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트레킹과 문화탐방으로 유익한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4713345830431531)
안산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으며 높이는 295.9m로 낮으막한 도심의 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재, 추모련이라고 불렀고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불러왔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어머니의 산이라고 해서 모악산(母岳山)이라고 불렀으며 호랑이가 출몰하기 때문에 여러사람을 모아서 산을 넘어가야 했기에 모악산라고도 불렀다는 설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을 정할 때 하륜(河崙)이 안산 남쪽을 도읍지로 추천하였다. 조선시대 인조 때인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639F345830431615)
첫째, 산의 모양이 길마와 같이 생겨서 길마재, 또는 한자명으로 안산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명종 때 명리학자 남사고(南師古)에 따르면 “서울 동쪽에 낙산이 있고 서쪽에는 안산이 있으니, 반드시 당파가 생기는데, ‘낙(駱)’는 각마(各馬)이니 동인은 갈라지고, ‘안(鞍)’자는 혁안(革安)이니 서인은 혁명한 후에야 안정되리라.”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4B0345830431807)
둘째,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이 산을 어머니의 산이란 뜻으로 모악이라 하고, 이 산 남쪽의 고개를 떡고개, 남산 동쪽 고개를 벌아령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나가려는 어린애를 꼬이고, 또는 때리겠다고 얼러서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2B81485830B9200F)
![](https://t1.daumcdn.net/cfile/cafe/26655A345830431913)
셋째,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둘이 있는데, 동쪽 봉수대는 평안도 강계군 만포진을 기점으로 하여 육로로 고양시 봉현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남산 셋째 봉화에 통하고, 서쪽 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의 고정주를 기점으로 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로 고양시 고봉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남산 넷째 봉화에 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봉화뚝 봉우재라 하며, 또는 높고 험한 산이란 뜻으로 기산 · 기봉이라고도 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76BB345830431A05)
안산둘레길은 전체가 메크로 잘 조성되어 도심속의 숲속으로 이곳 지역주민들에 인기이고 남녀노소와 장애인까지 트레킹 할 수
있도록 잘 건설되어 있네요!@!!
![](https://t1.daumcdn.net/cfile/cafe/2313CE3A583053820B)
![](https://t1.daumcdn.net/cfile/cafe/23444D345830431C33)
전나무숲길과 메타스퀘어숲길도~~~
![](https://t1.daumcdn.net/cfile/cafe/265D90345830431D1C)
![](https://t1.daumcdn.net/cfile/cafe/254ED3385830431F06)
정상 봉수대에서 추억의 사진 찰각후~~~
![](https://t1.daumcdn.net/cfile/cafe/234EE8385830432005)
북한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https://t1.daumcdn.net/cfile/cafe/234A1238583043220C)
하산후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을 찾아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C6037583043E809)
'한번은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소개한다. 감옥에서 애국지사의 눈물과 피가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며 자란 '석순'을 마음에 품으러 가보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27333F37583043EA22)
1919년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불러왔다. 일제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둘 감옥이 필요했고 그 결과 '경성감옥'이 대규모로 세워지고 증축이 이어진다. 이 감옥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2D2537583043EB28)
내가 형무소 간수의 자리에 앉아 감시하다 갑지기 비상!!!ㅋㅋㅋ
![](https://t1.daumcdn.net/cfile/cafe/21512837583043EC04)
담장 건너 망루가 있는 곳이 역사관 출입구이다. 입구를 지나 역사관에 들어가기 전 주위를 살펴봤다. 한눈에 보아도 일부 건물이 헐려 공간이 허하다. 안내소책자의 이동 동선 '전시관 → 중앙사 → 12옥사 → 11옥사 → 공작사 → 한센병사 → 순국선열추모비 → 사형장' 순으로 가보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25410B37583043EE15)
105인 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용된다. 시간이 갈수록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수감자가 증가해 감옥 증축이 계속된다.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이 약 2,890명에 달했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3F637583043EF12)
![](https://t1.daumcdn.net/cfile/cafe/22450E37583043F110)
다른 건물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 사형장이 있다.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전국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한 장소이다.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으며 '통곡의 미루나무'도 볼 수 있다. 열리고 닫히는 나무판 위에 교수형에 사용됐던 줄이 내려져 있다. 그 건너에는 사형집행 배석자가 앉았던 의자들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684D3C583043F205)
사형장을 지나면 고문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몰래 시체를 버리던 통로 '시구문'이 있다. 약 200m 길이에 이르며 1992년에 발견됐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3A203C583043F331)
광복 후에도 감옥으로 쓰였다. 1960년대에는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사람이 투옥됐다. 사형 선고와 집행 반세기 후 무죄 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도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갔다. 1975년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재판 후 다음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고인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또한 민주화운동을 하던 리영희 등 민주인사들이 이곳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이후 건물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이유로 철거되기 시작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34A43C583043F435)
유관순열사가 이곳에서 처참히 사라져간 감옥에서~~~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현재 병천면) 아우내(竝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다. 그녀는 1916년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 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고등과(高等科) 1화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ㆍ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한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한다. 그녀는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ㆍ연기(燕岐)ㆍ청주(淸州)ㆍ진천(鎭川) 등지의 교회ㆍ학교를 돌면서 만세운동을 협의한다.
그녀는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된다. 그녀는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그녀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였다. 결국 그녀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京城)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7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온갖 악형에 시달리다가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담은 안국동에 있는 북촌 한옥마을길을 찾아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2465853C583044780B)
북촌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하여 전통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 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백 년 역사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전통문화체험관이나 한옥음식점 등으로 활용이 되어 간접적으로나마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5EB23C5830447A12)
예로부터 원서동, 재동, 계동, 가회동, 인사동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 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당시로써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 곳곳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55333C5830447B1B)
북촌한옥마을을 이루고 있는 한옥의 아름다움과 마을 구석구석을 이어주는 골목길을 문화관광지화하기 위해 북촌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 8곳을 지정한 것이다. 각 지점 바닥에는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기에 좋은 사진촬영대(phot spot)를 설치해 북촌 골목길을 두루 다닐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창덕궁 전경이 잘 보이는 북촌1경, 원서동 공방길은 북촌2경, 가회동 11번지 일대는 북촌3경, 가회동 31번지 언덕이 4경,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는 가회동 내리막 골목길이 북촌5경, 가회동 오르막 골목길이 북촌6경, 가회동 31번지가 북촌7경, 삼청동 돌계단길이 북촌8경으로 지정돼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62353C5830447D0F)
![](https://t1.daumcdn.net/cfile/cafe/2351763C5830447E18)
인촌 김성수 선생은 1891년 9월 9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울산(蔚山)이고, 호는 인촌(仁村)이다. 호남의 거부였던 아버지 경중(暻中)과 어머니 장흥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세 형은 모두 어릴 때 죽었으며, 3세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직 사장·동아일보 사장·보성전문학교 교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평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해방 후에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제2대 부통령 등을 지냈다. 1955년 2월 1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60B53C5830447F10)
거리음식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꿀호빵도 먹으면서 길을 걷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256FC73C5830448102)
![](https://t1.daumcdn.net/cfile/cafe/2576BB34583044830D)
![](https://t1.daumcdn.net/cfile/cafe/256D68345830448416)
![](https://t1.daumcdn.net/cfile/cafe/257142375830EECE19)
버선코 같은 처마선이 언덕배기에 펼쳐진 서울 북촌 한옥마을. 이곳을 거닐면 담 너머 한옥을 훔쳐보는 재미에 언덕길이 힘들 줄 모른다. 관광객이 몰려 있는 ‘북촌로 11가길’의 옆 골목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취운정(翠雲亭)’ 세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자 시절 머물렀던 곳으로, 2008년 한옥 호텔로 개조해 문을 열었다.
취운정은 왕이 궁궐을 나설 때 머물렀던 정자 ‘취운정’에서 착안해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북촌에 터를 잡은 명문 세가들은 이 취운정에서 예술의 꽃을 피웠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선상에 있는 북촌은 조선왕조 500년의 세월 동안 시대의 중심이 모이고 흐르던 최고의 명당이었다.
![취운정에서는 한식 전문점 ‘두레’의 셰프가 만든 전통 한정식을 맛볼 수 있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chosun.com%2Fsitedata%2Fimage%2F201604%2F08%2F2016040801144_1.jpg)
이숙희 취운정 대표는 한옥을 호텔로 리모델링하면서 한국 전통의 문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사동에서 30년 전부터 한정식집 ‘두레’를 운영해온 그는 음식 외에도 가야금, 판소리, 한복과 침구 디자인 등 우리 전통문화에 두루 관심이 있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019D345830448602)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 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운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69BD34583045371D)
![](https://t1.daumcdn.net/cfile/cafe/216C9738583052622F)
![](https://t1.daumcdn.net/cfile/cafe/2102F8375830EC9D08)
![](https://t1.daumcdn.net/cfile/cafe/243F0B4B5830B9D505)
![](https://t1.daumcdn.net/cfile/cafe/22639F345830453921)
![](https://t1.daumcdn.net/cfile/cafe/2169B8345830453A1D)
![](https://t1.daumcdn.net/cfile/cafe/23655A345830453B1F)
![](https://t1.daumcdn.net/cfile/cafe/216E96345830453D19)
![](https://t1.daumcdn.net/cfile/cafe/216A59345830453E1D)
이제 인사동 골동품거리로~~~가 보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BE334583045400B)
많은 외국관광객들의 선물코너로 인기인 장소 인서동
![](https://t1.daumcdn.net/cfile/cafe/2545AF375830454118)
![](https://t1.daumcdn.net/cfile/cafe/232EDA37583045432C)
인사동거리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한 법정동의 명칭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는 인사동 및 그 인근지역을 지칭함.
![](https://t1.daumcdn.net/cfile/cafe/2433BB375830454429)
인사동은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문화의 거리이다. 여기에는 골동품 상점, 화랑, 표구방, 필방, 전통공예품 상점 등이 집중되어 있고, 전통찻집·전통주점·전통음식점이 번성하고 있다. 인사동은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390C4558304FD01F)
![](https://t1.daumcdn.net/cfile/cafe/2129F64558304FD236)
도심속을 걸으면서 문화탐방과 관광객으로 즐건하루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