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눈, 씨와 열매 그리고 진리와 생명
이사 55,10-11; 로마 8,18-23; 마태 13,1-23
연중 제15주일; 2023.7.16.; 이기우 신부
1. 농민주일
한국 교회는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인 오늘, 연중 제15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끌고자 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는 위원장 박현동 아빠스의 명의로 ‘농민주일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2. 유기농과 생태사도직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기후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고, 지구촌 곳곳이 기후 재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금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땅을 가꾸고 작물을 키우는 농부들을 생각하여 봅니다. 생명을 가꾸고 길러 내어 소출을 얻는 농사는 지속 가능하여야 합니다. 곧 우리가 먹을 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땅이 훼손되지 않고 계속해서 작물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농업 현장에서 사용하는 합성 비료와 살충제는 토양의 미생물을 죽이고 토양 구조를 파괴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토양을 황폐시킵니다. 이렇게 황폐해진 땅에서는 작물을 키울 수 없게 됩니다. 현대 농업은 사실상 ‘산업농’에 가깝습니다. 화학 비료와 살충제, 고엽제 등 유독 물질의 사용을 전제로 하는 농업은, 다시 말해서 생명과 돌봄이 아니라 ‘죽음’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농사는 생명을 키우고 돌보는 일인데, 공산품과 같은 규격화된 농산물을 얻으려고 생명에 반대되는 일들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과 파괴는 우리가 자연에 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찬미받으소서」, 3-6항 참조)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폭력입니다. 산업농의 폭력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물을 오염시킨다는 점입니다. 농촌에서는 지하수를 마셔 왔는데, 이제 그 지하수가 많은 제초제와 살충제 등의 유해 화학 물질로 오염되었습니다. 이런 물을 마시는 것은 우리 몸을 해칠 뿐만 아니라, 이 오염된 물이 작물 재배에도 사용됨으로써, 그것을 먹는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와 갖가지 위험을 낳습니다.
이 모든 것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유기농입니다. 유기농에서는 합성 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작물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토양 미생물에서 얻습니다. 이 미생물들은 토양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생명체는 사람들이 ‘해충’이나 ‘잡초’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포함합니다. 산업농이 해충과 잡초를 박멸하려는 접근 방식을 가진다면, 유기농은 모든 생명체의 중요성과 상호 연결성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유기농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체의 대량 학살을 가져올 수 있는 산업 농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 농업을 선택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을 더욱더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화학 농약으로 말미암아 황폐해진 땅과 그곳에서 같이 죽어 가는 생명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땅과 생명을 보호하려는 농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대표적인 ‘생태 사도’입니다. 대규모 산업 농업을 지향하는 정부 정책과, 단일한 규격의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구매 형태 때문에 유기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땅은 애정을 주면 풍성한 결실로 보답하여 줍니다. 그러나 유기 농업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사회가 그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땅을 보호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늘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가톨릭 농민 회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에도 ‘땅을 지키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생태 사도’로서 굳건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생명이 자신들의 손을 통해서 자라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기뻐하며, 꿋꿋이 어려움을 견디어냅니다. 또한 이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을 외형이나 가격을 따지지 않고 꾸준히 선택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농 생활 공동체의 식구들로, 같은 ‘생태 사도’로서 서 있습니다.
이익과 물질 만능의 세상에 살면서도 희생과 투신을 통하여 복음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생태 사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잦아진 이상 기후는 우리의 삶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생태 사도’가 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3. 씨 뿌리는 사람
이상 전해 드린 농민주일 담화문에서 강조하는 유기농과 생태 사도직의 근거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자연 질서 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들려주듯이,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줍니다”(이사 55,10). 이렇게 하느님께서 비와 눈으로 적셔주시는 땅에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앗이 무엇인지는 호세아 예언자가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호세 10,12).
그러니까 뿌려야 할 씨앗은 정의의 가치이고, 그리하여 거두어 들여야 할 열매는 신의라는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연 질서와 농사의 이치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계시 진리에 대한 탁월한 비유입니다. 복음적 가치를 증거해야 할 우리의 사명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자연과 생명, 정의와 신의의 가치를 일찌감치 깨닫고 정의평화 운동을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교구에서 전개했던 장일순(1928~1994)은 우리나라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이자 친환경 농산물 직거래 조직인 한 살림운동과 생명운동을 전개한 사회운동가이며 교육자이자 서예가입니다.
자연 질서에 비유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준 예언자들처럼 예수님께서도 농사에 빗대어 복음선포의 사명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오늘 복음이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공생활 중에 겪으신 다양한 인간관계의 사례를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앗에 빗대어 군중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사두가이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숱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무죄하신 예수님을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종교적 혐의를 뒤집어씌운 다음 반역을 꾀했다는 정치적 누명까지 덮어씌워서는 로마총독의 권세를 빌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이 새들의 먹이로 먹히듯이 마귀의 조종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치유와 구마 기적의 혜택을 바라며 그분 앞에 모여 들어 직접 말씀을 들었던 군중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내치지 않고 다 받아들여서 돌보아주시던 시절에는 호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다가왔으나 그분이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시면서 당신께서도 십자가를 짊어질 것임을 예고하시자 지지하던 마음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돋아낼 수는 있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해 햇볕에 말라버린 처지와 비슷합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끌리면서도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모순된 이중의 목표를 추구하다가 번번이 걸려 넘어짐으로써,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이 더 빨리 자라나는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 버리는 처지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겁 많고 믿음이 부족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 나서 용감하고 믿음이 담대한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마티아를 뽑을 때 모였던 제자들만 해도 백 스무 명 가량 되었는데(사도 1,15), 이들은 성령을 받아 믿음이 굳세어져서 목숨을 바치거나 또는 일생을 바쳐서라도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었던 사람들로서 초대교회에서 사도라고 불리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중에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나 되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4. 씨 뿌리는 교회
교회는 사도들이 뿌린 씨앗으로 거둔 열매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자신의 사도직 활동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이벽을 비롯하여 복음을 자발적으로 이 땅에 들여온 선각자들도 따지고 보면 서양에서 중국에까지 와서 연구와 저술활동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 덕분에 맺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선각자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교우촌이라는 열매가 박해 속에서도 풍성히 맺힐 수 있었고, 그들 교우촌의 신앙선조들이 뿌린 순교라는 씨앗과 신앙 증거라는 씨앗으로 맺을 수 있었던 복음화의 열매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전해지는 경로는 씨앗과 열매처럼 퍼져나갑니다. 자신의 마음 밭을 어떻게 일구느냐에 따라서 복음이라는 씨앗의 운명이 결정되고 또 그 씨앗이 우리 삶에서 맺을 열매도 정해집니다. 이 마음 밭을 자아(自我)라고도 하는데 이 자아를 성찰하는 가운데 우상을 향하려는 성향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과정이 영성생활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뜻보다도 자기 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경우에는 자기 자아가 우상이 되어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자아 성찰은 꼭 필요한 영성생활의 일부입니다. 이는 땅에 떨어진 밀알이 썩는 과정과도 같아서, 우상과의 싸움에서 부딪치며 정화되고 성숙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오늘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다시피,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겪어야 하는 그 고난은 장차 맺게 될 복음의 열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로마 8,18). 그 고난을 잘 견디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다고 질책받던 제자들이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들로 놀랍게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복음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할 모습입니다.
농민주일인 오늘, 우리는 자연과 농사의 이치를 비유하여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일깨워준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리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법이 없고 열매를 맺게 하고야 말 듯이,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도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하고야 맙니다. 그 열매는 생명입니다. 영과 혼이 결합되고, 혼과 마음이 소통하며, 마음이 몸과 소통하는 온전한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