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대해 지체로서 반응하라.
1. 상처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선택하는 유형은 제각기 다릅니다.
2. 우선 방치형입니다. 나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관심을 끄는 형입니다. 많은 경우가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 침묵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랑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없는 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3. 나의 이익이나 내가 손해보는 일이 아니라면 침묵하는 것은 개인적인 자유라고 생각하며 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4. 그러나 실상은 공동체적인 고통은 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지체로서 반응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5. 모든 좋은 것의 이면에는 "이것이 성경적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는데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6.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은둔과 참여 사이를 오가면서 개인적인 영성을 키워가는 일과 그것을 사회적으로 표현하여서 공동체적인 영성으로 연결하는 흐름을 이어왔습니다.
7. 사회적인 죄와 악의 문제에 대해서 분리나 단절형은 쉬운 선택입니다. 선을 긋고 살아가면 그만이니까요. 또 혼합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과 구별됨이 없이 세상의 죄악이 관영한 흐름 속에 빠져있어서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8. 심지어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상처를 계속 찌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거짓 루머를 퍼뜨리고 모함과 이간질을 하면서 또 하나의 악의 축이 되는 경우입니다. 일베와 같은 부류가 그러합니다.
9. 문제는 변혁과 변화를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10. 세상에는 자신이 받은 상처와 아픔의 문제들을 세상을 변화 시키고 변혁하는 힘으로 연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타인이 받은 상처를 당연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면서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개인과 공동체적인 상처에 대해서 지체로서 공동체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세사ㅓㅇ의 아름다운 변화와 변혁은 주로 그들에 의해 이루어 집니다.
11. 변혁과 변화의 경우에는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시작과 과정도 방향성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상처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성육신적인 사고와 행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13. 멋진 말을 한다고 해서 멋진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가르친다고해서 다 선생이 아니요 삶으로 가르치는 이들이 선생일 것입니다.
14. 예수님은 고통 당하는 이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그러한 삶의 뿌리에는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고 수시로 기도하시면서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경청의 시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5. 청년의 때를 보내면서 저는 N 포 세대와 같았습니다. 22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 3년차는 막노동을 하면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꿈꿀 수 없었습니다. 직장도 진로도 불투명했습니다. 집을 산다는 소박한 기대도 접었습니다. 꿈과 희망도 잘 보이지 않아서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16.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정말 좋은 지체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은 큐티책을 정기적으로 사서 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월급날이면 회사 근처로 사서 저에게 몸 보신을 시켜 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제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써서 용기와 격려를 했습니다. 어떤 분은 저만 만나면 기도방으로 데리고 가서 울면서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대학 등록금을 보태 주기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섬김으로 대학 다니는 동안에 1000여권의 책을 사서 읽고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17. 좋은 지체들과의 만남은 저를 변화 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18.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상처에 대해서 자기연민에 사로 잡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기 보다는 세상의 상처에 대해서 연합하고 연대하면서 대안이 되려는 씨름을 계속 했습니다.
19. 보육원을 다니면서 고아를 섬기는 일들을 하였고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이들을 권하여 함께 섬겼습니다. 아이사랑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었고 감사하게도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배들이 그 동아리를 통하여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소외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년들과 연합하고 연대해서 인도 오릿사주의 폭동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들을 하고 컴패션을 통하여 96명의 어린이들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섬기는 일들을 이어갑니다.
20. 상처가 그대로 두었다면 독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신세타령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불신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지체들로 인해서 상처라는 동굴에서 나와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수 있었습니다.
21.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묵상과 기도였습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상처에서 벗어 나와 상처입은 이들의 지체가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22. 여전히 세상은 상처투성입니다. 그 상처들을 제가 다 치유하는데 참여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제게 주신 지체라는 영역 속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면서 단지 울어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상처를 벗어나는 일에 보탬이 되고자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씨름을 이어갈 뿐입니다.
23. 최근에 새터민 형제 한 명이 다쳤습니다. 지난 월요일 그 형제를 방문했습니다. 그 형제는 새터민이지만 나이 40이 넘었지만 누군가를 돌보고 섬기려는 목적으로 간호사를 준비하는 청년입니다. 참 반듯한 생각을 가지고 보이지 않게 자신도 어렵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지체를 돕고 섬기는 형제입니다. 그런데 국시에서 일반 상식이란 과목에서 계속해서 불합격이 나오는 것입니다. 상심해 있는 형제를 격려하고 종종 돌봄과 섬김을 이어 왔는데 얼마 전에는 제가 전부 다 도울 수 없는 영역의 일이 생겼습니다. 사고로 손가락이 짤려서 접합 수술을 했던 것입니다.
24. 그 형제가 사고를 당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지체로서 반응하는 여러 일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 형제가 국시를 준비하도록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형제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백만원이 넘는 돈이지만 기꺼이 즐거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는 형제의 치료비로 들어간 돈을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치료비를 지원했습니다. 또 새터민 형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방문하고 격려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합력하여 형제가 상처를 벗어나서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지체로서 반응을 한 것입니다.
25. 형제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교회라는 공동체가 지체로서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상처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치유를 경험한 이들이 또 다른 상처 입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교회는 죄와 상처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처방과 치료를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에 대해 반응할 줄 아는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희망일 것입니다.
26.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할 교회는 다름아닌 너와 나 우리들 자신입니다.
글: 이상갑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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