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순환의 수학적 고리 속 돋보이는 테셀레이션 기법
네덜란드의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1898∼1972).
그는 공간 착시와 불가능한 장면의 사실적 묘사, 정다면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만든 화면의 연금술사다.
‘수학적 화상’이라고 하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인 공간과 평면의 마술적 구조를, 기하학적 원리와 수학적 개념을 토대로 평면의 규칙적 분할에 의한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연결 그리고 대립과 대칭을 통한 모호한 시각적 환영 속에 사실과 상징, 시각과 개념 사이의 관계 등을 다뤘다.
그는 스페인의 그라나다(Granada)에서 알함브라(Alhambra) 궁전을 방문했을 때 그 궁전의 장식에 그려진 무어인의 양식과 뫼비우스의 띠에 매료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처음 에셔의 작품을 접하면 예술적 감흥보다는 지극히 정적인 차가움만 감도는 수학적 세계와 같다고 하지만 반복과 순환이라는 냉정한 수학적 고리 속에 잔잔한 감동이 있다. 작품은 스케치북 속 도마뱀이 밖으로 빠져나와 화가 주변의 물체들을 지나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다시 수많은 도마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적으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연출됐다. 여러 마리의 도마뱀 다리와 머리가 뒤엉켜 있지만 하나하나 정확한 원형을 이루는 이 기법은 그의 전매특허인 ‘쪽매맞춤’이라 불리는 테셀레이션 기법이다.
각각 다른 공간에서 가상과 현실의 기묘한 세계는 확실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에 대해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순간 그의 상상력은 우리에게 들어왔다가 우리는 그에게 다시 내보낸다.
<최재훈 UNESCO A.port 책임큐레이터 > 국방일보 2013.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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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에셔의 「도마뱀」
최라라
……그리고 당신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내 영혼은 잠시 무중력이겠습니다
어둠 이전의 당신이 당신 이후의 어둠을 점선으로 묶습니다
자라지 않는 것은 슬픔만입니다
나는 당신의 걱정만큼 흐르는 중이고
어둠으로부터 온 중력이 감각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순환 중이므로 두꺼운 옷을 입은 채로 잠들겠습니다
어느새 당신 밖입니다 그리고
캄캄한 현실은 꿈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처음을 모르는 파충류
뒤돌아볼 수 없으므로 꿈은 앞으로만 흘러가는 벽입니다
아무리 걸어도 외워지지 않는 숫자들이 거기 있으므로
나는 유일하게 배란기를 기억하지 않는 암컷입니다
내 숫자들은 삼각이나 사각의 기호로 무성해져
내가 모르는 달력에서 꽃밭이 됩니다
꿈은 의미를 잃은 단 하나의 꽃밭입니다
그리고……이곳은 나도 모르는 오후입니다
책상 위로 햇살이 가득합니다
작고 따뜻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이제 잠들어도 될까
이제 잠들어도 될까
내 목소리를 내가 들으며 사라집니다
이곳은 나도 모르는 당신 밖입니다
이제 당신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문장웹진》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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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라라 / 2011년 《시인세계》로 등단.
에셔 병원
함기석
빛이 검게 싹트고 있다
중앙 707 사체보관실 내 따뜻한 폐에서
이상하다 내가 언제 죽은 거지?
창가엔 꿈이 담긴 빈 컵, 개나리 꽃 몽우리가 노랗게 싹트고
컵의 내부에서 비밀이 새고 있다
아침은 아침마다 새고
은은한 새소리가 개나리 꽃 가지를 흔든다
창틈의 빛이 내 눈에 매캐한 연기를 방사하는 비단뱀 같다
이상하다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 거지?
누가 날 죽인 거지? 이 깊은 칼자국은
지네 닮은 실밥이 팽팽히 부풀고 있다
죽은 자의 혼백이 제 살을 열어 끔찍한 황궁을 엿보는 시간
나는 나에게서 물러나 내 주검을 내려다본다
죽음은 흰 침과 붉은 오줌이 뒤섞인 시음용 마취제
이상하다 내가 어디서 이 약병을 마신 거지?
창가의 새들이 탐정돋보기처럼 떠든다
푸른 환자복과 휠체어가 7층 복도에서 웅성웅성 떠들 때
두 눈이 쌍둥이 블랙홀 같은 병원장 에셔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끝의 사체보관실로 들어온다
입에 입을 없애는 마스크를 쓴 자들이 뒤따르고
발소리는 침묵을 깨며 이심률이 점점 커지는 타원을 그린다
휘어진 벽엔 휘어진 옷 휘어진 인체해부도
이상하다 왜 이 자들이 나를 옮기는 거지?
망각은 기억할수록 점점 모래가 새어나가는 육체의 항문
고무장갑 낀 두 손이 힘껏 내 폐를 열고 있다
아파, 아파요! 하지 마세요!
내가 소리치자 창밖 은사시나무의 새들이 흩어지고
폐허의 황궁 바닥에서 벌레들이 떨어진다
죽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것들뿐인 이 세계
썩은 살에서 기억은 가까스로 입술이 싹튼다 손톱이 싹튼다
—《포지션》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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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손을 그리는 손
김미정
연필 끝엔 가늘게 선이 빠져나오고, 그 길을 따라가는 당신, 타오르는 손가락을 깎고 있어요. 눈동자를 그려요. 오늘의 손끝이 부풀어 오르네요.
손가락을 삼킬 거야, 흰 재로 길을 만들고 처음 보는 손바닥 밖으로 걸어 나가요. 손이, 손을 매달고 가는 도화지마다 그림자를 흔들고 있어요. 당신을 향해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손이 손을 뚫고 자라요. 잘 그려지지 않는,
눈동자를 꺼내요. 손바닥을 뒤집어 불꽃으로 타오르는 손가락을 보고 있어요. 왼손이 그려지면 오른 손이 지워지는 날들. 누군가 투명한 손을, 손을 흔드네요.
—《시와 반시》201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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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손을 그리는 손
―M. C. Escher의 석판화 「Drawing Hands」
강인한
흰 드레스셔츠에서 빠져나온 손
연필을 쥐고
과거에 매달리고 있는 기억력이 나쁜 손이 있다.
의심이 많아서
만져보기 전엔 절대로 믿지 않으며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리는 실증(實證)의 습관.
완벽하고 높은 일상의 궤도에 진입하기를 기도하는 손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꿈속에서 건져낸 표정은
지금 여기서의 삶이 지루하다.
검은 탁자 위 회색 중절모 속에 접혀 있다가
줄줄이 풀려나오는 붉은 리본,
꾸깃꾸깃 접혀 있다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한 마리 흰 비둘기는 당신의 두 손이
간절히 바라는 꿈.
인생이라는 두꺼운 책 표지를 잠시 덮어두고
당신은 오른손으로 연필을 쥔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림자들의 벌거벗은 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늘게 그려지는 선, 선들을 모아
쌍둥이처럼 닮은 당신의 오른손을 향하여
연필 끝으로 좇아가고 있는 내 오른손의 목마름이여.
첫댓글 그림 속에서 시가 기어나와서 다시 그림으로 ....
퍼 갑니다 감사합니다^^*
새롭게 보고 읽었습니다.. 뭔가 떠오를 것 같은 느낌으로...ㅎ