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314
동서고금의 왕정 군주제 봉건제 독재 사회주의 민주주의 같은 모든 정치 통치체제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모인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통해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기준에서는 아무체제도 선하다고 인정받을 수 없으므로, 어느 특정 체제만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이와 반대되는 것은 이단시하고 정죄하는 것은 신령한 복음을 육신의 것으로 전락시키는 참람한죄이다.어느 시대나 지역이나 어떤 통치체제건간에 그체제에 속한 교회는 복음안에서 그체제에 순응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반성경적인 제도에는 무력이나 세력이나 시위 등으로 저항 해서는 안되고 제도적 불이익을 감수하거나 회피하는 방향으로 저항해야 한다.
#20210314
#신명기 #Deuteronomy 8:1-6
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율법과 계명과 규례와 명령을 지킬것을 그토록 엄중히 강조하신 이유는 그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권세와 위엄을 드높여보이려고 하시려는 것보다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하신 가장 하찮은 이스라엘에게 참된 복을 주시려는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렇게나 엄중한 당신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순종 여부는 이스라엘에게 위임하시고 맡기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누구든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가 강요하거나 압박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순종하고 누구든지 지키지 않으려 하는 자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그분의 명령을 거역하도록 내버려두신다. 종종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죄의 대가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그 재앙으로 백성들을 두렵게 해서 억지로 굴복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재앙으로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심령이 부드럽게 되어 자발적으로 여호와께 회개하며 나아오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데 이는 세상의 멍에보다 예수님의 멍에가 지기 쉽고 가볍기 때문이라 하신다. 또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세상의 넓고 편한 길로 가지 말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좁고 협착하고 험난한 길을 가라고 말씀하신다. 즉 주님의 쉽고 가벼운 멍에를 진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께서 가셨던 좁고 협착하고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하면 이를 공로로 삼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이끄시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과 주님의 좁고 협착하고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맡기셨다. 이는 우리가 성령을 배제하고 우리 자신의 의지로 주님의 멍에를 지고 주님의 길을 자발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주님의 멍에가 지기 쉽고 가볍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하고 험난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그리 힘들지 않게 여기게 하셔서 자원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세속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고 가는 주님의 멍에와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럴수록 자기에게 손해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께서 주신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속인들은 지지도 가지도 않는 주님의 멍에와 좁은 길을 손해로 여기지 않고 미래에 받을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서 마땅히 지고 가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속에서 세속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기간은 그들에게 있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과정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기간을 통해서 자기들의 죄악에 대한 징벌을 치렀으나 여호와의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심을 받음으로써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이러한 광야같은 특별한 고난이 있게 마련인데 그 고난들은 우리 죄에 대한 책망이자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훈련이 겸해 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당시에는 그것이 힘들고 좋지 않아 보이더라도 그 고난을 선하게 잘 치르고 나면 우리의 신앙은 조금 더 정금과 같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물론 앞날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에 겪었던 고난의 시기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셨는지를 자주 돌아보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들 중에서 굳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탁월해서가 절대 아니라 도리어 마치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아 죽기 직전인 갓난 아이처럼 비참하고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찮은 민족을 선택하셔서 여호와의 존귀한 백성으로 만드시려고 고난 가운데서 굶주리게 하시면서도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배를 불리시기도 하셔서 그들이 음식 자체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주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어린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자기가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지만 주시는 분보다 주시는 것 자체만을 바라보고 장성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보다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감사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충분한 기간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여전히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주리게 하셔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셔서 신앙 수준을 끌어올리신다.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여유있게 느긋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도망치듯이 매우 황급하게 나와야 했기 때문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신을까 하는 걱정을 할 경황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매우 학대받는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입는 옷과 신는 신발도 금방 손상되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광야를 전전하면서 길의 험난함과 목마름과 고단함에만 신경썼을 뿐 정작 자기들이 무엇을 입고 신고 있는지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을뿐더러 마른 땅을 행군하는 동안 발에 물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영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마치 눈으로 보기에 크고 놀라운 것들에 대해서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 칭송하곤 하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매일 입고 신었던 옷과 신발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모두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베푸신 것임을 아는 것이 신앙의 수준이다. 신자들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신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잠시동안 부족하게 하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재물이 부유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신자에게는 잠시동안 재물의 부족함을 주시고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는 신자에게는 잠시동안 질병의 고통을 주시며 무엇이든지 승승장구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신자에게는 실패를 맛보게 하심으로써 그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교회는 오랜동안 예배를 타성에 젖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코로나라는 채찍을 교회에 휘두르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에 대한 간절함을 소망하게 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때때로 우리를 벌하시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백성임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래서 사도는 부모가 잘못한 자녀를 혼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어떻게든 징계하신다고 가르친다. 만약에 자기를 교회 신자라고 하는 어떤 자가 고의로 거듭거듭 죄를 지어도 아무런 징계를 당하지 않고 도리어 그 죄악들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멸망 당하는 자들에게는 자기들의 부끄러운 욕심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 자의 구원을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리어 범죄하고도 이 땅에서 형통하는 교인들을 부러움으로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저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저들의 상내를 두려워하는 것은 신령한 믿음의 눈으로 그 너머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심판을 바라보는 것이다.
#20200314
#출애굽기 #Exodus 제 1 장
이스라엘 자손이 학대를 받다
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야곱이 애굽으로 왔을 때 데리고 온 일행은 전부 70명 정도였으나 그의 자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덕분에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애굽 내에서도 강력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처음에 머문 고센 땅으로는 부족하여 애굽 곳곳으로 확장되어 퍼져간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덧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 백성들과 더불어 살게 되면서 애굽인처럼 살아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세월이 흘러서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이 죽게 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치 여호수아 시대 사람들 이후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했던 것과 같이 더이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무리 세력이 크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애굽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한데다 찬란했던 요셉 시대는 이미 전설급 레전드 신화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요셉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좀 더 편안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애굽의 우상숭배와 그에 기반한 문화와 법제를 충실히 따라야 했을 것이다.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잊어간 것은 애굽의 바로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셉을 단번애 총리로 파격 등용한데다 전폭적인 신뢰와 호의를 베푼 희대의 성군 바로를 제외하면 그 이후 바로들은 처음 얼마간은 그 7년 풍년과 7년 흉년의 역사를 기억하여 조심했겠지만 세대가 흐를수록 머나먼 과거의 역사의 교훈은 희미해지고 원래대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우상숭배에 치중하며 선민의식에 빠져 이방민족들을 멸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방민족들 중에서 특히 히브리인들이 자기들보다 세력이 커지자 급기야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하기 시작한다. 바로는 이렇게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는 정책이 자기 소견에 옳고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는 자기가 걱정하여 내뱉은 그 말대로 히브리인들을 괴롭힘으로써 훗날 자기 후계자 바로가 그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편이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분과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는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진멸하기까지 철저히 패배를 당하게 되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내보내게 된다. 바로의 히브리인 학대 정책은 육신의 눈으로는 지혜로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어리석었던 것이다.
바로의 죄악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히브리인들을 학대함으로써 그들과 언약하시고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적으로 돌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고한 사람들을 단순히 이방인이고 자기들보다 세력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괴롭힌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로의 죄악은 비단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바로의 악독함을 공공연하게 볼 수가 있다. 교회가 저지른 불의와 범죄를 정당하게 지적하는 신자들을 대적하여 여러가지로 회유하거나 위협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행태가 바로와 다르지 않다. 교회의 유익을 빌미로 교회 내에서 약한 자들을 알게 모르게 힘들게 하는 자들이 히브리인을 괴롭힌 바로와 같은 자들이다. 오로지 자기 교회의 안녕만을 위해서 주위를 힘들게 하고 반사회적 행보를 취하는 자들이 바로와 같은 자들이다. 그런 바로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교회를 위한다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지혜를 짜내지만 그 지혜의 종국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일 뿐이다.
애굽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웅장한 건축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풀기 힘든 미스테리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그 옛날에 그런 거대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희생되어야 했을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바로에 의해 그런 일에 강제적으로 동원되어야 했으며 특히나 다른 이방족속 노예들보다 더 극심한 감시 속에서 더 고된 노역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하루하루의 노역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목적이 되기 마련이다. 그만큼 육체적으로 힘들고 지치는 나날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부부 관계는 물론 육아와 양육은 사치스러운 일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족속은 점점 소멸되는 것이 일반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유독 히브리인들만은 무슨 연유인지 노역 때문에 죽는 사람도 없고 무슨 힘이 남아 도는지 이전보다 더 자녀들이 왕성하게 태어나서 더 번성하게 된다. 물론 히브리인들은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알게 모르게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존하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지키며 살아가면서 남들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 고냔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들이 보기에는 저정도 시련이라면 차라리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낫겠다 싶은데도 신자들은 어떻게 그 시련에 굴하지 않고 꾸역꾸역 버텨내며 인내하는 것인가. 신자들의 그러한 견고한 인내의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성령 하나님의 보존하심 덕분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를 양자 삼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로 성령 하나님을 힙입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겨내게 하신다.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혹독한 노역으로도 히브리인들의 번성을 막을 수 없자 바로는 두 명의 히브리 산파를 불러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몰래 죽이라는 치졸한 지시를 내린다. 아마도 바로는 이 히브리 산파들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여러 비밀스럽고 악독한 지시를 내려 히브리인들을 학대해 왔을 것이다. 즉 바로에게 지시를 받은 두 명의 히브리 산파는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이기보다는 마치 매국노나 밀정과 같이 히브리인들을 등쳐먹는 히브리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산파들은 산모에게서 아이들을 받아내는 경험이 많아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나이가 많은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두 산파들은 거의 평생을 그렇게 바로와 내통하면서 자기 민족 히브리인들을 괴롭히는데 앞장서 왔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가 이번에 내린 지시는 평생을 매국노로 살아온 자기들로서도 도저히 행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의 심령에 심히 두려운 마음을 심어주셔서 그들이 감히 바로의 지시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없도록 미연에 방지하셨다. 그렇게 평생을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민족을 배반해 온 산파들은 그제서야 두려우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대놓고 바로의 명을 거역하면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그래서 산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자 아이들을 살리고 바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하나님도 거역하기 싫고 바로도 거역하기 싫은 다분히 타협적이고 회색적인 판단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산파들의 미약한 결단마저도 당신을 향한 순종이라 인정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에게 어떤 은혜와 흥왕함을 베푸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산파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동행하심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바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매우 엄격한 해석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허용하시지 않으시므로 산파들의 이 거짓말 조차도 범죄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여리고를 정탐한 두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 기생 라합의 거짓말,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피난했을 때 압살롬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사독과 아비아달이 보낸 정탐꾼을 우물에 숨겨준 한 아낙네의 거짓말, 동방의 박사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헤롯을 속이고 다른 길로 귀국한 것 조차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거짓말이라고 정죄하기도 한다. 즉 그런 엄격한 성경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준으로 해서 소위 선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철저히 거부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결국에는 모순과 자가당착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런 자들의 해석대로라면 산파들은 바로에게 정직했어야 하는 것일까. 라합을 여리고 군인들에게 정탐꾼의 행방을 정직하게 보고해야 옳은 것일까. 아낙네는 압살롬의 군인들에게 다윗의 정탐꾼들의 행방을 정직하게 보고했어야 했나. 동방의 박사들은 정직을 지키기 위해서 헤롯에게 보고했어야 했나. 물론 하나님께는 인간의 모든 거짓말이 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여전히 죄로 인해 부패하였기 때문에 단 하나의 거짓말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신자들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성경적인 가치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자체의 죄가 더 큰지 거짓말을 하게 됨으로써 야기되는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더 부합하는지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히브리 산파를 이용한 계교로도 성공하지 못하자 바로는 급기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헤롯이 펼친 것처럼 극악무도한 살인 명령을 내린다. 헤롯 시대에도 크나큰 통곡이 있었던 것처럼 당시 애굽에서도 이로 인해 희생 된 남자 아이들로 말미암아 크나큰 애통함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덧 6년 전에 세월호에 탑승한 300여 명의 어린 학생들과 교사들과 승객들이 박근혜 정부의 고의적인 구조 금지로 인해 안타깝게 학살당해야 했다. 전두환은 무고한 자국 국민들을 순식간에 빨갱이로 몰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전쟁이 일어나자 혼자 몰래 도피하고 국민들은 피난을 하지 못하도록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북한군에 희생되게 하였다. 그러고서는 서울을 수복하자 수많은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였다. 그렇게 국민의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하찮게 여겨 함부로 죽이는 국가 지도자들이 맞이하게 될 최후는 영원한 불지옥이 아니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