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은 대원로 신태범(愼兌範) 박사 탄신 100주년이자 고인의 10주기가 겹친 날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백년을 헤아리자니 새삼 그분의 역작 '인천한 세기'를 되짚게 한다. 6일 예정인 뜻있는 이의 모임 또한 고인의 뜻을 되새기려는 그리움의 일단이다. 참으로 세월은 덧없이 빠르게 흐른다. 십년 전 10월31일 답동성당에서 이승을 하직하는 모습이 엊그제 같거늘. 은은한 종소리 따라 진행됐던 영결미사는 한 세기를 접어나간 주역을 기리는 근엄한 분위기였다. 특히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은 영정사진은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찬란한 단풍잎을 연상케 했다. 아호 '한옹(汗翁)이 시사하듯 구십 평생 나이를 잊고 땀 흘린 열정이 읽혀지는 '만년청년'이다. 의료사업, 지방자치구현, 저술활동 등 각 분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참여는 일일이 매거할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 그 분이 남긴 서한이 생각난다. 시한부 생명으로 서울 병상에서 보내던 본보 칼럼에 대해 일일이 공감해 주신 편지는 큰 힘이었다.
뒷날 목숨을 부지하고 되돌아 온 내 손을 잡고 건넨 첫마디가 "감사합니다"였다. 저승길 유예라면 의당 내가 할 치사인데 진정어린 환영에 가슴이 뭉클했었다. 평소 해박한 식견과 통찰력은 물론이려니와 섬세한 내적 감성이 '인간 신태범'의 참모습이다. 그분의 휴머니티는 엘리트의식에 자만치 않는 '대노년(大老年)의 겸손'에서 비롯했다 할 것이다.
또다른 매력은 왕년에 빙상과 유도선수였음이 다져진 우람한 몸매로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특히 오늘의 아시아경기대회 버금가는 일본 명치신궁대회 출전선수임에서야. 바로 그분 삶의 역동성을 입증하는 보기다. 서슬 퍼렇던 일제 말기 '신 외과의원'(愼 外科)을 열면서 성시개명을 거부했던 것도 그러한 배포다. '신 외과'는 환자뿐이 아닌 다 분야 인사를 아우르는 사랑방이기도 했으니 그게 쉬운 일인가. 79년 인천시정자무위원장이던 시절 나도 일원으로 보좌하며 해박한 음식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르기를 "음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성실한 사랑은 없다"고. 음식을 통한 맛과 멋을 일깨우는 식도락의 기회였던 셈이다. 뒷날 외지(外誌)에 색다른 음식소식이 있으면 자료를 챙겨드려 공감대를 넓혔던 것도 즐거운 추억이다. 어쩌다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시는 스스럼없는 모습을 접하노라면 유유자적의 여유가 읽혀졌다. '먹는 재미 사는 재미'는 목차만으로도 식도락의 맛과 멋을 일깨우기에 모자람이 없는 길잡인 것이다.
만년에 그분도 난청으로 불편을 겪었거니와 내가 청각장애자이기에 고충을 헤아리기에 어렵지 않다. 애써 온갖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자위해도 뜻 맞는 이와의 소통단절은 참기 어려운 아픔이다. 하긴 필담(筆談)을 도울 분이 있다면 오죽 좋을까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글마무리에 여담 한마디. 십 여 년 전 프랑스 함대가 입항했을 당시 거리에 화려한 제복수병이 삼삼오오 거닐고 있었다. 마침 그들과 거침없는 대화를 나누는 평복인사가 보여 체격으로 미뤄 외인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가까이 지나다보니 신용석씨(당시 인권재단이사장)가 아닌가. 한국최초 해군함 광제호 신순성제독의 장손인 그가 배에 계양했던 태극기를 개항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인천이 국제허브로 이목이 집주하는 계제에서 3대가 내리 향토사랑에 이바지 하는 경우가 흔한 일인가. 지금도 신용석씨를 통한 현재진행형이기에 앞날이 기대되는 까닭이다. 무릇 주름살과 함께 품위가 갖추어지면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하였다. 그분들의 사표(師表)가 이어 배턴을 돌려가는 중이다. 지금도 나는 고인의 서신을 간직하고 있다. '愼兌範 用箋(신태범 용전)' 한지 필적은 살아 숨 쉴 듯 금시 꿈틀대는 느낌이어서 거듭 명복을 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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