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쓴 시를 두번 다시 보기 싫다. 혐오감이 난다. 누가 시를 위해 순교할
수 있을까? 나는 시를 불신했고 모독했다. 사진과 상형문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아 그러니까 나는 시가, 떨고 있는 바늘이 그리는 그래프라는 것을, 波動力學이라
는 것을, 독자께서 알아 주시라고 얼마나 시의 길을 잃어버리려고 했던가. 죄송합
니다.
1983년 9월 황지우
[沿革 연혁 ]
섣달 스무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 바다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이튿날 내내 靑苔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
는 雨期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
니다. 滿潮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一家의 심한 살냄새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土房門을 빠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沿岸에 남아 있었습니다.
모든 近景에서 이름 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난 木船들이 그 사이
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다로 가는 대신 뒤안 장독의 작게 부서지
는 파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빈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나신 솔섬
새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느 계곡이 깊어 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南灣의 멀어져 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內地에는 다시 연기가 피어 올랐습니다. 그럴
수록 近視의 겨울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 갔습니다. 아
버님이 끌려가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에 서
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뜻언뜻 어머니
가 잠든 胎夢 중에 아버님이 드나드시는 것이 보였고 저는 石花밭을 넘
어가 燐光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꽃
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朔望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의 死後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나지 않고 木船드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들은 머
리띠의 흰 천을 따라 內地로 가고 여인들은 還生을 위해 저 雨期의 靑
苔밭 넘어 再拜三拜 흰떡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와하는 바다의 內心
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와하는 모든 물플들을 뜯어 올렸습니다.
內陸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다에 때아닌 배추꽃들
이 떠올랐습니다.
먼 훗날 제가 그물을 내린 子宮에서 燐光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해와 감상
마치 전설처럼, 시공을 초월한 어떤 바닷가에서 소리없이 진행되는 영상이 떠오른다. 때는 섣달 스무 아흐레, 한 해의 마지막 날. 우기의 오랜 비가 내리고 있다. 바다에는 섬들이 있고, 청태밭이 있으며, 목선이 있고, 물새떼가 있고, 석화밭이 있다. 그리고 뭍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가 있고,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가 있고, 중심에 조용히 고통스런 의례를 지켜보는 어린 화자가 있다. 그 고통스런 의례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데, 어린 화자의 눈에는 바닷가의 온 세상이 그 의례에 참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다는 오랜 내력으로 뒤척이며, 운명처럼 사람들의 마을을 드나들고, 어머니는 바다를 달래려 애쓴다. 처음 두 개의 연은 그와 같은 어두운 예감에 둘러싸인 풍경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세번째 연에 이르면 아버지의 부재가 강제된 것임이 넌지시 드러나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내가 이루는 혈연의 유대는 신비로운 환상의 빛깔을 띤다. 네번째 연에는 죽음과 바닷가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를 달래는 여인들이 멀리 있다. 이 연의 마지막 문장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는 아름다운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땅 위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위무하는 시인의 상징적 몸짓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짧은 마지막 연은 이 시의 앞길을 활짝 열어 젖힌다. 어두운 분위기로 이어온 이 시는 혈연의 지속을 통해 삶의 미래와 꿈에 대해 호의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서정시에는 행가름이 없어 줄글로 읽히지만 산문시라고 하기는 어렵다. 예절바르게 또박또박 존칭어미를 사용한 이 시는 찬찬히 읽을 때 각별한 운율이 느껴진다. 1980년대 초중반에 실험적이며 재기에 넘친 풍자의 목소리로 한 시절을 맞았던 시인 황지우의, 이 처녀작은 다른 그의 시를 익힌 사람에게는 낯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철의 유행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생명을 지닌 실험적인 시, 진정한 파격의 시는 단단한 시적 자질의 뒷받침 없이는 태어나기 어렵다. 이 단단한 시적 자질은 서정성이란 이름으로 대표될 수 있다. 과연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잠재력이야말로 시인 황지우로 하여금 당대의 시인으로 밀어 올린 동력이라 하겠다. [해설: 이희중] http://my.dreamwiz.com/itrue1/modernpoem/1hipoem/hwangjiu.htm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3]
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이름을 대고 나이와 직업을 대고
꽝 내리치는 주먹
떨어지는 국화꽃잎 아래서
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컵의 물이 근엄한 近影에 튀었다
쓰레기통에서 자기 그림자를
파먹는 미친 개 같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默示의 물 우에 꽃잎 몇 개가
혓바닥처럼 떠 있었다
[歸巢귀소의 새 2]
숲새는 지 울음이 들릴락말락한 까마득한 달팽이管 속으로 날러 가부
럿다 지 울음으로 숲 둘레를 막아 놓고 그 숲에 집 지은 숲새는 可聽
圈 몇 옥타브 우에서 끝없이 목이 쉬었다......사이사이에......지가
깃든 수풀 밖으로 또다른 숲이 있능가 없능가 의심하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형사에게]
이제 김형사와 나는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아내
도 처음처럼 놀라거나 경계하지 않고 커리를 타오고, 우리 아이 장난
감까지 사들고 들어오는 김형사에게어떤 "인간적인 것"을 확인한다.
그는 늙으신 어머님께도 깍듯이 인사한다. 그 인간적인 것 때문일까.
그와 나는 좀처럼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제1공화국
"에서 "최불암씨 연기"가 좋았다고는 말한 적이 있다.
연기? 우리도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님니까, 김 선생님? 내가 선생님이
라고 불러 주는 그것에 그는 특히 만족한 것 같다. (그가, 크게, 웃
었으니까) 나도 따라 웃으며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는 그의 물음에
답한다. 그걸로 생활이 되냐고 그는 묻는다. 나는 답한다. 몸은 좀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답한다. 그리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살아온 이야기들을 그는 한다.
그는 이북 황해주 지주 출신이라고 한다. 어렸을 적 내무서원 사람들
이 집에 와서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을 보았고, 그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았고, 어머님과 동생들과 월남했고, 어렵게 살았고, 해
병대를 제대했고, 이 길로 뛰어들었는데, 김형사가 사람들 집을 방문
할 때 그러니까 사람들이 꺼려하는 이유를 그는 안다고도 했다. 그는
예절 바르고 잘 웃고 어쩌면 사물에 대한 연민도 있어 뵌다. 나는 언
제라도 그를 환영한다고 했다. 그도 박봉이지만(!) 언제 밖에서 쇠주
나 한잔 하자고 하고 갔다. 그가 간 뒤로 우리의 연기를 곰곰히 따져
보는 버릇을 이제 나는 없앤다.
[심인]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해와 감상
시인은 일상의 사소한 켜에도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지 않은 옛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돈을 내고 영화를 보기 전에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들어야 했다.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도 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세월이 지나면 증인이 없어질 테니, 후손들이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주석이 필요한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더 단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벨이 울리고 굵은 목소리로 `곧 애국가가 시작됩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고 방송된다. 애국가를 연주하는 동안, 이 땅의 보기 좋은 모습은 모조리 은막에 영사되었다. 설악산 단풍, 서울의 삼일고가도로, 동해안의 해돋이, 한려수도, 을숙도의 철새군, 한라산 백록담, 운동장 광경, 제철소 광경 등등.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은 그제사 앉아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시인은 그 수많은 보기 좋은 광경 가운데 을숙도의 철새떼가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광경을 주목하였다. 기억하건대, 그 장면은 후렴의 장엄한 마무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시인은 그것이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럽게 여긴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하는 소망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환기하면서 그에 대한 시인의 환멸과 소망을 잘 보여준다. 지상을 이륙하여 장대하게 날아오르는 철새떼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장대하게 이륙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무작정 떠나버릴 수 없는 곳에 1980년대를 살았던 젊은이들, 젊은 시인의 짐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는 풍자의 기조를 유지한 채, 적절히 당대적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의 애환을 포섭하였다. 현실을 약간 비껴선 풍자의 눈길은 현실의 왜곡된 구조를 선연히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된다. 1980년대 우리 시에서 이 시, 또는 이 시로 대표되는 황지우의 시적 태도는 뚜렷한 성취를 남겼다. [해설: 이희중] http://my.dreamwiz.com/itrue1/modernpoem/1hipoem/hwangjiu.htm
[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
조간에는 피맺힌 절규...... 통한의 유랑길이라 하고
석간에는,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고 씌어 있다.
제목도 아침 저녁 형형 색색으로 뽑아 놓았다.
'나의 조국' 합창하며 투쟁다짐.
PLO 떠나던 날 '우리는 조국 땅에 다시 온다.'
꺼지지 않은 채 흩어진 '불씨',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총구마다 아라파트 초상화,
'전세계서 지하 투쟁' 선언.
(아, 이 말이 모두 외신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베이루트 21일 AP 전송-연합]으로 받은 사진들.
i) 털이 덥수룩한 중년 사내가 군복 차림으로 이린 딸과 작별한다.
ii) 미제 M16과 소련제 AK47 소총을 든 앳된 소년 전사와 백발의
전사가 레바논군 트럭에 실려 베이루트 항으로 향하고 있다.
iii) 한 팔레스타인 여인이 아라파트 머리를 움켜 안고 이마에 키
스를 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하듯 고개를 숙이고 안겨 있다.
그 밑에 아라파트여 안녕......이라고 씌어 있고
그리고
v) 이건 진짜 작품인데, 특종인데,
한 전사의 부인이 두 손으로
소총을 하늘 높이 쳐들고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다.
(출산한 때의 표정 같기도 하고 욕을 볼 때의 표정 같기도 하다.)
그것을
조간은, 비통의 몸부림이라고 했고
석간은 몸부림치는 '이별'이라고 써 놓았다.
이 무지막지한 이스라엘 군인 놈들아
내 자식 내 남편 내놓아라.
이 갈갈이 찢어 죽일 아브람, 모세, 다윗, 솔로몬의 새끼들아
통곡의 벽 안쪽은 그 벽 밖의
통곡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외신은 울음의 전도체인가, 아닌가
[활엽수림에서]
1971년 : 4월 대통령 선거. 5월에 재수하러 상경. 광화문 뒷
골목에 진치고 날마다 탁구나 당구 치다.
1972년 : 대학 입학, 청량리 일대에서 하숙. 그해 여름, 어느
날, 혼자, 몰래, 588에서 동정을 털고 약먹다. 약값을 친구들한테 뜯
기도 하고 새 책을 팔기도 하다. 가을, 국회의사당 앞, 탱크가 진주
하고 학교 문 닫다. 새 헌법 선포되다. 추운 다다미방에서 겨울 내내
신음하다. 毒이 전신에 번지는 꿈에서 화다다닥 깨어나기도 하고, 가
끔 인천 방면으로 나가 서해 갯벌에서 高銀詩集 읽다.
1973년 : 동숭동 개나리꽃 소주병에 꽂고 우리의 緯度 위로
봄이 후딱 지나간 것을 추도하다. 가정교사 때려치우다.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다 여자를 만났다 헤어지고, 그때 홍표, 성복이, 석희, 도
연이, 정환이, 철이, 형준이, 성인이와 놀다. 그들과 함께, 스메타나
, '몰다우江' 쏟아지는 學林다방, 목계단에 오줌을 갈기거나, 지나가
는 버스 세워놓고 욕지거리, 감자먹이기 등 發狂을 한다. 發精期, 그
긴 여름이 가다.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고, 어디선가 사
람이 다가오는 듯, 예감의 공기를 인 마로니에, 은행나무 숲 위로 새
들이 먼저 아우성치며 파닥거리다. 그때 生을 어떤 사건, 어떤 우연,
어떤 소음에 떠맡기다. 그 활엽수 아래로 生이, 그 개 같은 生이, 최
루탄과 화염병이 강림하던 순간, 그 계절의 성 떠나다. 친구들 '아침
이슬' '애국가' 부르며 차에 올라타다. 황금빛 잎들이 마저 평지에
지다.
1974년 : 홍표, 권행이, 오걸이, 종구, 해찬이, 내가 부르는
이름들 끝에 10년 12년, 세월의 긴 꼬리표 달리다. 논산훈련소 저지
대에 엎드려, 황토에 얼굴 묻고 흐느끼다. 땅에 苦解聖事하다. 그리
고 따블백 하나와 군번 하나로 미지의 임지를 향해 北上하다. 한탄강
, 北緯 38度線, 야산, 트럭 뒤 먼지가 그리는 작전 도로, 공공 사단,
세모 연대, 네모 대대, 가위표 중대, 당구장표 소대, 말단 소총수되
다. 어린 소대장 구두 닦고, 탄약고 제초 작업, 비온 뒤 도로 보수
공사, 낫질 삽질, 임진강서 모래 채취, 담뿌차 타고 씀밧골서 흙파고
중대 뒷산 호박 구덩에 똥푸고, 쎄멘 공구리 등에 지고 군자산 방카
공사, 식기 닦고 빨래하고......살다. 그냥 비인칭 주어로 살다. 이
따금 서울서 여자가 면회오고 그녀가 준 돈으로 동두천서 지친 性器
와 잠을 자기도 한다. 미군 캠프 부근을 하릴없이 서성이다 흑인병사
에게 팔뚝으로 크게 말좆을 그려 보이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오후 늦
게 귀대하다. 녹색이 서서히 갈색으로 옮겨가는 군자산, 갈색이 다시
灰색으로 내려오는 山峽, 으로 몰려오는 첫눈, 맞으며 첫 휴가 나오
다.(아, 환속하다) "그 세상이, 먼저 우리를 건드렸어, 우리를." 우
리들 중에 한 사람이 말하다. "아냐, 세상을 저질러 버렸어, 우리가.
" 우리들 중의 또 한 사람이 말한다. 그날 영화 "빠삐용" 보고 말없
이 헤어진다. 生을 탕진한 죄, 아무도 말 못한다.
1975년 : 다시, 도연이 정환이 들어가다. 철이 석희한테 그런
편지 오다. 아직 '아무데도' 못 간 그들에게 면죄부 띄우다. "너희는
살아 남아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라." 8월 부친 사망, 관보 받다. 그
날 수첩에 '또 한 사람 荷役'이라고 쓰다. 그해 겨울 GOP 철책으로
들어가다. 저쪽의 가장 따뜻한 쪽을 맞댄 이쪽의 가장 추운 경계에서
겨울 지내다. 새벽 기슭에 서서 부은 눈으로 논 덮힌 산을 멍하게,
바라보다.
1976년 : 제대. 해군서 제대한 성복이와, 그해 가을, 신림동
서 술마시며 죽치다. '歸巢의 새' 쓰다.
1977년 : 다섯번째로 만난 여자와 결혼다. '무작정 살다.' 6
개월 후 이 표류에 한 사람 더 동승하다. 딸 낳다. 그때 도연이 출감
하다. 정환이, 해일이 출감하고 곧 동부전선으로 가다. '문학과지성'
겨울호에 성복이 '시인'으로 혼자 떨어져 나가고 석희, 군대에서 음
毒 자살 기도하다.
1978년 : "날 먼저 죽이고 나가라, 이놈아." 어머니 울면서
말리다. 親동생 끝내 광화문으로 나가다. 통대 99% 지지, 같은 사람
을 9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다. 홍표 나와서 콤퓨터 회사 취직하다. 출
판사에, 수입 오퍼상에, 섬유 수출업에, 하나씩 둘씩 들어가다. 더러
결혼도 하고 그런 때나 가끔 서로 얼굴 보다. 生, 지리멸렬해지다.
그 生의 먼 데서 여공들 해고되고 한 달에 한 번 대구로, 김해로, 동
생 면회가서 옷과 책 넣어 주다.
1979년 : 대통령 죽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멀리서, 모두,
한꺼번에 돌아오다.
[제1회 김수영 문학상]
그래도 이런 스캔들이라도 있어서 좋다
그래도, 아니, 스캔들이니까 더욱 좋다
그리고 이 스캔들은 그의 생애의 스캔들이다
박모와 이모들 까고 여편네 몰래 美女를 만나고 오입하고
남이 상 받으면 쫓아가서 깽판이나 놓고
남방셔츠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게 빤히 비쳐도
술값 한번 안 내었던
그의 잡음이,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간호원과 거즈나 접고
장당 이삼십원하는 번역을 하고
양계장을 하고 실패하고
직장 알아보러 아침에 나가면서 어머님께 인사하고
"얘야 넌 외국에 나가야 필 운이래드라"
그래서 마누라와 사우고
가족을 증오했던, 그의 도덕성, 반동성보다, 난 더 좋다
난 그게 더 좋다
요즘처럼 삼엄한 세상에
문학평론가이자 국립대학교 교수인 사람1과 문학평론가이자 국립대
학교 교수인 사람2가,
문학평론가이자 사립대학교 교수인 사람3과 시인이자 국립대학교
교수인 사람4.
그리고 유가족들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 그들을
한자리에 앉게 했다는 것, 그것도
그의 업보이지 잘못 아니다
그의 업적은, 그의 균열은
제1회 수상자 시인으로도 메꿀 수 있다.
없다가 아니다
그 균열이 넓어지도록
좀더 벌어지도록 무너지도록
그의 풀잎의 눕고 일어서는 계시록적 단순 동작이
보일 때까지, 그의 한없이 넓어지는 소음에
사다리를 떼는 일이리라
詩의 사다리를 떼는 일이리라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
드디어, 야구장 안으로 소주병이 날아 들어오고 난리다.
숫제 웃옷을 벗어 버린 두 청년은 114M 외야석에서 구장으로 뛰어
내린다.
라디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혀를 차면서, 중계하고 훈계하고 경고
한다.
"여기는 어디까지나 교육의 연장입니다. 학생 야구에 성인들이 저
런단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처삽니다. 스포츠 정신이란 게 뭡니까? 룰
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아닙니까? 네네, 그렇습니다. 경기는 일단 중
단했습니다만, 아 지금 경비원들이 외야 쪽으로 가고 있군요."
주심에게 항의하러, 외야 쪽에서 홈으로 달려들어온 한 휴가병은
전경 경비대에 그대로 안긴 채 들려 나간다.
관중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장내 방송 여자 아나운서가 싸나운 음성으로 계속 꾸짖어 대고 있
다.
"파울선에 내려와 있는 분들도 빨리 나가 주세요!"
다시 남자 목소리가 튀어 나온다.
'慶北高-光州一高, 숙명의 격돌'이라고, 정말 대문짝만하게 '미다
시'를 뽑은 '日刊스포츠'로 모자를 만들어 李선배와 나는 하나씩 머
리에 썼다.
李선배와 나는 안타 하나에 딱 한 잔씩만 하기로 한 소주를 공평하
게 다 마셔 버렸다.
"아마, 제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도 다 저런
사람들이었을 거야."
나는 李선배의, 싼뿌라찌를 해박은 송곳니에 햇빛이 반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웃고 있다.
나도 웃고 있다.
在京慶北高等學敎同門應援團 쪽은, "잘 가세요 잘 있어요"를 부르
며, 징을 치며, 북을 치며, 그쪽은 그쪽대로 난리다.
李선배는 그쪽으로도 박수를 보낸다.
무엇에든 집착하지 않는 그의 천성을 나는 매우 존경한다 : 그는
경쾌하고 경솔하다.
그런 그가 어느 해 봄날, 반호, 그의 아파트 앞 상가 켄터키 치킨
집에서 "우리 모두 가서 죽어버리자"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도 나는
그를 불신하진 않았다.
"광주일고는 져야 해! 그게 포에틱 자스티스야."
"POETIC JUSTICE요?"
"그래."
李선배는 나의 몰지각과 무식이 재밌다는 듯이 씩 웃는다.
그의 물기 젖은, 싼뿌라찌 가짜 이빨에 햇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3루에서 홈으로 生還하지 못한, 배번 18번 선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著*박종서譯*청사*188면*값 1,900원]
"어머니 오셨어요?"
"오냐, 잘 지냈니?"
"네."
(사이......말 없음)
"얘야, 내일이면, 네가 그 자리에 없겠구나."
[묵념 5분 27초]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 -KBS 2 TV*산유화(하오 9시 45분)]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
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
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
라 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
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
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
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모는 명섭
과 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
스러워......
어느 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
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
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친구 누나의 벌어진 가랭이
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
. 그래서 나는......
[다음 진술들 가운데 버르란트 러셀卿의 '확정적 기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낫 놓고 ㄱ도 모른다.
내가 꽃에게 다가가 '꽃'이라고 불러도 꽃이 되지 않았다. 플라스
틱 조화였다.
암버마제비는 교미 후 수컷의 목을 잘라 죽여 먹어 버린다.
지난 2월 31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중앙 아프리카 라콜카코 공화국
대통령 아카라카치 아카라카쵸쵸氏는 곱슬머리이거나 곱슬머리가 아
니다. 一年前 그는 육군 상사였다.
四季節 全天候 金星 韓國型 冷藏庫 안의 거대한 빙산이여, 환한 얼
음 속, 新生代의 魚族이 뜬눈으로 잠들어 있다.
모든 사건은 그 원인을 갖는다.
"유신체제 철폐하라!
박정희는 물러가라!
언론인은 반성하라!
구속학생 석방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敎門은 닫혀 있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부지이---이년아, 어쩔라고 날 버리고 가느냐, 이년아. 널 잃고
내가 눈 뜬들 무슨 소양이 있겄느냐, 못 간다 못가아---허이 조타아.
고로 피고에게 징역 8년과 자격 정지 8년을 선고한다.
형사 기동대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쏜살같이 질주하는 오늘 오전
11시 30분 용산 美8軍 본부 앞에서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ㄱ 놓고 낫도 몰라!
[벽 2 - 낯선 시간 속으로]
이 벽은 이인성 소설집, <낯선 시간 속으로>의 표지와 같다
이 벽은 신문이다, 보다시피
이 벽은 지방 일간지 7면 문화면이다, 보다시피
이 벽은 파스텔로 회칠한 벽이다
금이 가고
애매모호하다
냉담하고
덮어도 덮어도 다 덮여지지 않는 세속이다
이 벽 속에는 신문 소설, <인스탄트 러브>의 달라붙은 남녀의 삽화
가 있다
이 벽 속에는 부동산 광고가 있고
이 벽 속에는 에프킬라와 제주도 관광 안내문이 있다
돈 급히 쓰실 분
댄스 빨리 배우실 분
여종업원 금방 필요하신 분
독신녀 진실남 구하시는 분
뭐, 이런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벽 속에는 보다시피, 단식 투쟁한 舊정치인의 소문이 없다
보다시피, 원풍 毛紡의 후문도 미국인 쌀장사 이야기도 없다
그렇지만 이 벽은 금이 가 있다
아 그래, 금이 가 있다
금이 가고 가운데가 뻥 뚫리고
그 틈틈으로 푸른 하늘 흰 구름
아 그래, 시원한 바람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조간에는 피맺힌 절규… 통한의 유랑길이라 하고
석간에는,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고 씌어 있다.
제목도 아침 저녁 형형 색색으로 뽑아 놓았다.
나의 조국’ 합창하며 투쟁다짐.
PLO 떠나던 날 ‘우리는 조국 땅에 다시 온다’.
꺼지지 않은 채 흩어진 ‘불씨’,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총구마다 아라파트 초상화,
전 세계서 지하 투쟁’ 선언.
(아, 이 말이 모두 외신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베이루트 21일 AP 전송-연합]으로 받은 사진들.
i) 털이 덥수룩한 중년 사내가 군복차림으로 어린 딸과 작별한다.
ii) 미제 M16과 소련제 AK47 소총을 든 앳된 소년 전사와 백발의 전사가 레바논군 트럭에 실려 베이루트 항으로 향하고 있다.
iii) 한 팔레스타인 여인이 아라파트 머리를 움켜 안고 이마에 키스를 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하듯 고개를 숙이고 안겨 있다.
그 밑에 아라파트여 안녕이라고 씌어 있고
그리고
v) 이건 진짜 작품인데, 특종인데,
한 전사의 부인이 두 손으로
소총을 하늘 높이 쳐들고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다.
(출산할 때의 표정 같기도 하고 욕을 볼 때의 표정 같기도 하다.)
그것을
조간은, 비통의 몸부림이라고 했고
석간은 몸부림치는 ‘이별’이라고 써 놓았다.
이 무지막지한 이스라엘 군인 놈들아
내 자식 내 남편 내놓아라.
이 갈갈이 찢어 죽일 아브람, 모세, 다윗, 솔로몬의 새끼들아
통곡의 벽 안 쪽은 그 벽 밖의
통곡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외신은 울음의 전도체인가, 아닌가
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
─ 황지우
한낮의 베들레헴 거리에는 미제 최정예 공격용 아파치 헬리콥터가 떴다. 그리고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의 무장조직 파타의 지도자 후세인 아바얏의 자동차가 미사일 공격을 받고 허물어졌다. “우린 적들을 텅 빈 사막 한가운데서 만나기를 바랐지만, 이게 현실이다.” 이 미사일 공격으로 길가던 팔레스타인 여성 2명이 사망한 데 대해 이스라엘 중앙작전사령부 이츠하크 에이탄 소장은 “당신들이 본 것처럼 자동차에 대한 공격은 정확했다. 따라서 사과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전쟁에서 작전수행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지 민간인 몇의 희생은 별거 아니라는 투다.
볼썽사나운 무장들이 눈을 부라리고 하루종일 구급차의 격렬한 사이렌 소리가 귀를 때리고, 시민들은 그날그날의 사망자 숫자를 화제에 올리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 어디를 가나 마주치는 풍경이다. 두 달째 접어든 분쟁은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고, 헬리콥터를 동원한 중무장 이스라엘군은 돌팔매질로 항의하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에게 실탄 사격을 가해 이미 210여 명이 넘는 사망자와 4천여 명이 넘는 총상자를 냈다. 사망자의 25%가 14살 미만의 어린이들이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은 깊어지고 있다. “아라파트가 책임져야 한다. 동정심을 자극해서 국제 여론을 끌기 위한 선전행위다.” “어린이를 시위대 전면에 내세워 희생시키고 있다.”이스라엘 군인의 항변이다.
가자의 문타르 국경은 최악의 전선으로, 최다의 희생자들을 쏟아내고 있다. 라말라나 다른 도시지역의 시위는 적어도 건물 같은 대피처가 있지만, 문타르 국경은 어디에도 몸을 숨길 데가 없는 벌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 위에서 맨 몸의 아이들이 50∼100여 미터 떨어진 이스라엘 국경초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이스라엘군은 도로선상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있다. 총성 한 발이 울리면 어김없이 어린이 한 명이 쓰러지는 곳이 바로 문타르 국경이다.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실질적인 전쟁상태를 선언했다. “우린 이걸 전쟁이라 부른다. 당신들이 준전쟁이든 분쟁이든 무슨 말로 표현하든 말든.” 그리고 공격용 헬리콥터와 탱크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경찰서도, 군 간부의 집도 미사일 공격을 받아 파괴당했다. 심지어 라디오 방송사도.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경을 폐쇄했다. 이 국경 봉쇄로 이스라엘 영토를 지나야 하는 두 개의 분리된 팔레스타인 땅 서안과 가자 지구는 사회통합성이 완전히 마비돼 버렸다. 동시에 이스라엘과 연결된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특히 가자지구는 두 달간의 국경 봉쇄로 경제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다. “국경 봉쇄로 80%를 웃도는 가자지역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국경 봉쇄는 주변 아랍국의 인도적인 지원 물자마저 차단해버려 원조에 의존해 왔던 팔레스타인의 경제구조 자체를 마비시켜 버리고 있다.
바라크 전 총리의 말마따나 이것은 전쟁이다. 무차별 공습과 국경봉쇄, 그리고 시가전! 이것이 현재 중동평화협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평화협상이 아니라 휴전협상을 해야 될 상황이라는 판단이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상황은 팔레스타인측도 마찬가지다. 파타와 하마스를 비롯한 항쟁단체는 현 상황을 전면전의 전단계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이러다보니, 최근 가자지구에서는 그 동안 강경투쟁을 주도해 왔던 하마스에 대한 지지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아라파트 의장과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대해서 시민은 극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팔레스타인 독립의 아버지’에게 향한 존경은 더이상 찾아 볼 수 없다. 그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던 날 소총에 소중하게 붙여놓았던 그의 사진은 어떤 ‘전사’에게서도 이젠 발견되지 않는다.
가자는 전쟁중에 있다.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온건파를 대신해 양쪽의 강경파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게 상황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2. 도대체 상황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과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백악관 잔디밭에서 멋지게 악수를 나눈 뒤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끈기있게 자유와 독립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앞장서서 평화를 지원해 왔다. 1991년 마드리드평화회의가 시작되자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평화의 상징으로 올리브가지를 선물했다. 그러나 9년 동안 계속된 이스라엘의 공격과 통제는 이 평화의 몸짓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협상에 대한 신뢰감은 증발해 버렸고 항쟁만이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로 바뀌어 버렸다.
‘오슬로정신’은 죽었다
‘오슬로정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먼저 이것을 되짚어보아야 할 것 같다. 항상 중동평화 협상에 관한 일지에 단골로 등장하며 가장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1993년의 오슬로협정이다. 중동 평화협상의 시작은 오슬로협정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오슬로협정에 따라 향후 계속적인 세부 협상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 오슬로협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명제는 바로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는 원칙인데, 실상 오슬로협정의 원래 명칭은 바로 “Declation of Principles” 즉 ‘원칙의 선언’인 것이다. 이 오슬로협정은 노르웨이 외무장관 요한 홀스트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협상대표단이 비밀리에 오슬로에서 1개월 동안 협약안에 합의한 후 1993년 9월 13일 워싱턴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배석한 가운데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내 여리코 지역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 허용
(2)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팔레스타인 주민들만의 총선 실시
(3) 국경문제와 난민문제 및 예루살렘 귀속문제에 대한 계속적인 협상 실시
(4)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의 이스라엘군의 단계적 철수. 즉 1999년 5월까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측에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영토를 인도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오슬로협정이 완전히 이행되지는 못했다.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암살과 연이은 우파 리쿠르당의 집권, 네타냐후 총리의 강경정책은 오슬로협정의 원만한 진행에 걸림돌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와이리버협정이 1998년 10월에 체결되었고, 좌파 노동당의 바라크가 총리로 당선된 것은 중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중동평화 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와이리버협정 이행안을 다룬 이른바 와이II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에 따라 팔레스타인 죄수들이 석방되고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도 하였으며,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간의 통로가 개방되고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두 지역을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오슬로협정이야말로 양자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중대원칙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동분쟁의 당사자끼리의 첫 협약이었으며, 상호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데 있다. ‘땅보다는 평화’가 오슬로협정의 기본 배경이며 정신이기도 하다. 상호 공존과 상호 평화, 바로 이것이 오슬로협정의 상징인 것이다.
5년 동안의 과도 기간을 추인했던 오슬로협상은 7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이스라엘은 실질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개입으로 몇 차례의 후속 협정이 네탄야후 총리, 바라크 총리 아래 이루어지긴 했지만 협정내용은 항상 빈번한 충돌 앞에서 무력하게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이스라엘의 이전은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지연되고 있다. 수감된 이들은 석방되지 않았고, 북부지역의 안전한 통로는 결코 개방되지 않았으며 군사명령과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시민행정은 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직 오슬로정신의 패배를 의미하진 않았다. 험난한 진통이긴 하지만 결국 오슬로정신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데 희망을 걸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 시기 바라크 총리가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다는 불만이 이스라엘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기도 하였다. 즉 이스라엘측에서도 양보로 비추어지는 각종 조치가 진행된 것만은 사실이다.
사태를 악화시킨 초점, 즉 ‘오슬로정신’의 패퇴가 이루어졌던 핵심 사안은 회교도의 세 번째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에 대한 미래의 영구적인 지위를 협의한 캠프 데이비드 협상 과정이었다. 팔레스타인 협상대표 가운데 특히 공보장관 야세르 아베드 라보 같은 이는 정치적 분쟁이 종교적 사안으로 옮겨가는 위험한 폭발성을 한 달 전부터 경고했다. 사원의 지위에 대한 협의는 곧 사원이 위치한 동예루살렘의 지위에 관한 문제였고 이것은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심연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것은 정치 이전에 종교 문제였던 것이다.
3대 종교의 성지, 동예루살렘
동예루살렘의 구시가에는 성전산·통곡의 벽(유대교), 성묘교회·감람산(기독교), 바위돔·알 아크사사원(이슬람교) 등 세계 3대 종교의 성지가 몰려 있어 서로 이곳을 필사적으로 관할하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3천 년 전 다윗왕이 여부스족을 몰아내고 수도로 삼은 이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을 두 번이나 건설한 절대 성지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들은 2천 년 동안 세계를 유랑하면서도 파괴되어 버린 성전과 그 성전의 서쪽벽 잔재인 통곡의 벽에 대한 애착과 교육을 잊지 않았다. 유대인의 2천 년 전 마지막 번영과 이후 2천 년간의 유랑의 고통, 그리고 이스라엘의 건국, 그 모든 것이 동예루살렘으로 상징화되다시피 한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을 바탕으로 등장한 이슬람교의 경우 코란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알 아크사 사원이 코란에 나오는 ‘아득히 먼 사원’으로 인정받고 있고 마호메트도 초기 수십 개월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을 정도로 예루살렘에 대한 동경심이 컸다. 마호메트의 동경심은 그가 어느 날 밤 말을 타고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하여 바위돔 내의 바위를 밟고 하늘 여행을 했다는 전설까지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회교에서는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예루살렘을 3대 성지로 소중히 여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브리와 삿털리에서 팔레스타인의 피를 손에 적신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이자 매파의 총수격인 아리엘 샤론의 알 아크사 사원 방문은 이 성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영구적인 합법성을 기도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는 항의시위로 이어졌고 곧 야만스러운 이스라엘군과 마주치는 결과로 나타났다.그리고 그것은 샤론이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자 기대했던 결과 그대로였다. 이스라엘군은 이 봉기가 재빨리 시들기를 바랐으나 팔레스타인 시민의 급증하는 희생은 팔레스타인의 분노를 증폭시키며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유엔과 유럽연합 그리고 각 인권단체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군의 과도한 무력진압을 비난했으나,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변명 속에서 팔레스타인 언론사에 대한 공습과 시위대에 대한 야만적인 공격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상황은 점점 더 암담해져만 가고 있었다. 종교적 폭발성의 경고! 그것은 결국 오슬로정신의 소멸이었다. 그리고 다시─오슬로 정신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던─전쟁은 시작되었다.
평화회복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여전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권 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화를 가능케 했던 정권은 교체되었다. 팔레스타인측에서 보자면 평화협정의 당사자도 중재자도 바뀌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전임자의 ‘유지’를 받들 수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겠지만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는 예상만은 사실이다.
이스라엘 과격파의 승리?
총리 선거 과정에서 극우파인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후보─바로 사원 방문 사건의 장본인─가 좌파인 에후드 바라크 노동당 후보를 20% 가량 계속해서 앞서 나갔던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샤론의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샤론은 팔레스타인인이 성지로 여기는 예루살렘 회교사원(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성지로 여기는 신전언덕)을 방문함으로써 4백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낳은 문제의 강성 인물이다.
이변이 없는 한 샤론의 승리는 확실했다. 이변이란 이스라엘 유권자들이 납득할 만한 중동 평화협상안이 선거일 직전에 타결돼 표심을 극적으로 끌어당기는, 말 그대로 역전극을 가리킨다. 바라크 후보가 사퇴하고, 같은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 전 총리(현 지역협력장관)가 샤론 후보에 맞설 경우 이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러나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상황이 예정된 방향으로 흘러갔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리엘 샤론은 2.6선거에서 이긴다면 “지금까지 맺어진 어떤 평화협상도 인정하지 않고 국민투표에 붙여 민의를 물을 것”이라고 공언하여 왔다. 그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영토를 주고 평화를 얻는다는’ 이스라엘 온건파의 평화협상 과정을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이스라엘의 치욕’을 정상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샤론의 집권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것, 그리고 최근의 사태는 샤론의 공언이 단지 엄포의 수준만은 아니 였던 것이 분명해졌다.
또 다른 과격파의 등장?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비단 이스라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난 1월 20일 출범한 미국의 부시 정권은 지금껏 중동사태를 강 건너 불 보듯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퇴임 막바지까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에 매달렸던 클린턴 행정부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클린턴은 재임기간 중 중동평화협상에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1993년의 오슬로 회담 성사를 비롯한 성과물도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가시적인 공적이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적어도 부시는 이것을 계산에 넣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불투명한 중동평화협상에 시간을 내는 것이 비효율적이란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는 지금까지 클린턴 행정부가 중동 사태에 지나치게 개입해 왔다는 투로 평화적 해결노력에 비판적이었다.
협정의 파산
상황은 단순히 평화협정에 큰 걸림돌이 작용하고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중동 평화협정은 사실상 파산한 것과 다름 없다. 평화협정 과정이 향후 또 다른 ‘평화협정’에 교훈을 줄 수도 있고 협상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나 거기까지뿐이다. 오슬로협정을 거치고 노벨상 공동수상으로 국제적 칭송을 받았던 ‘영토와 평화의 행복한 거래’는 결국 계약 직전에 폐기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는 서로를 ‘사기꾼’이라 헐뜯고 있다. 계약 파기의 책임을 떠넘기는 데 사기꾼이란 낙인 만큼 효과적이고도 적절한 어휘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협정과정이 너무나 뜻밖의 상황일 정도로─그리고 그 만큼 짧았다─그들간의 전쟁은 항상적이었다.
3. 협정의 주역들은 어디에 있는가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웃 국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국제정치에 있어서 화해할 수 없는 가장 큰 위협으로 작용해 왔으며, 양측은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입혀왔다. 오슬로협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를 계속해서 이행해 나가기까지, 아라파트, 페레스, 라빈은 평화와 협력이 전쟁과 미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역사적 진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다. 역사의 무거움을 그들은 인간의 의지로 헤쳐나왔던 것이다. 그들의 인생 역정을 추적하면 중동평화의 어려움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배신자가 되어버린 현실주의자 아라파트
1988년 12월 13일, 유엔은 미국이 테러 관련 혐의를 들어 비자 발급을 거부한 한 인물의 연설을 듣기 위해 총회를 본부가 있는 뉴욕에서가 아니라 제네바에서 열어야만 했다. 유엔이 특정인의 연설을 경청하기 위해 총회 장소를 변경했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그는 테러집단이라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ranization, PLO)의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아라파트는 이 연설에서 테러의 포기와 이스라엘의 생존권 인정 등을 제시했다. 미국은 빗발치는 국제여론 속에서 이틀이 지나지 않아 해방기구와의 직접대화 재개를 발표해야만 했다. “나는 항상 권총과 올리브 가지를 함께 가지고 다닌다. 내 손에서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1974년 유엔 총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던 그가 드디어 총 대신 올리브 가지를 높이 치켜 든 것이다. 5년 뒤인 1993년 9월 13일 워싱턴의 백악관에서는 이스라엘인에게는 테러집단의 수장이었던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침략전쟁인 1968년 ‘6일전쟁의 `원흉’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팔레스타인 자치를 핵심으로 한 양 쪽의 평화협정이 조인된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지금 독립국가 건설을 눈앞에 두고 있고, 테러집단의 수장 아라파트 는 지난 14일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85년 폭격기를 동원해 73명을 숨지게 한 이스라엘의 튀니지 해방기구 본부 기습폭격을 비롯해 50여 차례의 암살위협 속에서 그의 신상과 생활은 철저히 가려져 있다. 1929년 8월 4일 아라파트는 카이로의 한 후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카이로대학에 진학한 그는 1952년 팔레스타인학생연맹 의장을 맡으며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이전’을 하지 않는다. 아라파트는 쿠웨이트로 건너가 `자유팔레스타인건설회사를 설립하고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30살쯤에는 거부가 되었다. 이는 그의 노선과 성향을 잘 말해 주는 대목이다. 그는 20세기의 그 어느 혁명전사보다도 이재에 밝았고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걸프전이 끝날 무렵 해방기구가 보유하고 있던 자산은 70억 달러에 육박했는데 아라파트는 이를 철저히 자신의 손에 쥐고 전 세계 금융가와 부동산에 투자해 한 해에 1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린다는 보도가 있었다. 당시 이런 보도는 아라파트가 이라크의 후세인을 지원해 중동 산유국으로부터 지원이 끊겨 자산이 20억 달러로 격감해 위기에 몰리자 중동 평화협상으로 일대 도박을 했다는 내용이다. 어쨌든 그가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등 안팎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주도권에서는 조금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철저한 현실적 기반에 기인한다.
쿠웨이트 시절 그는 대학 동창들과 『우리 팔레스타인』이라는 잡지를 내며 해방운동에 다시 나서기 시작했다. 1959년 그는 뒤에 해방기구의 주류가 된 ‘파타’라는 무장조직을 결성함으로써 평생의 정치적 기반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중추 조직을 마련했다. 파타는 뒤에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 투쟁에 앞서 청소년들의 교육 등에 힘써야 한다는 이른바 ‘온건파’와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광란파’로 나뉘게 된다. 아라파트는 이` ‘광란파’의 수장이었고 ‘`아시파’라는 무장특공대로 1961년부터 1967년까지 70여 회에 걸쳐 이스라엘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있었다.
파타의 노선 투쟁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67년 3월 아라파트는 450명의 아시파 무장전사들을 이끌고 요르단 서안 카라메에서 전차부대를 앞세워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 병력 1만 5천 명을 대파하는 신화적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아라파트를 일거에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로 끌어올려 이듬해 확대 개편해 출범하는 해방기구의 의장으로 취임하게 만든다.
그는 의장에 취임하자 “팔레스타인인이 유엔의 구호물자를 타기 위해 줄지어 있는 한 세계는 팔레스타인에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며 그때까지 난민대책에 치중하고 있던 해방기구를 무장투쟁 조직으로 혁신시켰다. 뒤에 그는 “우리가 총을 들자 세계는 우리에게 경외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설명한다. 중동분쟁과 관련한 테러에는 언제나 해방기구가 관여되어 있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학살 등은 전 세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환기시켰지만 해방기구를 가장 과격한 테러집단으로 인식시켰다.
1960년대 후반에 근거지를 요르단으로 옮긴 그는 무장투쟁과 함께 외교활 동도 펼쳐 사회주의권과 비동맹 나라들로부터 해방기구를 인정받으며 1974년에는 유엔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유일 합법조직으로 승인받는 외교적 승리도 거뒀다. 이런 과정에서 요르단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후세인 국왕은 그를 공격해 1970년 요르단 병사들과의 치열한 시가전 끝에 패한 아라파트는 레바논으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레바논에서 더 방대하고 영향력있는 조직을 일으켜 권좌에 복귀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그의 밑으로 몰려왔고 아랍의 정치인들은 그와 사진을 찍으려고 모여들었다. 카키색 군복과 흑백 두건, 엉덩이에 찬 권총이 그의 상징이 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때가 그의 1차 황금기였다.
그러나 1980년대는 그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제3세계운동은 침체했고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이에 놀란 시리아의 압력으로 아라파트는 레바논을 떠나 이스라엘의 암살특공대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천부적인 정치적 책략과 현실주의로 다시 일어선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 점령지 안의 팔레스타인 거주지에서 이스라엘군 트럭이 팔레스타인 승용차와 충돌해 4명의 팔레스타인 노동자가 숨지며 촉발된 팔레스타인인의 봉기인 ‘`인티파타’가 불붙자 그는 이를 화해노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아 국제여론을 팔레스타인쪽으로 잡아놓는 데 성공한다.
돌멩이와 화염병을 든 팔레스타인 소년과 전차를 앞세운 이스라엘 군인들의 대결로 텔레비전과 신문에 비친 인티파타는 세계의 여론을 어디로 이끌 것인가 자명했다. 아라파트는 여기서 화해노선에 도박을 건다. 1년 뒤 팔레스타인 의회격인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근거지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정치성명을 통과시켰다. 1992년 4월 7일 아라파트는 리비아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로 실종되어 미국은 인공위성을 동원해 그를 찾았다 . 아라파트는 하룻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했고 이 사건은 그가 어느 새 미국과 이스라엘이 가장 필요로 하는 평화의 협상자로 바뀌었음을 말해 주었다.
그의 성공비결은 팔레스타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꿰뚫어보는 직관력이다. 옳든 그르든 그는 팔레스타인인이 원하는 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의 팔레스타인이 세계의 무관심 속에서 숨죽여 지낼 때에는 총을 들었고 오랜 난민 캠프 생활에 지쳤을 때는 대화를 선택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베이루트에서 쫓겨날 때 아라파트는 “나의 조국 팔레스타인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치를 위해 가자로 돌아오기 위해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는 지금 조국으 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해 당시의 약속을 지켰다
그가 조국에 건국의 아버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현실주의 노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파트너가 있었을 때이다. 그를 협정의 주요 파트너로 인정했던 클린턴도 라빈도 지금 없다. 협정 체결 당시 테러리스트라 악수조차 하지 않았던 샤론─그리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수 차례 그를 암살하고자 기도했던─과 미국적 가치에 충실한─그리고 취임 축하로 이라크를 공습할 수 있는 담대함도 가진─부시가 있을 뿐이다.
지금, 그에겐 이 모든 것이 여의치 않다. 과격파가 압도하는 분위기에서 현실주의자는 언제든 배신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라빈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오슬로정신의 현신 라빈
제3차 중동전의 영웅,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모세 다얀(Moshe Dayan) 장군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시온주의자였던 그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사브라’ 유대인이었다.
사브라란 히브리 말로 선인장의 열매를 뜻한다. 겉에는 가시가 돋쳐 있어 접근하기 어렵지만 그 안에는 사막에서의 갈증을 풀어주는 달콤한 물이 있는 것처럼 외관상으로는 거칠어보이지만 막상 사귀고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라빈 총리는 사브라 유대인으로서 유럽에서 이주해 온 아쉬케나짐(Ashikenazim)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잘 해결하여 민족 형성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1947년 12월 1일에 시작된 이스라엘 독립 전쟁은 1948년 5월 14일의 유대인 독립 국가 선포로 이어진다. 450개 이상의 아랍 마을을 파괴, 약 73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남긴 독립 전쟁은 점령 지구를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시키자는 우파 연합과 평화를 조건으로 점령지를 돌려주자는 좌파 연합의 흐름을 만들어놓았다.
라빈 총리는 1987년에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 내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인 인티파타를 무력으로 진압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2년 총리로 재취임한 이후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적 고립을 깨닫고 인근 레반트(Levant, 특히 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집트를 말함) 국가와의 평화협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93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의 상호 승인을 이끌어냈다.
1994년 5월 4일에는 카이로협정, 뒤이어 1994년 7월 25일에는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협상(워싱턴 선언)이 맺어졌다. 이 선언에서 라빈과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평화 협상을 계속해 나가기로 합의하고, 양국간의 교전상태의 종식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의 회교 사원에 대한 요르단의 영향력 행사를 이스라엘이 인정하기로 했다. (요르단뿐만 아니라 아랍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예루살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바로 예루살렘을 회교 사원이 있는 그들의 성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같은 해 10월 26일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제2차 오슬로협정이 아라파트와 라빈에 의해 서명되었다. 이는 가자와 여리고에 국한되었던 자치의 범위를 요르단강 서안으로 확대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숨가쁜 진행이었고 그는 자신의 정책을 한시도 굽히지 않았다. 정착촌 동결, 죄수 석방, 군대 철수, 연이은 후속 정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찬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극단적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극우파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하부 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하마스(Hamas)나 시리아에 근거를 둔 지하드(Jihad)가 아라파트 PLO 의장의 지도권에 반기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빈 총리가 당수로 있던 노동당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해 왔다.
더욱이 보수 종교주의자와 연대한 극우파는 이스라엘 비밀경찰인 신 벳(Shin Bet)의 포위망을 뚫을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Yom Kippur War) 이후에 유대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정치적 우세를 유지해 오던 우파는 언제나 평화협상의 걸림돌이 되었다.
제2차 오슬로협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성경의 약속을 믿는 정통파 유대인에게 이 협정은 “성경이 말씀하는 이스라엘땅을 살인자들에게 내어주는 것”이었고, 라빈은 반역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오슬로협정은 61 대 59라는 근소한 차이로 국회를 통과했다.
계속적인 위협과 시위 속에서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군중 집회를 열었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했고, 그는 자신의 평화정책을 지지하는 지지자들과 함께 “ … 평화의 날을 기다리지만 말고 그 날을 향해 나아갑시다”라는 평화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사가 적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암살당했다.
라빈의 암살은 그 당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국제사회는 중동평화에 먹구름이 끼었다고 걱정했고, 이스라엘은 동족이 동족을 죽였다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라빈은 오슬로협정 후 백악관에서 “피와 눈물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는 유명한 기념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족들은 여전히 피와 눈물을 더 필요로 했던가 보다. 그 만큼 이스라엘은 분열되어 있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오슬로정신의 현신이 되었다. 평화의 제단에 바쳐진 순교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동족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그들의 동족은 또다시 오슬로정신에 방아쇠를 당겼다. 동족에 의해 그는 육체와 함께 정신마저도 사망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시몬 페레스
1950~1970년대의 이스라엘 국방정책을 입안했고 1984~1986년에는 이스라엘 총리를 지냈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34년에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키부츠에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47년 다비드 벤 구리온이 주도하던 유대인 방위기구인 하가나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벤 구리온은 그의 정치적 후원자가 되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총리에 취임한 벤 구리온은 당시 25세의 페레스를 이스라엘 해군의 총수로 앉혔다. 이 직위에서 2년간 일한 뒤 미국으로 유학하여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52년에는 국방부의 부국장으로 임명되어 국장, 국방차관을 지내면서 군비증강 계획을 실천에 옮겼고,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했으며, 해외 여러 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특히 프랑스와의 군사동맹이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이다.
1965년 현직에서 물러나 벤 구리온이 창당한 라피당에 몸담았다. 이 당은 벤 구리온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레비 에슈콜에 대항하기 위하여 벤 구리온이 창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피당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67년의 6일전쟁의 여파를 경험한 페레스는 마파이당(벤 구리온이 전에 창설한 당)과 보다 좌경적인 노동당인 아두트아보다당 등과 자신이 속한 라피당을 합당하여 이스라엘노동당을 만들었고 이 당의 부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974년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 내각의 국방장관직을 맡았다. 이 직위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의 자주국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스라엘 최초의 원자로 건설을 추진했다.
1977년 노동당의 당수가 되어 1977년과 1981년 두 차례에 걸쳐 총리직에 도전했으나 번번히 메나헴 베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984년 선거 결과,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총리로 취임했다. 1984년 9월 페레스와 리쿠드당의 당수인 이츠하크 샤미르는 권력분담 협정을 맺었다.
모두 50개월에 달하는 총리의 임기 첫 25개월은 페레스가 총리를 맡고 샤미르는 부총리 및 외무장관으로 근무하며, 나머지 25개월 동안은 역할을 바꾸어서 한다는 것이었다. 페레스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태세로 국정을 수행했으며 1985년에는 레바논을 침공한 문제 많은 이스라엘 병력을 철수시켰다. 1988년 구성된 노동당과 리쿠드당의 연립정부에서 재무장관직을 맡기도 했으며,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함에 따라 라빈 정부의 외무장관으로 입각했다.그리고 성공적으로 오슬로협정을 이끌어낸다. 그는 오슬로정신의 집행자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를 가져다줄 마지막 인물로 기대하고 있다. 네나탸후가 그랬던 것처럼 샤론이 국내외적 압력이 시달린다면 언제든 이스라엘의 대안으로서 페레스는 다시 각광받을 수 있다. 현실은 비록 그렇진 않지만 희망은 그러하다.
4. 과연 팔레스타인은 어떤 땅인가?
분쟁의 당사자들은 화해의 당사자가 되었다. 몇 차례에 걸쳐 지속된 중동전쟁과 잇단 테러, 수백만에 달하는 난민등 갖가지 난제들은 그들은 원칙과 의지를 가지고 헤쳐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현재 그들 앞에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서 있다. 그것을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다. 각각의 과격파 때문이 아니다. 그들을 움직이는 역사의식과 거기에 자리잡은 종교, 그리고 전쟁에 대한 기억이 그들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역사에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팔레스타인 지역은 어떤 땅이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평화와 공존을 가로막을 만큼 뿌리깊은 그들의 역사의식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오슬로협정을 거슬러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유태 VS 이슬람 VS 기독교
7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의 모슬렘은 그 세력을 페르시아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모슬렘제국을 확장시켜 나갔다.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은 팔레스타인을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는 티베리야를 수도로 하는 우르둔(Jund Urdunn)으로, 중앙과 남부는 람레를 수도로 하는 필라스틴(Jund Filastin)으로 구분되었다.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를 이어 모슬렘의 세 번째 성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적으로는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모슬렘 제국은 우마이야드(Umayyad, 661∼750), 아바시드(Abbasid, 750∼974), 파티미드(Fatimid, 975∼1171) 왕조가 통치하였으며 파티미드왕조의 정치적 문화적 분열은 이슬람제국의 몰락과 십자군의 진출로 이어졌다.
초기 모슬렘 시대에 팔레스타인 내의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모슬렘으로의 개종이 강요되었으며, 이러한 모슬렘이 20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슬렘의 정복 이전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의 대부분이 박해가 심해지자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나고 소수의 유대인만이 남게 되었다.
모슬렘의 통치하에 있는 성지를 해방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모슬렘과 유대인을 학살하고 팔레스타인을 기독교의 성지로 회복시켜 나갔다. 일부 유대인은 파티미드계 모슬렘과 함께 십자군에 대항하였으며 전쟁의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 거주지는 파괴되었다. 12세기 후반이 되자 유대인 거주지는 아코·가이사랴·아쉬켈론의 해안 도시에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항구가 있는 해안 도시는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적인 요인을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티베리야와 사페드에도 고립된 유대인 마을이 있었다. 십자군은 정치와 경제적 이권 때문에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순수한 목적이 퇴색되어 갔고, 이집트에 거점을 둔 모슬렘인 맘룩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여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인 악고를 손에 넣었다.
맘룩은 악고와 욥바, 그리고 다른 해안 도시를 파괴하였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국제적 무역로서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경제적으로 쇠퇴해 갔다. 예루살렘의 많은 지역도 황폐한 채로 남겨졌으며 1488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오바디야는 예루살렘의 4천 가구 중 유대인 70여 가구는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람레·나불루스(세겜)·가자는 이 시기에 비교적 번성한 도시였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문화권에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으나, 교육은 지속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교회는 파괴되고, 모슬렘 사원이 건설되었다. 15세기 악화된 경제 사정과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치안은 불안정했다.
오스만터키의 술탄 셀림1세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를 정복하여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되었다. 이미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비잔틴제국을 약화시키고 헝가리와 흑해 연안,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의 페르시아만 북부 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모슬렘제국을 건설했다. 팔레스타인은 행정적으로 예루살렘·가자·나불루스·사페드 등 4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터키제국으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사페드에는 카발라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이 이주하여 사페드는 유대신비주의의 본거지가 될 것이었다.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로 인구가 늘어났다. 16세기 예루살렘을 방문한 랍비는 그곳에 유대인 3백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7세기 샤브타이 쯔비에 의한 메시야 운동이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영향을 미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17세기 말 예루살렘 내의 유대인은 1,200명이었는데, 18세기가 되자 메시야 도래를 기다리는 천여 명의 새로운 이주자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당시 이들의 생활은 빈곤했고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보내주는 기부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증가하여 전체 인구 45만 명 중 유대인은 2만 4천 명이었고 과반수 이상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터키는 모슬렘의 대 제국이라는 자만심으로 유럽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에 자극을 받아 개혁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내부의 반란과 외세의 침입이 계속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중동의 질서에 끼여들자 터키는 흔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1917년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은 기독교국가인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대인의 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이 서서히 팔레스타인을 향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신화
세계 패권을 확고히 한 100년 전의 유럽에서는 인종우열론과 사회진화론을 사상적 바탕으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군국주의가 난무했다. 유럽 각지에 게토를 이뤄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실로 지독한 것이었다. 유럽 지배층의 상당 부분은, 유대인을 ‘열등인종’으로 완전히 배척하거나 ‘문화·종교적인 이질집단’으로 취급해 유럽 밖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유대인의 유럽 밖으로의 추방을 꿈꾸는 자들에게 일종의 ‘맞불작전’을 펼칠 기획이 세워진다.
“유대인의 빈민굴이 유럽 정부들을 위협하는 잠재적 혁명의 화약고라면, 차라리 유럽 밖의 땅을 택해서 그 황무지에서 정상적인 민족국가를 만들자!” 바로 이것이 『유대인 국가론』(1896)의 저자인 갑부 출신 헤르츨(1860∼1904)을 시조로 하는 시오니즘의 기본 아이디어였다. 헤르츨과 같은 초기 시오니스트에게는, 유대인의 유서깊은 고국인 팔레스타인이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영국령이었던 아프리카의 우간다나 남미 아르헨티나의 원주민 거주지대에서 유대족 국가를 만드는 것도 차선책이었다. 그들이 결국 터기령이었던 팔레스타인으로 선택을 굳힌 데에는 민족사에 대한 애착뿐만 아니라 근동에서 터키제국의 영향력을 약화하려는 당대 세계 패권국인 대영제국의 이해관계도 크게 작용했다. 적어도 시오니즘은 서구와 이해관계를 표면적으로나마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아랍계 부재 지주로부터 땅을 돈으로 사고, ‘원주민’의 ‘폭거’로부터의 보호를, 터키나 1923∼1948년 동안 팔레스타인을 신탁 통치했던 영국으로부터 받으면 된다는 그렇게 건국이 될 것이라는 너무나 손쉬운 기대였다.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포어가 발표한 선언문은 그런 손쉬운 기대에 대한 일종의 보증서와 같았다. 밸포어 선언의 핵심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미국내 유대인의 환심을 사 미국을 제1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한 이 선언은 결국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의 악몽은 기대를 현실로 만드는 원천이었다. 민족의 생존은 곧 건국으로 전환하였고 이를 위한 어떠한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는 ‘학살’되지 말아야 한다는 본능은 자신들을 학살자로 만드는 명분이 되었다.
4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온 유대인이 기나긴 이산의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기원전 100년께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부터다. 이때부터 19세기 말까지 2천 년 동안 이 지역은 아랍인의 차지가 됐다. 이스라엘을 건국한다는 것은 결국 지난 2천 년을 뛰어넘는 다는 것이고 팔레스타인땅에 스며든 아랍인의 2천 년간의 자취를 지워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랍인들이 영국의 지배와 유대인의 정착 과정에 맹렬한 반대투쟁을 벌여나가자 유대계 정착민의 극우파가 영국 식민주의자의 비호하에 ‘이르군’이라는 민병대를 조직해 아랍인 마을을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아랍인은 땅을 빼앗겨 인종차별을 받는 도시 최빈층으로 전락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어야 했다. 이것도 아니면 대부분 죽음이 선택되었다.
1948년 4월 9일 이르군과 스테른의 갱에 의해서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주민 전원이 살해된 ‘데이르 야신’이라는 팔레스타인의 한 마을 이름은, 유대계 극우파의 잔혹성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데이르 야신의 초토화 작전을 지휘한 이르군의 사령관 메니헴 베긴이 나중에 정치인으로 변신, 1977년 수상으로 당선되어 2∼3천 명 가량의 팔레스타인 망명자의 대량학살로 이어진 1982년 레바논 침공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팔레스타인인이 왜 그토록 이스라엘 정치인들을 불신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르군이라는 학살자 집단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우익당(리쿠드)은 물론이고, 서구에서 온건집단으로 분류되는 노동당의 고위 당직자 중에서도, 군 장교 경력과 참전 경험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레바논 침공 당시 군 첩보부를 이끌었던 바라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지배권은 유대인에게 넘어간다. 그렇게 모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졌던 유대국가의 건국신화가 3천 년만에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건국신화는 성서의 재현보다는 피학살과 학살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학살과 증오, 제국주의와의 밀약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은 1948년 1차 중동전쟁에서 1973년 4차 중동전쟁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충돌과 반목을 거듭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집트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요르단강서안을 점령하고, 중동평화협상의 최대 난제로 떠오른 동예루살렘마저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았다.
5. 건국신화의 재현
알 아크사 사원의 정치학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지난 달 말 이스라엘 리쿠드당의 아리엘 샤론 당수가 예루살렘 구시가 내 이슬람교 성전인 알 아크사 사원이 위치한 템플 마운트를 방문한 데서 비롯되었음은 앞에서 제기한 바 있다. 알 아크사 사원은 이슬람교도에게는 최고의 성소로 통하지만 일반 관광객들도 접근할 수 있다. 때문에 이스라엘인은 일반 관광객들이 다니는 곳에 이스라엘 정치인이 가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주장은 잘못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아랍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그리 간단히 해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은 알 아크사 사원 자리가 바로 솔로몬왕이 세운 유대교 성전이 있던 곳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교 성전은 로마군이 헐어버렸다. 유태인들은 현재 남아 있는 성전 주춧돌 중 일부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며 기도 장소로 사용한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통곡의 벽 앞에 서서 올려다보면 그들의 성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이슬람 성전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심으로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알 아크사 사원이 있는 템플 마운트에는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성소 터를 함부로 밟을 수 없어서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정계의 강경파 가운데에는 이 이슬람 성전을 허물고 유대교 신전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유대교의 지원을 받는 정당이나 극우파들이다. 그러니 이슬람교도에게는 극우파 정당 지도자인 샤론의 템플마운트 방문은 알 아크사 성전을 파괴하기 위한 사전답사로 해석되게 마련이다. 팔레스타인의 시위는 이런 위기의식을 바탕에 깔고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각자의 역사의식을 충분히 자극하도록 기획되었다. 그들은 샤론에 의해 공히 자극되었다. 지난 3천 년간의 역사는 성지의 이름으로 근대 이스라엘 건국 신화와 함께 핍박과 설움과 원한이 다시 불러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측과의 충돌이 발생하면 “물러서서는 안 되며 항상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그들의 군사력과 미국의 지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샤론에 대한 지지도는 충돌 사태 이후 50%가 넘는 수준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내 평화진영의 대표인 에후드 바라크 노동당 후보와 강경파의 대명사인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후보가 맞붙은 이스라엘 총리 선거는 샤론 후보의 압승으로 돌아갔다. 알 아크사 사원의 정치적 승리는 바로 샤론에게 있었던 것이다.
샤론의 승리
바라크 후보는 이번 선거를 ‘바라크냐 전쟁이냐’의 선택으로 규정하고 다시 국민의 신임을 받아 평화협상을 마무리지으려는 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샤론을 선택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바라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유권자들은 샤론을 선택했다.
바라크는 불과 20개월 전 ‘용감한 자의 평화’란 구호를 내세워 총선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그가 추진했던 팔레스타인·시리아와의 평화협상이 현실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인은 평화의 대가를 고통스러워 했다. 돌아갔다. 바라크 총리는 이전 지도자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양보하며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에 나섰으나 평화가 이룩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의 유혈분쟁까지 발생했다. 이스라엘인은 더욱이 군인 출신인 바라크가 팔레스타인의 폭력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데 대해 분노했을 만하다.
유혈사태 속에서마저 양보를 거듭하며 평화협상에 연연해 하는 듯한 바라크의 모습에 이스라엘 국민은 환멸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바라크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아랍계와 러시아계 유권자들마저 등을 돌림으로써 바라크는 참패를 면할 수 없었다.
샤론이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이 그를 지지했다기보다는 바라크와 그가 추진했던 평화정책을 거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분석가들은 샤론의 승리 원인을 “단지 그가 바라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샤론이, ‘평화를 내세운 바라크에 맞서 ‘안보’를 내세운 것도 압승을 거두는 데 주효한 것으로 꼽힌다. ‘미스터 안보’로 불리는 샤론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폭력과 테러리즘의 구조하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라크 총리가 양보를 거듭하던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1) 예루살렘 주권 고수 (2)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이외에 추가 영토양보 불가 (3)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불인정 (4) 모든 유대인 정착촌 유지 등의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스라엘의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샤론이 이런 강력하고 단호한 입장을 천명하자 국민은 박수를 보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난 총선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전총리의 강경책에 실망해 바라크의 평화노선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다시 샤론의 안보논리 지지로 선회한 것이다.
샤론에 의해 다시 건국의 신화가 재현될지, 더 두고 볼 일이 겠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은 건국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국지적인 평화협상과 지속적인 전쟁상황은 이제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지난 1948년 건국신화를 재현하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국제사회는 그들에게 동조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날 미치게 하는구나. 황지우 자료에 빠져 죽으란 소리구나. 이러면 나 하나도 못 읽고 숨막혀 죽는다네...살려줘...
간추려 읽거나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읽으시구랴. 췟!
누가 해줘. 요점정리....간추려 읽으려면 다 읽어야 뭐가 중요한지 알지. 잉잉잉. 핵심 노트 그런거 없수?
'에프킬라를 뿌리며'의 한 귀절이 생각나는군요. 파리 여러분! ...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아 쪼매만 기다리면 행인이 다이제스트 해서 노트정리 해서 줄라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