 집착이 아니라 기쁨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 머무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참다운 신비란 주님과 정직한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과 만남이란 우리 삶과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신비에 눈뜨게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안주할 수 없는 부르심의 여정입니다. 아름다운 사도의 여정은 아름다운 사람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란 삶다운 삶을 살고 싶은 이들입니다. 삶다운 삶이란 주님의 기쁨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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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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