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없이 그저 존재로서 태어나, 주체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인간은 사회에 내재한 기존의 규칙과 보편 가치 등을 헤쳐내야 할 필요를 갖는다. 그 대상을 보통은 부조리라 부른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인 그것을 함부로 부조리라 명명하는 일은 역사가 길러온 능률적 의식을 부정하고 이를 위배하는 위험성을 지닌다.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의 위계,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긴 시간 동안 인간을 지탱해온 뿌리로서의 도덕. 이것을 이치에 어긋난 개념으로 오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기조를 거쳐 주체성이 부각된 시대에 기존의 가치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용이하다. 이성과 감성이 있고 존재로서의 자유가 눈에 밟힐 수밖에 없는 속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적으로 보이는 일도 어쩌면 당연하다. 때문에 이미 적대하고 비판한 대상을 다시 한 번 비관하고 비판하여 영원토록 생의 물레방아를 딛는 삶. 추락의 말로를 끊어내는 삶, 냉소적 사고와 오인으로 치닫는 융통성 따위를 금세기는 때때로 바람직한 것으로 표현한다. 모순으로 완전히 길을 잃는 정도만 아니라면 그 불만의 표현을 쉽사리 나무랄 수 없는 실정에 있는 것이다.
사실로서, 개인은 전통의 관념과 시대정신을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나는 이것을 인간성의 한계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저 주변을 괄시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정도(正道)는 반드시 기미를 드러낸다는 생각이다. 바다 건너 우리네에 자리잡은 비이성적 추구, 스스로 당위를 개척하는 유사과학적 사상과 위계없이 난무하는 해체의 철학이 어느 정도 정명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삶이 그 자체로 기회를 의미할 때, 지성은 기회의 종류로 드러나며 보편은 지성의 집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타성적으로 자신의 목메단 윤곽을 그리는 사람의 비관이 불현듯 떠오른다. 삶을 위시해 비관의 물레방아를 딛는 인간들과 그들의 비관을 비관하는 인간 모두 내게는 어색하지 않은 군상으로 다가온다. 양가의 태도는 어쩌면 서로 간 조응 속에서 우연적으로 계속되는 것일 수 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한 번 더 생각하는 고작 그 정도의 치열함으로는 부족하지만,
생에의 의지를 꺾지 않는 것만으로 인간은 가장 저열한 박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첫댓글 실존주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찾아오던 이상적인 인간보다는 현존재로서 인간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중세와 근대의 초입까지는 인간의 본질이 현실에서 온전히 구현될 수 없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그것을 인간 이성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의 이상에 대해서도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그다지 이상적인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부조리', 곧 합리적이지 않다고 파악했습ㄴ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조리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실존주의는 지금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이상에 대한 희망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