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말씀
인간의 역사를 보면 종교와 정치는 밀접하면서도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정치와 종교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냐는 질문은, 정치와 종교 사이의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만 했던 처지에서 하느님만을 자기들의 참된 임금으로 여기던 유다인들은 양심에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 이 질문을 던진 이들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중시하고 로마인들을 적대하였습니다. 헤로데 당원은 헤로데 집안의 통치를 지지하고 로마에 호의를 보였습니다. 지나치게 종교적·정치적이었던 두 집단의 질문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가 임금이 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시대의 이스라엘 임금은 바로 기름부음받은이(마시아, jy뛪; 크리스토스, Cristov?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키루스에게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세 가지 말씀을 두 번씩 하십니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즉 키루스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여 당신이 주님이며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점은 신약에 와서 도약합니다.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키루스와 달리 그 누구보다 아버지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시며(요한 17,25 참조), 당신 친히 주님으로서 다른 이가 없다고 밝히십니다(요한 13,13.19 참조).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요한 18,36-37)기에,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이 구분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1테살 1,2-3).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하느님의 것은 바로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입니다.
묵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돈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니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면,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돈은 황제에게 돌아갈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인격은 하느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로마 14,8)입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
알아봅시다
1. 관면혼인
혼인성사(婚姻聖事)는 남편과 아내의 유일하고 영원한 관계를 성화(聖化)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설정한 일곱 성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혼인을 불법 또는 무효로 하는 일체의 사정 즉 혼인장애(婚姻障碍)가 발생할 경우가 있는데, 이때 혼인장애의 원인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관면(寬免)을 받을 수 있다.
신앙은 혼인보다 더 중요하므로 교회는 가능한 한 신앙인끼리 혼인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지만, 배우자가 개신교나 타 종파 신자(혼종혼, 混宗婚)인 경우에는 조건을 갖추고 서약을 하면 혼인성사의 허락(관면혼인, 寬免婚姻)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서약의 내용은 신자인 경우에는 혼인하여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것과 자녀를 신앙의 정신으로 교육할 것을 서약하고, 비신자인 경우는 신자인 배우자의 서약을 인지하고 신앙을 방해하지 않을 것 등을 약속하도록 한다.
이때 신자가 교회의 혼인 예식을 따르지 않고 혼인하거나 교회의 허락(관면, 寬免)없이 비신자 또는 타종교인과 혼인을 한다면 교회법상 혼인장애에 놓이게 되며, 혼인장애 상태인 이들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나 성사 생활을 할 수 없다.(인천주보)
2. 교우-형제 여러분
지금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얻어 “베드로 형제님! 마리아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고 어떨 때는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는 용어가 되었지만 원래 교회 내에서 형제자매라 부른 전통은 참으로 숭고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반영한다.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직전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교우(敎友)들 보아라! 우리 벗(友)아!” 순교 직전 김대건 신부님은 신자들을 벗이라 불렀다.
예수님은 벗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며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인 형제자매라고 말씀하셨다. 사제들이 옛날부터 “교형자매(敎兄姉妹) 여러분!”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정신은 인간평등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인간이 왜 평등할까? 왜 평등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고민했고 천주교의 전례와 교리를 통해 그 답인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목숨을 바쳐 믿음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평소의 삶에서 이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히브 2,11)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음을 깨닫고,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예수님과도 형제임을 전례에서 확인하고 살았다.
이렇듯 그리스도교의 평등은 바로 같은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음에서 시작한다.
가끔 여교우들이 ‘왜, 미사 때 호칭을 형제여러분! 이라고만 하세요. 우리 자매들도 있는데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이는 라틴어의 Fratres(형제 여러분!)은 단순히 남교우들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여교우를 포함한 호칭이다. 우리도 누나나 여동생들을 함께 ‘형제들’이라고 통칭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예전 미사경문에는 “교형자매 여러분!”이라고 해서 남·여 교우 모두를 호칭해서 보다 명확히 했으나 지금은 라틴어의 어법과 한글 문법에 맞추어 간단하게 “형제 여러분!”이라고 한다.
미사에서 ‘형제’의 의미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주님의 기도’와 ‘기도 초대’이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로 시작하는 기도 초대는 2세기 중엽에 치프리아노 교부가 초안을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즉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라는 뜻이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 예비자들은 주님의 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세례를 받은 다음에 주님의 기도를 먼저 세례를 받은 교우들과 함께 드릴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은 막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벅찬 감동이다.
세례 받은 모든 교우들은 같은 아버지를 섬기는 자녀들이다. 이로써 예수님과 형제가 된 우리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례 이후에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다.(가톨릭신문)
손석준엘리야
전남대학교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http://love.chonnam.ac.kr/~sohnsj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