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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11회>
줄거리
궁예는 연화의 슬픔과 증오에 아랑곳 않고 평양을 도모하기 위해 떠났던 북벌군이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자, 직접 나가 그들을 맞는다. 그리고, 왕건에게 다시 나주전선으로 갈 것을 명하게 된다. 무진주 성에서 전투가 계속되자, 견훤도 대야성의 미련을 버리고 급히 회군한다. 한편, 왕건은 궁예에게 허락을 받아 연화의 사가로 조문을 가게 된다. 연화 또한 그날 밤 태자들과 함께 궁을 빠져나가게 되는데....
씬 왕건의 집 외경(밤)
장수장이 가병들과 함께 경계를 서고 있다.
씬 왕건의 집 사랑
왕건이 홀로 생각에 잠겨 있다. 태평과 왕신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까닭모를 한숨을 내어쉬는 왕건... 다시 보고 있던 책장을 몇 장 넘기는데, 유씨의 소리가 들려온다.
유씨 (E) 서방님, 소첩이옵니다.
왕건 오, 들어오시구료.
유씨와 수인이 함께 들어온다.
유씨 찻물이 다 식었을 것 같아, 바꾸어 왔사옵니다.
왕건 오, 그랬소이까?
유씨가 찻잔에 물을 다시 따라주는데, 눈치를 보던 수인이 말한다.
수인 서방님, 태평학사의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왕건 뭘 말이오?
유씨 황후마마 댁에 조문을 가신다 들었사옵니다만은...
왕건 그렇소이다. 왜요?
수인 세상에 많은 눈들이 지금 서방님께 쏠려 있사옵니다. 소첩의 생각도 그분들과 같사옵니다. 한 번 더 재고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왕건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일이오.
유씨 폐하께서 언잖아 하실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왕건 이미 죽은 사람들이오. 그리고, 옛정이 남아 있소이다. 부인들이 나설 일이 아니오. 내일 아침에 폐하를 뫼시고 북벌군을 마중 갔다가 저녁에는 그리로 갈 것이오. 그리들 아시오.
유씨 왜 어려운 일을 자초하시옵니까? 폐하께서...
왕건 어, 허, 이렇게 원... 폐하께서도 인정이 있으신 분이오. 문상 가는 일조차 나무라실 그런 분이 아니시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다 해도 도리를 저버려서는 아니되는 법입니다. 그 댁과는 돌아가신 아버님 대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소이다. 지금 잠시 외로워졌다 하여 돌아보지 않는다면 세상이 나를 비웃을 것이외다. 부인들께서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마시구료.
그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 소란이 인다. 왕건과 부인들이 그 밖에 귀를 기울이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장수장 (E) 아니, 진내관이 아니십니까?
씬 동 집 마당
열려진 문 밖에서 진내관이 들어선다. 주변의 눈치를 본다.
진내관 시중어른을 잠시 뵈러 왔소이다.
장수장 들어오시지요.
다시 대문이 닫히고, 이들은 왕건의 사랑 쪽으로 간다. 태평과 능산이 그런 진내관들을 보았다.
능산 황궁의 진내관이 아닙니까?
태평 그런 것 같습니다.
능산 이 밤 중에 무슨 일로..?
태평 그러게 말입니다.
씬 다시 동 왕건의 사랑
장수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수장 (E) 주군, 장수장이옵니다.
왕건 무슨 일인가?
장수장 (E) 황후전에 진내관이 왔사옵니다.
왕건 진내관이..? 들라하게. 부인들은 그만 가보시오.
두부인 예, 서방님.
진내관이 막 나가는 두 유씨에게 예를 올린다. 그리고, 왕건에게 예를 올리며 앉는다.
왕건 오랜만이구먼. 차 한 잔 들게나. (따라주며) 그래, 어쩐 일인가?
진내관 답답하고, 착잡한 일이 많아 결례를 무릅쓰고 시중어른을 찾아뵈었사옵니다.
왕건 그렇겠지. 진내관 자네는 평생 황후마마 댁을 지켜온 사람일세. 요즘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야.
진내관 이를 말이옵니까? (목이 메이며) 이 놈은 요즘 그저 죽고 싶은 생각 뿐이옵니다.
왕건 어허, 진내관 답지 않은 소리. 죽다니..? 그렇다면, 황후마마를 누가 보살펴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진내관 두 분 어른께서 돌아가시고 황후마마께서도 요즘은 마음의 평정을 잃으셨사옵니다. 전혀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마마의 모습이옵니다.
왕건 충분히 그러실 수가 있네.
진내관 하오나, 그 도가 너무도 지나치시옵니다. 그 분하고 아프신 마음을 어찌모르겠사옵니까만은.... 폐하께서 어떤 분이시옵니까? 무소불위의 대 미륵이시옵니다.
왕건 (한숨) 물론 그러하시지.
진내관 하온데, 그런 폐하께 달려가 고함을 지르시고 심한 말씀을 마구 쏟아내셨사옵니다.
왕건 (놀라며) 황후마마께서 말씀인가?
진내관 그러하옵니다, 시중어른. 소인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사옵니다. 폐하께서 강장자 어른을 죽이셨사옵니다. 황후마마인들 어찌 되실 지 누가 알겠사옵니까?
왕건 그래도 그렇지, 이사람아. 설마 황후마마까지...
진내관 그것은 아무도 모르옵니다. 한 번 화를 내시면 끝장을 보시는 폐하이시옵니다. 하온데, 황후마마께오서는 그 진노에 불을 지피시기 시작하셨사옵니다.
왕건 난감한 일일세.
진내관 폐하께오서는 처음에 대부인 마님의 부고를 들으시고, 쌀과 곡식을 후히 내려 장례를 잘 치르라 하셨다가... 황후마마의 역정을 보시고 나서는 그 모든 것을 거두어 버리셨사옵니다.
왕건 그런 일이 있었는가? 이런...
진내관 아무래도 일이 자꾸만 커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드옵니다. 소인놈은 평생을 강장자어른을 뫼시고 살아 왔사옵니다. 황궁으로 오기 전에는 그 댁의 집사장이 아니었사옵니까?
왕건 내가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진내관 이 놈의 목숨 따위는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이제 한 분 남으신 황후마마를 지켜드려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더불어 어리신 태자 마마 두 분은 어찌하옵니까? 이미 돌아가신 장자 어른께서 그 어리신 분들을 보위 운운하며 대역죄인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사옵니다.
왕건 그래도, 폐하의 아드님이실세. 별일이야 있겠는가?
진내관 장인을 눈하나 깜짝 안하고 죽이시는 폐하께서 아드님들이라하여 그러지 못할 일이 있겠사옵니까? 황후마마 또한 같은 처지가 아니된다고 누가 장담을 하겠사옵니까, 시중어른?
왕건 (한숨) 자네의 염려와 그 충정은 깊이 이해를 하네. 그럴수록 침착하고 대범하게 행동을 하게.
진내관 시중어른께서 황후마마를 뵙고 잘 설득하여 주시오소서. 또한, 기회가 닿으시면 황제폐하도 뵙고 두 분 사이를 원만히 좀 풀어 주시오소서. 그 일로 하여 이렇게 찾아뵈었사옵니다. 황후마마는 지금 예전의 모습이 전혀 아니시옵니다. 시중어른께서만이 황후마마를 도와주실 수 있사옵니다.
왕건 노력해 보세나. 그렇지 않아도 내일 저녁쯤에는 문상을 가려던 참이었네.
진내관 부탁드리옵니다. 황후마마께서도 그때쯤에는 사저에 납시어 계실 것이옵니다.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시중어른.
진내관은 그렇게 다시 절을 하며, 간곡히 말한다. 그 모습을 왕건이 한숨을 쉬며 보고 있다.
씬 황궁 대전(낮)
궁예가 내관, 상궁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법의와 금책을 쓰고 있다. 그리고, 막 주장자를 잡아드는데, 대전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려온다. 최응이 보고 있다.
대전내관 (E) 페하, 내전내관이옵니다.
궁예 무슨 일이냐? 들어오너라.
대전내관 (들어와) 황후전에서 여쭈라 하시옵니다.
궁예 뭘 말이냐? 황후전에서 뭘?
대전내관 황후마마께오서 궐 밖 사저에 다녀오시고자 청하시옵니다. 대부인마님의 빈소에 가시고자 하신다 하옵니다.
궁예 빈소에..?
그리고나서 궁예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 의관을 다 정제하자 그는 주장자를 두어번 때려 본다. 대전내관은 여전히 서 있다.
궁예 (최응에게) 왕시중은 어찌 되었느냐?
최응 아마도 지금 폐하를 뫼시고자 궁궐로 오고 계실 것이옵니다.
궁예 내원에도 알려주어야지. 함께 가자고 말이다.
최응 밖에서 이미 기다리고 계시는 것으로 아옵니다.
궁예 그래, 그럼 우리도 슬슬 가보자.
대전내관 폐하, 황후전의 청은 뭐라 하옵니까?
궁예 황후전.... (사이) 다녀 오라 하라. 어미가 상을 당했는데, 안보내 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가자, 최응아.
최응 예, 페하.
그들 그렇게 나간다.
씬 황궁 마당 일각
종간과 은부가 한 귀퉁이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주변에는 내군들이 궁예를 모실 차비로 분주해 보인다.
은부 황후마마께서 사저로 나가실 모양이옵니다.
종간 장례를 모시려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은부 허나, 죄인의 집안이옵니다. 그리 떳떳하게 행차하실 일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종간 허허, 사람하고는... 그래도, 인륜이라는 것은 그렇지가 않아. 또, 이번에 세상을 떠난 대부인은 죄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은부 세상인심이 걱정되옵니다. 어쨌든 폐하를 좋게 이야기할 사안들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종간 그럴 수도 있겠지. 좀 더 관망을 해보세나. 오, 저기 임장군이 오는 구먼.
임춘길이 부장 둘과 함께 오다가 허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과잉된 인사이다.
임춘길 아이고, 내원어른이 아니시옵니까?
종간 허허허, 어서 오시오, 임장군. 요즘 순군부는 잘 되어가오이까?
임춘길 내원어른께서 그토록 관심을 보여주시는데 되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저 늘 이 몸은 내원어른을 존경하오며 흠모하는 마음으로 사옵니다.
종간 허허, 무슨 말씀을...
은부 처음의 그런 마음을 변치 말고 사시구료. 허허허.
임춘길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소장은 자나깨나 내원어른의 깊고 크신 은혜를 촌각도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종간 고맙소이다. 앞으로도 여러가지로 잘 의논해 가며 사십시다.
임춘길 예, 내원어른.
그때, 왕건이 태평, 능산, 왕신들과 함께 오고 있다. 또, 한쪽에서는 박지윤 부자와 원극유, 박질 들이 들어온다.
왕건 벌써들 나와 계셨습니까?
종간 허허, 어서오시지요, 왕시중. 곧 폐하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은부 어서오시지요.
임춘길 ..........(계면쩍다, 딴청이다)
왕건 순군부의 임장군도 오셨구료.
임춘길 아, 예...
종간,은부 ..........(눈치를 본다)
왕건 오늘 아주 날씨가 좋아 보입니다.
박지윤 예, 정말 좋은 날씨올시다. 세상만사가 이렇게 오늘 날씨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어허, 저기 폐하께서 나오십니다.
모두들 정중하게 예로 맞는다.
궁예 모두들 와 계셨구료. 오, 왕시중은 언제 왔는가?
왕건 지금 막 도착했사옵니다.
궁예 오, 그런가? 궐밖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함께 가세. 자, 들 가십시다.
모두들 예, 폐하....
그들 그렇게 간다. 가면서 궁예가 말한다.
궁예 이보게, 왕시중.
왕건 예, 폐하.
궁예 이번에는 내가 일부러 마차를 타고 가자고 하였네. 황제가 말을 타고 다니면 너무 강해보여서 말일세. 자네도 함께 타세.
왕건 신이 어찌 폐하의 어차에 오르오리까? 사양하겠사옵니다.
궁예 내가 함께 가자고 청하는 것인데 뭘 그리 어려워하는가? 함께 가세. 도성문까지 가는 동안 얘기도 할 것이 좀 있고...
왕건 정히 그러하시면.... 영을 따르겠사옵니다.
그들 그렇게 간다.
씬 황궁 대문 밖
내군들이 황제의 출궁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과 함께 궁예는 마차에 오른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신료들이 부러운 듯 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종간, 은부의 표정들은 밝지가 않다.
궁예 (마차에 올라) 가자.
은부 폐하의 영이시다. 어차를 출행시켜라.
금대,장일 예..... 어차를 뫼시어라.
부장들 어차를 뫼시어라.
그렇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마필들이 뒤를 따른다. 문무신료들이 끝도 없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씬 철원 시가지
백성들이 연도에 엎드려 있다. 화려한 궁예의 마차가 지나치고 있다. 궁예는 끄떡인다. 그렇게 시가지를 본다.
씬 동 마차 안
궁예 이보게, 아우.
왕건 예, 폐하.
궁예 보게나. 이제 이 도성이 아주 번화해졌어.
왕건 다 폐하의 은덕이시옵니다.
궁예 나라를 어디 나 혼자 이끌어 가는 것인가? 신료들이 잘해주고 있는 것이겠지. 이번에 북벌군은 아주 큰 일을 했어. 큰 무리를 하지 않고 우리 태봉국의 깃발을 평양까지 꽂았단 말이야.
왕건 그 또한 폐하의 위엄이 크신 까닭이옵니다.
궁예 허허, 사람하고는... 그 일은 아우가 내게 권해준 것이야.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었던 아지태와는 달리 아우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알차게 이번 일을 추진했어.
왕건 망극하옵니다.
궁예 신라나 백제와 전쟁만 하지 않는다면 안심하고 북으로 북으로 시원스럽게 뻗어 갈 수가 있을 터인데... 그래, 역시 자네 말이 맞아. 북벌도 북벌이지만 일단 삼한을 먼저 통일하는 것이 시급해. 참, 내가 올라온 장계들을 보았는데 말이야. 나주가 다시 또 위험에 처해 있다는 구먼. 이미 백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던데...
왕건 신도 그리 보고를 받았사옵니다.
궁예 나주에 있는 장수들은 아무래도 아우가 빨리 와주어야 한다고 장계에 썼더구먼. 아우는 어찌 생각해?
왕건 그 어느 곳보다 중요한 곳이 나주이옵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신이 달려가 전선을 안정시켜놓겠사옵니다.
궁예 허지만, 자네는 이 나라의 시중이야. 황제 다음의 벼슬에 있는 자네가 전투마다 얼굴을 내어놓는다면 그 또한 우스울 수가 있어.
왕건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중요한 전선에는 시중이 아니라 폐하께서도 나가실 수가 있사옵니다. 백제의 견훤왕은 중요한 전투 때마다 스스로 앞을 서옵니다.
궁예 허긴, 듣고 보니 또 그렇구먼. 지금 견훤왕은 대야성 전투에서 별 소득도 없이 절절매고 있다는 구먼.
왕건 예, 신라 최후의 자존심이 바로 대야성이옵니다. 쉽게 도모하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궁예 허허허, 그 사람 참, 요 몇 년 계속 운이 없어. 백제가 말이야.
왕건 신이 생각해도 그런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잠재력이 아주 큰 나라이옵니다. 결국은 폐하와 더불어 자웅을 논하게 될 것으로 아옵니다만은...
궁예 그럴 수도 있지. 견훤이라는 사람은 그럴 수가 있어. 그래, 그 나주가 어렵다면 아우가 가는 것을 좀 고려해 보세나.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러니까, 자네는 사람들에게 자꾸 모함을 당하는 것이야. 질투도 받고 말이야. 당장 보게나. 그 나주가 자네가 없으면 아니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허접쓰레기 같은 소인배들은 자네를 헐뜯지 못해서 난리를 치는 게야. 어떻게든 자네를 딛고 일어서려는 것이지. 그러니, 더욱 처신에 조심을 하여야 돼.
왕건 깊이 새겨듣겠사옵니다, 폐하.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만은..
궁예 나에게? 말해 보게, 무엇이든지.
왕건 황후마마 댁은 신이 어렸던 시절부터 어른들끼리 참으로 가까운 처지였었사옵니다.
궁예 그 얘기는 들은 적이 있네.
왕건 주변에서는 신이 대부인의 문상에 가는 것을 걱정하기에 폐하께 말씀을 청하옵니다. 가서 조상을 해도 되겠사옵니까?
궁예 (생각한다, 말이 없다)......
왕건 폐하께서 혹시나 불편해하시면....
궁예 허허, 이 사람아, 내가 왜 불편해? 오히려 자네가 불편하겠지.
왕건 예?
궁예 불편하니까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고 오는 것은 자네 마음이야. 나는 관여치 않겠네.
왕건 황공하옵니다, 폐하. 하오면, 허락한 것으로 알겠사옵니다.
그러나, 궁예는 대답이 없다. 이후로 이들간의 대화는 없다. 마차는 그렇게 간다. 그 위로 함성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디졸브....
씬 도성 밖
성루에 궁예가 올라와 있다. 그 옆으로 왕건, 종간, 은부들이 서 있고, 최응, 박지윤 부자, 원극유, 박질, 왕신, 복지겸, 임춘길, 입전, 신방, 태평, 능산들이 대신들과 함께 서 있다. 그 아래로 총사 환선길과 부총사 유금필, 그리고 왕식렴, 홍유, 배현경, 김락, 이흔암, 염상, 천부장 들이 서 있다. 수천 군사들이 충을 외치며 기치창검을 들어 보이고 있다. 궁예가 손을 들어 이들에게 하례하고 있다. 그렇게 오랜 함성의 시간들이 지난다.
환선길 폐하, 총사 환선길은 폐하의 대명을 앞세워 장졸들을 이끌고 평양을 정벌하고 돌아왔나이다. 이에 삼가 고하나이다.
궁예 장하도다. 태봉의 군사들이여. 짐이 그토록 목청을 높여 외쳤던 북벌을 그대들이 비로소 그 첫발을 내딛어 주었도다. 태봉국의 깃발을 세워 놓고 온 그 평양이 어디인가? 바로 우리의 조상이며 선조들인 대 고구려의 황성이었다. 그곳을 얼마전까지도 저 무례한 당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짐의 군사들인 그대들이 다시 태봉의 깃발을 꽂았다. 장하도다. 참으로 감축하노라.
군사들 (모두들 군호를 외친다) 충, 충, 충.....
궁예 지금은 신라와 백제의 멸도들이 여러 곳에서 우리의 사정을 어지럽히기로 본격적인 북벌은 나서기가 어렵게 되어 있도다. 그러나, 처음이나 지금이나 나는 분명히 말하노라. 우리의 갈 길은 북벌이다. 그리고, 우리의 살 길 또한 북벌이다. 온 나라가 북으로 가지 않으면 더 이상 뻗어 나갈 길이 없다. 제장들은 이를 명심하라.
군사들 (계속 군호를 외친다) 충, 충, 충........
궁예 자랑스럽도다, 태봉의 군사들이여. 그대들이 있는 곳에 언제나 짐이 있을 것이다. 짐은 여전히 이 나라의 미륵이며, 그대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그리고, 온 백성을 약속한 천상의 세계로 이끌어 갈 부처이니라.
군사들이 충성을 다짐하는 군호가 계속해 뜨겁게 달아오른다. 궁예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군사들을 보고 있다. 흡족한 것이다. 종간과 은부도 흡족한 표정으로 끄떡이며 보고 있다. 그리고, 왕건과 대신들의 표정이 스쳐간다. 환선길이 답례하듯 군사들을 보며 선창한다.
환선길 황제폐하, 만세. 대 미륵부처님 만세. (계속) 만세, 만세, 만세....!!
군사들 (따라 한다) 만세, 만세, 만세......!!
종간, 은부, 신료들도 함께 모두 손을 높이 들며 만세를 부른다. 궁예는 계속해 흡족하다. 이번에는 임춘길이 나서며 다시 선창한다.
임춘길 대 미륵부처님 만세. 옴마니반메홈, 옴마니반메홈, 옴마니반메홈...!!
그러자, 신료들은 그 육자진언(옴마니반메홈을 말함)을 아니 따라 할 수 없게 되었다. 박지윤이 눈치를 보다가 먼저 따라 한다. 그리고, 종간, 은부에 이어 신료들이 모두 따라 한다. 군사들까지도... 장내는 모두 옴마니반메홈으로 계속해 들끊는다. 궁예는 끄떡인다. 도취되었다. (제발 소리 좀 웅장하고 크게 해주시오, 몇 명만 하지 말고...) 그 도취한 궁예의 표정에서 천천히 랩 디졸브....
씬 궁성 안 어느 전각
궁예가 베푸는 연회가 벌어 졌다. 북벌에 참가했던 장수들과 대신들이 모두 참가했다. 궁예는 중앙에 앉았고, 그 옆에 왕건과 종간, 그리고 환선길, 원극유 순으로 앉았다.
궁예 그래, 환장군, 평양은 좀 어떠하던가?
환선길 옛날의 영화는 간 곳이 없었고, 잡초만 무성했사옵니다.
궁예 저런, 쯧쯧... 그게 다 신라 저 멸도놈들 때문이야. 저놈들이 당나라의 군대를 빌려와 가지고 그 웅장하고 거대했던 고구려 제국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어. 멸도놈들 같으니라고...
모두들 .........
궁예 유금필 장군이 부총사로 갔었다 했는가?
유금필 예, 폐하.
궁예 그대는 이번에 가서 뭘 느꼈는가?
유금필 평양뿐만 아니라 그 위로 끝없이 넓은 땅들이 대부분 주인 없이 버려져 있었사옵니다. 하루 빨리 삼한의 대업을 이루시고, 북쪽으로 국력을 돌리심이 바람직하다 사료되옵니다.
궁예 옳은 말이야. 나는 이미 그것을 오래 전에 보았단 말이야. 오래 전에... 물론 죽은 아지태도 그걸 보았지. 문제는 몽상가들이 보는 것과 사실을 사실로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이야. 해내야지. 우리는 계속해 북으로 가야 해.
이흔암 그렇사옵니다. 폐하께오서 이곳 철원 황도로 오실 때부터 갖고 계신 그 꿈을 신들은 이제서야 좁은 눈으로 볼 수 있었사옵니다.
은부 모두들 폐하의 선견지명을 높이 우러러 받들고 있사옵니다. 신들이 그 점을 크게 보필하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임춘길 그러하옵니다, 폐하. 폐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큰 일이었는가가 드러나고 있사옵니다.
궁예 이제라도 그렇게 알아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아무튼, 고생들이 많았어. 오늘은 술과 고기를 넉넉히들 들게. 마음껏들 들어.
카메라는 궁예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면면을 잡는다. 그리고, 해설과 더불어 왕건의 표정에 머문다.
해설 북벌의 의지, 모든 정책은 그만큼 준비와 충분한 사전검토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궁예의 북벌을 계속해 다루는 것은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 하는 징후들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가 서기 901년 그가 고려를 세울 때에 첫 결심을 대외에 공표한 그 말이다. "지난 날 신라가 당나라에 요청하여 고구려를 깨버렸다. 평양 옛 도읍에 풀만 무성하니 내가 그 원수를 갚으리라" 라고 했었다. 그리고, 또 있다. 곧 정변을 일으키고 황제에 앉게 되는 왕건은 이 정책의 중요성을 크게 인정하고 즉위하던 바로 그 해에 평양을 대도호부로 정하면서 사촌 아우인 왕식렴을 파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년 후에 서경이라고 부르게 한다. 즉, 서쪽의 서울, 서쪽의 도읍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폐허나 다름없는 그곳에 주변 고을들인 황주, 해주, 봉주, 백주, 염주 등 여러 곳의 백성들을 사민, 즉 옮겨 살게 하여 성의 규모와 방비를 융성하게 하였던 것이다.
궁예 자, 북벌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그 나주 이야기 말일세.
왕건 예, 폐하.
궁예 오면서 생각해보았는데 왕시중도 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다시 나주로 좀 내려가게. 그곳은 역시 중요한 땅이야. 전열을 재정비하고 북벌에서 돌아온 장수들도 재배치하도록 하게.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자, 마시세. 거기 장수들도 모두 들라. 배현경 장군, 홍유 장군, 그리고 김락 장군도 들어야지.
그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 옆에 염상 장군도 들고, 왕식렴공이 아닌가? 들게.
그들 예, 폐하. 망극하옵니다.
궁예 들어, 모두들 드십시다. 모두 들어요. (마시면서) 왕시중은 아주 나주와 전생에 인연이 있는 모양이야. 잊을만 하면 다시 가고 또 잊을만 하면 가야 하는 일이 생기고...허허허, 아니 그런가, 아우?
왕건 그러게 말이옵니다, 폐하. 다행히 폐하께서 강건하실 때에 전선으로 내려가게 되어 마음이 가볍사옵니다. 가서 백제군의 오만을 뿌리 뽑겠사옵니다.
궁예 그렇게 하게. 아우만 가면 어느 전선이든 다 조용해지지 않았는가? 가서 아우의 이름과 더불어 태봉국의 위엄을 확실하게 알려주게나. 허허허허..
왕건 예, 폐하. 반드시 그리 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궁예 즐거운 날이로다. 태봉국의 미래는 밝다. 누가 감히 짐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제장들과 문무신료들은 그런 긍지를 잃지
말도록 하라.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런 궁예의 표정에서, 다시 왕건에게 이어지면서 디졸브...
씬 무진주 성 외경 벌판
다련군과 오씨가 김언, 윤신달, 전이갑 들과 함께 적진을 살펴보고 있다. 멀리 무진주 성이 보이고 있다.
다련군 오늘은 전투가 없는 모양이올시다.
김언 의외로 몇 번 찔러 보았사온데, 무진주 성은 아주 견고하다는 것이 재차 확인되었사옵니다.
윤신달 전면전을 벌리자면 못할 것도 없사옵니다만은.... 왕시중께서 황도로 가시면서 절대로 명령 없이는 큰 전투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가신 것 때문에 이러고 있사옵니다.
전이갑 생각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공격을 하고 성을 넘고 싶사옵니다만은...의외로 전투가 너무 커질까 염려가 되어서 말이옵니다.
오씨 어쨌든 양쪽이 서로 두어 번 부딪쳐 보았다고 했사옵니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사옵니까? 서방님께서 오시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옵니다. 세번째 전령이 황도에 갔으니 지금쯤은 무슨 일이 결정되어도 되었을 것이옵니다. 잠시 더 이렇게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아버님.
다련군 내 생각도 그렇다. 김장군은 어찌 생각하시오?
김언 우리가 노리는 목적은 이미 다 달성했사옵니다. 갑갑한 것은 지금이라도 빨리 저 성을 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아니된다는 것이옵니다. 허허허.
그들 그렇게 성쪽을 본다.
씬 동 성 안
지훤이 부장들과 더불어 멀리 포진하고 있는 태봉군을 보고 있다. 그는 여전히 뭔가가 의심스럽다.
지훤 저들이 다시 또 저렇게 전투를 중단하고 우리를 보고 있어. 참 알 수가 없는 일이야. 도대체 무얼 노리는 것이란 말인가?
부장1 적극적으로 전투를 하려는 의지가 없사옵니다. 뭔가 심리전을 펴려는 것 같사옵니다.
지훤 그러게 말일세.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야. 조금 공격하다가 말고 또 그러다가 말고, 이게 벌써 며칠 째인가?
부장1 차라리 저희가 성문을 열고 나가서 정세를 한 번 알아보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지훤 아니야. 성문을 열 필요가 없네. 저들이 싸우려 하지 않는데, 우리가 무엇 하러 나가는가? 그저 문을 닫고 이대로 있으면 되는 게야. 우리에게는 지금 잘못될 경우 도와줄 지원군이 없네. 모두들 대야성에 가 있기 때문이야.
부장1 하긴 그곳에 전령을 보냈으니 지금쯤 폐하께서도 이 쪽의 사정을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지훤 그곳은 대체 어찌 되었을꼬..? 대야성은 소문난 천혜의 요새야. 아직까지 이렇다할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폐하께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것 같네.
부장1 그럴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지훤 우리라도 이곳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어 주는 것이 오히려 폐하께 힘이 될 수가 있네. 사태를 좀 더 두고 관망해 보세나.
부장1 예, 성주님.
씬 대야성 밖 벌판(견훤의 군영)
견훤 (E)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금성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져?
씬 동 군막 안
제장들이 모두 모여 있다. 전령이 서 있고, 견훤이 탁자를 치며 전령을 본다.
견훤 (다시 장계 보다가) 금성의 태봉군이 강을 건너와 지금 무진주까지 와 있단 말이야? 무진주까지...?
전령 예, 폐하.
최승우 그것은 뭔가 이상한 것 같사옵니다. 태봉군은 금성의 자체방어도 힘이 겹사옵니다. 일찍이 말씀 올린 것처럼 저들이 무진주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저들 스스로 화를 부르는 일이 되옵니다.
신덕 혹시 뭔가 다른 전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옵니까?
최승우 그럴 리가 없소이다. 전략은 뻔합니다. 저들은 금성 주변의 지형을 이용하고 바다를 배수진 삼아 버티고 있소이다. 절대로 넓은 곳으로 나와 전쟁을 할 입장은 아니올시다.
능애 허나, 장계에는 적군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공직 무진주 성의 지훤장군은 노련한 장수이옵니다. 좀 더 두고 보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견훤 두고 본다..? 두고 본다..
김총 허나, 태봉군이 공연히 무진주 성까지 올 리가 없사옵니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최필 폐하, 이미 우리 군은 이곳 대야성 하나를 도모하기도 힘에 겹사옵니다. 무진주 성을 생각할 겨를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애술 그러하옵니다. 일단 대야성을 도모하고 나서 그 일을 논의하시오소서. 우리는 일차 공격 이후 지금까지 이렇다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다시 영을 내려주시오소서, 폐하. 이번에는 신이 선봉을 서보겠사옵니다.
그러나, 견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쉰다.
견훤 우리가 대야성을 너무 가볍게 보았어. 누가 선봉을 서는 것이 문제가 아니야. 성이 너무 견고해. 아니, 성이 아니라 저들의 결의가 소름끼치도록 너무 단단해.
모두들 ........
견훤 이러니 열번 백번 성을 노리고 들어간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최승우 모든 것이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아무래도, 전략의 분석이 미흡했던 것 같사옵니다. 신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옵니다. 신라군의 결전 의지가 참으로 놀랍고도 무섭사옵니다.
견훤 내가 너무 서둘렀어. 이번에도 내가 또 너무 급했어. 신라는 아직도 단단해. 썩어서 휘청거리면서도 주저앉기까지는 그 뼈대가 너무도 강해. 많은 정탐꾼들과 첩자들이 대야성에 견고함을 일찍부터 전해주었어. 우리가 그것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야.
능애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다시 영을 내리시오소서. 반드시 함락할 수 있사옵니다.
견훤 아니야. (사이, 도리질) 애꿎은 추허조의 목숨만 이곳에서 잃고 말았어. 내가 경솔했어. 대야성은 지금으로써는 무리야.
애술 아니옵니다, 폐하. 다시 영을 주시오소서. 신이 반드시 해보이겠사옵니다, 폐하.
신덕 통촉하시오소서, 폐하. 이대로 물러가서는 아니되옵니다. 신에게도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시오소서. 이대로 갈 수는 없사옵니다.
최승우 ....... (한숨만)
견훤 질러 갈 때는 빨리 가야하고, 돌아갈 때는 여유를 가져야 해. 지금은 돌아서 가야 할 때야. 내일을 기약할 필요가 있어. 나도 분하고 억울해.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허나, 때가 아니야. 이미 그게 훤히 보이는데 어찌 계속 싸우자고 할 것인가?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회군을 하세. 더 이상 희생을 낼 필요가 없어. 그러나, 내가 반드시 약속하네. 나는 이곳으로 또 다시 올 것이야. 반드시 와서 저 성을 함락시키고 말 것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렇게 결의에 찬 견훤의 표정에서...
씬 인서트/ 길
백제군이 회군하여 돌아가고 있다. 모두의 표정이 침울하다. 그 위로 해설....
해설 백제군의 대야성 공격, 견훤의 나이 오십이 되어 두번째로 시도한 이 공격은 역시 또 실패로 돌아갔다. 대야성은 그만큼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과 연결되어 있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훤의 욕심은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했으니 사년 후인 서기 920년 그의 나이 쉬흔 네살에 끝내 숙원이었던 이 대야성을 손에 넣게 된다.
씬 철원 황궁(밤)
궁궐의 작은 출입문이 열리면서 황후와 태자 일행이 빠져 나온다. 연화, 제조, 슬이, 진내관이 상궁들 몇몇과 함께 그렇게 가고 있다. 그들 속에는 은부가 보낸 첩자 상궁도 끼어 있다.
진내관 자, 들 서두르게. 서둘러.
멀어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장일이 보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외로 꼰다. 그 모습에서...
씬 동 대전
궁예가 경전을 읽다가 최응을 본다.
궁예 황후가 사가로 갔다?
최응 예, 폐하. 방금 전에 그런 연통이 왔사옵니다. 두 분 태자 마마도 함께 가셨다 하옵니다.
궁예 그래, 그래.... 사람이 죽었으면 초상도 치루어야 하고 부모가 죽었으니 자식이 가봐야 하는 것이고... 그렇겠지.
최응 폐하..?
궁예 왜?
최응 아무래도 신이 생각하옵기로는 폐하께오서 그래도 인정을 내리시어 조문을 하시는 것이 어떨가 싶사옵니다.
궁예 내가 조문을 가? 내가 말이야? 내가 왜..?
최응 이 나라의 국모님이시고, 황후마마이시옵니다. 폐하께서 아니가보신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사료되옵니다.
궁예 뭐가 예의에 어긋나? 뭐가, 왜? 황후는 내가 베풀려고 했던 인정을 받지 않았어. 황후로써의 체통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야. 나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너도 보았지 않느냐?
최응 하오나...
궁예 그 사람은 모든 걸 부정했다. 내가 황제라는 것도 부정을 했고, 내가 미륵이라는 것도 부정을 하였어. 지금이라도 죄를 묻자면 마땅히 참형감이 아니냐? 목을 베어야할 죄란 말이다. 쇠방망이로 머리가 으스러져야할 그런 죄란 말이다.
최응 폐하께서는 만백성의 어버이시고, 황후마마께오서는 국모님이시옵니다. 살펴 헤아리시고, 용서하시오소서.
궁예 용서고 뭐고 말할 것 자체가 안되느니라. 아비가 죄를 짓고 죽었으면 자숙하는 것이 자식의 본분이니라. 헌데,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어. 그 사람은 황후의 자질이 없었느니라. 처음부터 말이다. 처음부터....
최응 백성들은 두 분께오서 어찌 사시는 가를 보고 자신의 본을 삼사옵니다. 너그러히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그리고, 한 번 더 은혜를 베푸시어 조문을 가시도록 함이 옳을 것으로 아옵니다. 사사로이는 장모님이 아니시옵니까, 폐하?
궁예 오늘따라 최응이가 아주 옳은 말만 골라 하는 구나. 그러나, 짐은 곧 법이 아니냐. 법을 부정하면 장모 사위 관계도 없어지는 것이야. 왕건아우가 조문을 간다 하였으니 나야 간들 어떻고 아니 간들 또 어떻겠느냐? 그만 되었다.
최응 ........
씬 왕건의 집 안채 방
두 여인이 걱정스럽게 서로를 보고 있다.
수인 서방님께서 그예 황후마마 사가로 출행을 하셨다 하옵니다.
유씨 어찌하겠는가? 워낙 의지가 굳으시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서방님께서는 겉으로는 유하시지만 한 번 생각을 굳히시면 그것으로 끝이실세.
수인 혹 나중에 별 탈은 없을런지요? 그렇지 않아도 황후마마와 서방님 사이를 탐탁지 않게 보시는 폐하이시옵니다.
유씨 그러게 말일세. 그것 또한 모르시지 않는 서방님이실세. 참으로 불안하구먼.
씬 왕건의 집 사랑
유금필, 능산, 태평, 왕식렴, 왕신이 모여 있다.
능산 그것 참... 굳이 그렇게 아니 가셔도 될 일을 고집하신 것 같습니다.
유금필 (한숨 지으며) 자네는 몰라. 주군께서는 그러실만한 이유가 있으시네. 그만큼 각별한 두 가문이었네 그려.
왕식렴 물론 그렇습니다.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안이 워낙 묘한 때라서 말입니다.
태평 그래도 다행인 것은 폐하께서 주군의 청을 받아들여 나주로 가시게 한 것이옵니다. 일단 황도를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옵니다.
왕신 그렇겠지요. 어려운 때에 빠져나갈 길이 보인다는 것은 다행이고 말고요.
태평 나주에 계신 둘째 마님께서 적절한 때에 아주 큰 일을 해주셨사옵니다. 정말 다행이옵니다. 나주로 가시는 것은 말이옵니다.
씬 철원 저가 거리
장수장과 가병들이 왕건을 모셔가고 있다. 얼마만큼 가다가 왕건이 말한다.
왕건 이보게, 장수장.
장수장 예, 주군.
왕건 자네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황후마마 댁과 우리 집 사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일세. 세월 참 무상하지 않는가?
장수장 소인이 뭘 알겠사옵니까, 주군?
왕건 인생 백년이 잠깐이라고 하였는데, 어찌 이리도 사는 것이 복잡하고 힘이 든단 말인가? 그 어른들이 그렇게 참담하게 가실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도, 뒤늦게 세상 영화를 다 누리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어.
왕건들은 그렇게 가고 있다.
씬 강장자 집 외경
밤바람에 조등만 썰렁하게 흔들리고 있다.
씬 동 집 마당
궁에서 나온 내관들과 상궁 둘이 서 있다. 그 중 첩자 상궁의 표정이 평범한 듯 하면서도 예리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다. 물론 아무도 알아 볼 수는 없다. 역시 손님이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씬 그 상청
연화가 두 태자와 양자와 함께 앉아 있다.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표독해 보인다. 뒤로 제조와 진내관, 슬이가 서 있다.
연화 동생이 마음의 고통이 많았겠네.
양자 아니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아버님께서 이 가문을 크게 일으켜 보시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지. 그러나, 본래 권력이라는 것은 그 바탕에 있는 사람에게만 쥐어지는 것이야. 아버님께서는 그것이 없으셨네.
양자 ........
연화 황후의 집안이라고 양자를 올 때에는 얼마나 포부가 컸겠는가? 일이 이리 되고 보니 자네가 안돼 보이는 구먼.
양자 아니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다 쓰러지고 폐가가 된 집안에 문을 닫으러 온 꼴이 되었네 그려. 그러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양자 ......... 그렇지 않사옵니다.
연화 (돌아보며) 무정한 인심들일세. 평소에 우리 부모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고.... 지금은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네 그려.
진내관 (눈치를 보다가) 왕건시중께오서 꼭 오신다 하셨사옵니다, 황후마마.
연화 그 분이 왜 이곳에 오시겠는가? 아버님과 나로 인하여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해 있는데...
진내관 꼭 오실 것이옵니다. 시중어른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옵니다.
연화 세월이 원망스럽구나. 세월이 원망스러워.... 어찌하다 내 처지가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고... 내 신세가 왜 이리 되었을꼬...
연화는 그예 눈물을 찍는다. 두 태자가 보다가 울먹이며 위로한다.
두태자 어마마마, 고정하시오소서.
연화 이제 태자들뿐이오. 오로지 우리 태자들 뿐이야.
그때, 문 밖이 소란해지며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모두들 그쪽을 본다. 소리가 들려온다.
장수장 (E) 왕건시중께서 조문을 오셨사옵니다.
진내관 (반갑다) 오셨사옵니다. 왕시중께서 오셨사옵니다, 황후마마. 오셨사옵니다.
연화 .......?
진내관이 급히 마당으로 내려 선다. 연화는 여전히 그렇게 본다.
씬 동 집 마당
왕건일행들이 들어선다. 진내관이 급히 맞고, 상궁들이 허리를 숙인다.
진내관 어서 오시오소서.
왕건 상주는 어디 계시는가?
진내관 저기...
왕건은 비로소 연화와 태자들 그리고 양자를 본다. 예를 올린다.
왕건 황후마마께오서 오셨사옵니까?
연화 예, 참으로 어려운 길을 오셨습니다, 왕시중.
왕건 예, 황후마마.
왕건은 분양을 하고, 두 번 절을 올린 후 다시 상주와 맞절을 한다.
왕건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양자 그저 참담할 뿐이옵니다.
왕건은 그렇게 상주와 인사를 끝내고, 다시 연화에게 절을 올린다.
왕건 황후마마, 예를 받으시오소서.
연화 여기서 무슨 예를 찾는다 하십니까, 왕시중?
왕건 받으시오소서. 태자마마님들도 함께 받으시오소서.
왕건은 절을 하고, 비로소 바로 앉는다. 연화가 무겁게 입을 연다.
연화 독사 같은 눈들이 사방에서 이 집을 보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길을 어찌 오셨습니까, 왕시중?
왕건 오랜 이웃으로써 문상을 오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옵니다.
연화 나중에 폐하께 들으실 꾸지람은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왕건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일이옵니다.
연화 알고 있다고요? 폐하께서 말씀입니까? 하긴, 폐하는 관심법을 쓰십니다. 훤히 다 보고 계시겠지요.
진내관이 눈치를 보다가 아니되겠다 싶던지 조그맣게 말한다.
진내관 이곳은 상청이옵니다, 황후마마. 상주께서 자리를 지키고 계시니 잠시 사랑으로 드심이 어떠하옵니까? 문상을 오셨으니 요기도 하셔야 할 것이옵고...
연화 그렇게 해주게.
진내관 요기하실 것을 준비하게.
상궁 하나가 대답하며 사라진다. 연화가 일어나며 다시 말한다.
연화 소식 들었습니다. 나주로 가신다하셨습니까?
왕건 예, 황후마마.
연화 아주 적절할 때에 정말 운이 좋게 도망을 가십니다, 왕시중.
왕건 황후마마...?
연화 그렇지 않습니까? 호되게 한 번 당하시더니 그게 무서워서 그렇게 급하게 줄행랑을 놓으시는 것입니까, 왕시중?
왕건 마마...?
연화 .........?
표독한 연화의 표정에서....
< 111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