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 허수경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안부를 묻습니다.
살아 세운 허술한 집보다
단정한 햇살이 결 고운
식솔 거느리고 먼저 앉았는데
먼 산 가치운 산
무더기째 가슴을 포개고 앉은
무심한 산만큼도 벗하고 싶지 않아
우리보다 무덤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승사람일 적
우리만큼 미련퉁이였을
그가요 살아 세운 허술한
집에서 여즉
그와 삶을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요
점심밥만큼 서늘한 설움이
장한 바람에 키를 낮추는데
낫을 겨누어 베허버리는 건
누워 앉은 무덤입니다.
-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문학과지성사, 2023.10)
* 허수경 시인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경상대 국문학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
수필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
2001년 동서문학상, 2016년 전숙희문학상 및 '제15회 이육사문학상' 수상.
2018년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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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은 1987년 등단을 하고 그 이듬해 첫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2018년 위암으로 별세할 쉿 넷의 시간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발간했습니다.
그가 출간한 시집의 목록이 오늘 소개한 시선집에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시 「한식」은 1988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그의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의 네 번째 시입니다.
첫 시집에서 시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1980년대 말, 그때 우리들은 가난했다고. 정치는 어두웠고, 청년들은 잡혀갔고,
글을 쓰는 것도 사는 것도 검열과 단속의 시절이었다고. 이 시절 탄생한 시인의 첫 시집은
시인의 뿌리, 시인의 오래된 얼굴을 담고 있다고. 이 시가 어둡게 느껴지는 까닭도
모든 것에서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을 살았던 시인의 마음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 사람은 말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산 사람만의 특권일까요.
어쩌면 말할 필요도 없이 조용히 누워있을 수 있는 것이 더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자는 얘기합니다. ‘살아 세운 허술한 집보다 / 단정한 햇살이 결 고운 / 식솔 거느리고 먼저 앉았는데’라고요.
시를 읽을 때마다 신기한 것 하나는, 다른 문장이 제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우리보다 무덤이 더 할 말이 없습니다’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단정한 햇살’이 들어간 문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도 저 무덤 속 주인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고요히 눕고 싶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고요히 누워 있을 수 있을까?’라고요.
‘이 생의 고민과 미련을 다 툴툴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라고요.
저승으로 건너가면서 기억을 잃어버리는 술 한 잔을 마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겠죠.
이 시집은 ‘시선집’입니다.
시집과 시선집이 헛갈릴 수 있어 말씀드리자면, 시집은 여러 편의 시를 모아서 엮은 책을 말하고,
시선집이란 시집이나 시인이 발표한 시 중에서 뽑아 엮은 책을 말합니다.
시선집을 출간한 시인들의 면면을 보면,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입니다.
이 시선집은 허수경 시인의 첫 시선집은 아닙니다.
조금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시아> 출판사에서 시선집이 발간된 적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대표 시인들의 시집을 한영대역으로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시가 한국 독자뿐만이 아니라 세계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출간하고 있는데요,
출판사의 묵묵한 발걸음이 언젠가는 멋진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시를 알고 싶고, 읽고 싶은 독자분들이 계신다면, 이 시선집을 추천합니다.
이 시선집은 시인을 사랑하는 56명의 시인이 출간을 함께했습니다.
그 애정을 읽어보시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