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홍의 나쁜 생각(월간 시 11월 게재 원고)
용서
“지난 여름은 언제나 격렬했다”라고, 나는 이십 대에 썼었다. 요즈음 자꾸 젊어서 썼던 시들이 생각난다. 왜 그렇게 무모하게 써왔던가. 어떤 목 마름이, 어떤 그리움이 날 휘몰아왔던가.
오늘 아침 서재 창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소슬하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힘을 온몸으로 수용하게 하는 바람. 당신, 그대, 너, 그 사내, 그 여자로 불리었던 내 모습들, 평생 내가 찾아 헤맨 이름들은 은밀히 실 눈 뜨고 날 노려보았던 시간 들이었구나. 그래, 도피하지 못하는 다혈질의 성격이 치명적인 병으로 내 몸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나도 수시로 생에서 내려 도피하고 싶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 죄”라고, 난 삼십 대에 썼었다. 결국,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 죄의 대가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용서는 인간의 몫이 아니다.’라는, 핑계로 난 아무도 용서하지 못했다. 아무도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은 나 자신도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 그렇게 나는 날 집요하게 갉아먹었다. 이제 난 당신이라는 이름의 나를 풀어주고 싶다.
계단을 오르다/어쩌다 한 발/헛딛었을 때//너는 괜잖다고/말하지만/나는 부끄럽다//.용서해다오.//용서해다오.
- 이수익 <목소리 11> 중에서.
퇴색
어떻게 퇴색되느냐에 따라 퇴색도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답게 퇴색된 것들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새것이 결코 지닐 수 없는 독특하고 깊은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가구 고미술 등을 선호하고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기도 한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어떻게 퇴색하느냐에 따라 천박하게 늙어가거나 품위 있게 늙어가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라하지 않게 늙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늙어가면서 재물에 집착하거나 명예에 집착들 하는 모양이다. 돈이 있으면 물론 덜 초라하고 명예가 있으면 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허나, 사람(타인) 사랑하는 정서가 증발 되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된 모습을 볼 때마다 아무리 돈이 있고 명예가 있다고 해도 노탐老貪의 역겨움으로 다가오곤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필자의 개인 성향일 것이다. 죽자고 사랑하던 사이도 물론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이 퇴색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어떻게 퇴색하느냐에 따라 고가구처럼 아름다울 수 있고 구린내만 풍기며 결별의 수순을 밟을 수도 있는 것이다.
퇴색의 백미는 단풍이다. 이는 색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낙엽으로 스스럼없이 질 줄 아는 내공이 쌓여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치사하고 더러운 퇴색은 노탐老貪이다.
허구虛構
모든 예술은 허구를 지향한다. 물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필자의 상상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허구의 세계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심지어 르포나 기사문, 혹은 역사서 같은 객관성을 그 기본으로 삼는 경우에도 필자의 생각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모든 예술은 그 바탕에 허구를 깔고 있으므로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사기란 일상 용어로 쓰이는 사기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왜냐하면,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현실의 극복이요, 어떠한 이상 점에 도달하기 위한 치열한 정신 노동이기 때문이다. 문학도 예술의 한 장르라는 전제 하에 비 문학의 글들, 예를 들면, 신문 기사나 논설, 혹은 학술 논문 등을 제외한 문학 작품들은 허구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문학 작품들이 다른 쟝르의 예술 즉 미술이나 음악 등에 비해 더 현실적인 것으로 수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그 재료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현실에서 사용되는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문학 작품에서 사실성은 독자에게 일차적 공감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 작품을 현실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저 차원의 독서 법 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되는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서 객관화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현실을 객관화 한다. 그래서 독자도 자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작품에 접근하게 되고 작가가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쟝르의 예술이든 일단 발표되고 나면 작가의 손에서 벗어나 독자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작품은 작품 그대로 객관성을 갖게 된다. 같은 작품을 A라는 독자와 B라는 독자가 서로 다르게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만 그 작품의 지닌 다양성이 빛을 발하는 것일 것이고, 그만큼 그 작품 스스로 견고한 보편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작품 속에서 자꾸 작가의 모습을 읽어내려 한다. 물론 그 작품 속에는 작가의 모습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작가의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만 읽어 내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앞에 언급했듯이 세상의 모든 작품은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이 그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독서 법은 우선 작품을 마치 어떤 사물을 보듯 작품 자체가 지닌 구조와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읽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은 창조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작품 스스로 작가의 손을 떠나 생명을 지니는 독립된 개체란 의미와 같다. 물론 인간의 본성에는 작품보다는 작가의 주변의 이야기나 스캔들에 더 흥미와 감동을 느끼는 속성이 있다. 가령 모짜르트의 음악은 몇 곡 알 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이 듣지도 않은 사람이 그의 전기 형식으로 된 영화의 이야기나 글에 큰 감동을 느끼는 경우와 같다. 하지만 이 전기조차도 전기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가능한 흥미롭게 재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해내는 독자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막상 모짜르트를 영화화 한 내용만 믿고 그의 음악을 열심히 찾아 듣는다면 곧 지루해질지도 모른다.
작품을 작가와 동일시하면서 읽어 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작품 자체가 주는 객관성을 놓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는 작가의 숨 쉬는 현실이 반영되긴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은 아니기 때문이고 작가가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치열한 정신(허구, 상상)의 세계라는 것이 예술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과학이나 사회 인문의 다양한 장르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그 바탕이 허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동의 깊이와 진동이 비 예술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