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두 돌 된 막내는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다. 8개월째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새벽에 5인실 병실에서 함께 지내 는 옆자리 아이의 말소리에 깼다. "엄마, 나 쉬 마려워." 소아암 병동의 아이들은 수액을 맞아 항암제를 배출해야 하기에 밤에도 소변을 자주 눈다. 아이 엄마는 피곤했는지 아이가 여러 번 부르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소변 누는 소리가 그칠 때쯤 아이가 말했다. "엄마, 깨워서 미안해…." 나는 아이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이 엄마는 대답 없이 소변 통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 왔다. 그러고는 두 사람 모두 잠들었다. 그러나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둔 나는 잘 수 없었다. 막아 놓은 둑이 터진 듯 멈추지 못하고 숨죽여 울었다. 말을 못하는 우리 막내도 같은 마음일까. 옆자리 아이에게 속으로 대신 대답했다. '네가 왜 미안해. 엄마가 미안하지. 아무것도 못 먹고 종일 토해서 많이 힘들지. 고마워. 사랑해. 얼른 나아서 집에 가자.'
어느날 같은 병실의 또 다른 아이가 많이 아팠다. 밤에도 못 자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돌보느라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그의 말이 너무 아팠다. 어떤 말을 해도 위로되지 않을 걸 알기에 할 말을 고르고 고르다 겨우 괜찮다고만 했다. 사실은 좀 더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이 왜 이렇게 아파야 할까. 오늘도 소아암 병동의 아이들이 얼른 낫기를 기도한다. 한미경 | 경기도 화성시
고기반찬
우리 형제는 1남 2녀로, 그중에서도 나는 부모님에게 꼭 필요한 큰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IMF로 형편이 힘들어진 우리 집은 밥 대신 홍합국을 끓여 먹고, 쌈장이나 간장에 밥을 비벼 먹으며 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아파트 앞에서 떡볶이와 어묵, 순대를 팔기 시작했다. 난 하굣길에 친구들을 데려와 300원, 500원짜리 떡볶이를 사 먹자고 했다. 그렇게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엄마가 집 근처 상가에 식당을 열었다. 부모님은 더 바빠졌고 나는 여동생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발달 장애 진단을 받은 남동생은 주중엔 어린이집에 있었다. 다섯 살 된 동생을 맡기고 오는 길에 엄마는 참 많이 울었다. 어린 나는 뒷자리에서 엄마를 따라 소리 없이 울었다. 여동생과 나는 텔레비전을 보며 엄마를 기다리다 잠들곤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다니는 영어 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내 봤지만 소용없었다. 중학생이 됐지만 교복 살 돈이 없어 엄마가 이웃집에서 얻어 왔다. 총 세 벌이었는데 전부 컸다. 아빠는 속도 모르고 "잘 됐다!"라고 말했다. '너무 큰데 ….' 나는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 날, 속상함이 극에 달했다. 친구들의 교복과 달리 낡고 색이 바랜 교복이 창피했다. 숨고 싶었다. 그래도 그 교복을 입고 3년 동안 반에서 회장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성적 오르면 꼭 새 교복 사줘!"라고 말하며.
고등학교에 입학할 땐 다행히 아빠와 교복점에 갔다. 눈부신 새 교복이 드레스처럼 보였다. 그날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최고의 선물을 받은 나는 힘을 내 공부했다. 그리고 사범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하면 되는구나. 정말 내가 합격했어!' 교사 임용 시험까지 합격하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학비만 1년에 1000만 원이었다. 총 4년을 다녀야 하는데, 나는 반도 다니지 않고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밥 한 끼 사 먹기가 힘들어 더 이상 대학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집안 사정을 뻔히 아는데 공부하겠다고 엄마에게 손 벌리기가 미안했다. 나는 더 일찍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자퇴 후 공무원 시험을 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경찰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한 번에 합격했다. "엄마 아빠, 나 이제 경찰이야!" "우리 딸, 장하네!" "내가 돈 벌 테니까 가게도 처분하자." 사실 엄마는 가게를 운영할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용돈을 많이 드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월급의 대부분을 부모님께 드렸다. 건강이 악화된 엄마는 지역 병원에서 치료받기가 어려워 비행기를 타고 서울 병원에 다녔다. 쉬는 날이면 그런 엄마를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통장에서 병원비 빠져나가는 알림 소리가 잦아졌다. 제법 나이를 먹은 남동생은 집에서 지낸다. "누나가 돈 많이 벌어 올게. 그래서 우리 동생 치킨 사 줄게." 말을 못 하는 남동생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는 힘 좋은 남동생을 씻기고 먹이고 돌보느라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 남동생은 다섯 살 정도의 지능과 인지 능력을 가졌지만 누나가 경찰이고 집에 올 때마다 치킨을 사 준다는 사실은 아는지 항상 나를 기다린다. 고향에서 일터까진 두 시간 거리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며 지낸 지 벌써 10년. 어릴 때 많이 놀아 주지 못해 동생에게 장애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 눈물을 훔친 날도 많았다. '이럴수록 내가 더 열심히 벌어야지….' 우리 식구들에게 좋은 반찬을 하나라도 더 사 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 매고 일에도 매진한다. 그 이유 하나로 열심히 살아왔다. 여동생도 병원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을 다니고 있고, 엄마도 건강이 많이 나아졌다. 10년차가 되니 월급도 꽤 올랐다. 학창시절 움츠러든 어깨가 점점 펴진다. 나는 그동안 엄마의 버팀목이자 아빠의 든든한 큰딸이었다고 자부한다. 돌아보면 다섯 식구의 장녀는 참 외로웠다. 동생들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부담도 많았다. 때문에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지만 지금은 분명 행복한 길을 걷고 있다. 오늘도 나는 행복한 출동을 한다. 우리 가족 반찬은 이제 고기반찬이다. 양수경(가명) | 경남 통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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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갑습니다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가을이 무륵익어갑니다
환절기 감기 유의하시어
건강하게 지내세요
사랑천사 님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공유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변절기 감기유의하시어
건강한 나날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