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연 시인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노작문학상 수상.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 『수학자의 아침』
반대말
김소연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놓을 뿐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우편함이 반대말을 떨어뜨린다
나는 컵을 떨어뜨린다
완성의 반대말이 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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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늙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대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목련나무가 있던 골목
언덕 아래 사람 사는 불빛이 차오릅니다 흰 입김을 앞으로 내밀면서 언덕을 내려오는 당신, 한 쪽 손에 들려진 짐꾸러미를 잠시 내려놓고, 한 쪽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내려놓고, 당신은 나를 올려다봅니다
기다리던 택시가 오고, 당신은 가방이랑 짐꾸러미를 챙겨 들고 차 문을 닫습니다 짐을 챙기느라 당신을 미처 챙기지 못한 당신은 내 옆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당신이 서 있습니다 깜박깜박 졸음에 빠져듭니다
깨우려다 그만둡니다 내 주먹마다 흰밥이 피고 그 밥알들이 환하게 저물어 다 떨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당신의 이불이 되어줄 때까지, 나는 혼자 뜨거운 차 한 잔을 오래 마시며 이 겨울을 지나가고 싶습니다
눈이 옵이다 저 저녁을 다 덮는 흰 이불처럼 눈이 옵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은 짧은 길을 길게 돌아서, 찬 기운 가득한 빈집에 들어가 버리고, 당신이 남긴 당신과 나는, 이 눈을 다 맞고 서 있습니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습니다 새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 먹으세요
시인 지렁이 씨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이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나는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빛의 모퉁이에서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성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
왼 손바닥이 가슴에 얹히고
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터널을 통과하려는
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
눈물로 나를 세례하곤 했다
자동우산을 펼쳐 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
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
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
하얀 타일 위에다
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
시 한 줄을 적어본다
네모진 타일 속에는
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길을 항해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
누군가에게 방주를 띄우게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평생토록 새겨 왔던 비문(碑文)에
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